힐링물 속 피폐 엑스트라가 되었다
12화
레이블라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당장 해명하지 않으면 해코지라도 할 기세였다.
열 살 무렵의 아이가 갖기에는 너무나도 살벌한 눈빛인 데다가 딱 두어 번 만난 사람을 대하는 것으로는 보기 어려운 갑작스러운 태도였지만, 레이블라는 그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
그를 저리 만든 사람이 자신이었으니까.
“메시지 읽었구나?”
“…….”
레이블라가 무덤가에 꽃과 함께 둔 쪽지에 적은 문장은 단 네 줄.
[길게 쓰면 그냥 찢어 버릴 것 같아서 짧게 쓸게.]
[고마워.]
[구해 줘서 정말 고마워.]
[근데 나, 네 비밀 알고 있다? 궁금하면 찾아와.]
그를 만날 방법이 없던 레이블라로서는 그를 제 앞으로 데려오기 위해 무슨 수든 써야만 했다. 하지만 지난 만남으로 추측하건대 아이는 무심한 성정인 듯했고, 웬만한 일로는 만나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극해 본 것이었다.
세상에 비밀이 없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황궁의 숲속에 부모의 묘소를 지닌 아이라면 더더욱.
“놀랐지? 미안해.”
지금의 사과에서 그는 제가 받은 메시지가 아무 의미도 없음을 깨달은 듯했다.
냉랭했던 눈빛에 약간의 화가 깃들더니 이내 소년이 시선을 돌리면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런 거짓말에 놀아났단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처럼.
“잘 지냈어?”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의 눈동자는 다시 레이블라를 향하지 않았다. 무심한 낯으로 용건이 끝난 듯 훌쩍 창틀을 뛰어넘을 뿐이었다.
이에 다급해진 레이블라가 똑같이 창틀을 넘어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급히 그의 등 뒤로 허리를 안으며 꼬옥 달라붙었다.
“놔.”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지 않으면 놓지 않을 거야.”
“……내가 못 뿌리칠 줄 알아?”
“네가 살려 준 목숨은 소중히 해야 하는 거야.”
“너 진짜 뻔뻔하다.”
“그치?”
뻔뻔하다는 소리에 그렇다고 답하는 게 어이가 없었는지,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레이블라는 배시시 함께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고마워. 구해 줘서. 네 덕분에 살았어. 내 은인이야. 이 이야기는 꼭 직접 해 주고 싶었어.”
“…….”
“너도 이제는 알겠지만, 나는 펠리시티라서 너를 직접 도울 순 없어. 하지만 네가 만약 펠리시티의 정보가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나를 찾아 줘. 내가 아는 것이면 뭐든 답해 줄 테니까.”
그에게 ‘내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일하고 있다.’라고 알려 주지 않았음에도 찾아왔다는 것은 그가 레이블라에 관한 정보를 들었고, 이를 추측해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펠리시티’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목숨’이라는 큰 선물을 준 사람이니, 이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 주고 싶었다.
‘소설에 나왔던 인물이라면 내가 알아서 보답을 해 줄 수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소설 밖의 인물이었다. 그렇다 보니 무엇이 필요한지도 알 수 없었다.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는데…….”
레이블라가 은근하게 말을 끌면서 그의 등 뒤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노기가 한결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나, 네가 가져온 꽃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은데, 알려 줄 수 있어?”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그를 보자, 그가 작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놓아주면.”
하지만 레이블라는 미운 세 살처럼 그의 말과 반대로 더욱 힘주어 안으며 찰싹 달라붙었다.
“도망가면 어떡해.”
“안 가.”
“손이라도 줘. 그럼 믿을게.”
레이블라가 손을 꼼지락하면서 잡아 달라고 채근 대자, 반반했던 그의 미간이 살포시 좁혀졌다. 하지만 이내 작은 한숨과 함께 레이블라의 손에 제 손을 덮었다. 레이블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쏙쏙 집어넣은 레이블라가 환하게 웃었다.
“좋아. 그럼 가자!”
레이블라가 앞서 나가며 그의 팔을 당기자, 가만히 레이블라를 응시하던 그가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성큼성큼 숲으로 들어가는데, 솔직히 처음에는 장난치는 줄만 알았었다. 하지만 점점 숲이 깊어지며 빛 한 점 없이 어두워지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걱정이 치밀었다.
게다가 길은 얼마나 험한지. 앞이 보이지 않아 자꾸만 돌부리에 툭툭 걸리고 나뭇가지에도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소년이 잡아 주어서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걸음걸음 내디디는 것이 참으로 힘겨웠다.
그렇게 어렵사리 도착한 장소에는…….
‘……미쳤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보랏빛 꽃이 그녀를 맞이했다.
“드, 드디어……!”
꼭꼭 숨어 있는 약초를 찾느라 고생한 시간이 얼마던가.
해독초를 찾겠다고 돌아다니다 황궁 사람들에게 면박당하고,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돌아다니느라 수면 부족에 시달리던 나날들.
잔뜩 긴장한 채 황녀의 음식을 시식하다 체한 적은 부지기수에, 그렇게 먹는 음식들로는 허기가 차지 않아 늦은 밤 몰래 나와 정원의 과실을 슬쩍 따서 먹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끝이야!’
이젠 독이 잔뜩 든 물에서 수영해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벅차오르는 감격에 대뜸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레이블라가 아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제 감정을 아이를 꼬옥 안아 주는 것으로 대신 풀었다.
“정말 고마워. 너는 내 천사야!”
비체라발리 공작 이후로 천사 자리에 한 명이 더 들어왔다.
“그러니까, 나도 너의 수호천사가 되어 줄게.”
지금 살아 숨 쉬는 건 전적으로 해독초를 찾아 준 그의 호의 덕분이었다.
“다음에는 내가 찾아갈 테니까 기다려 줘.”
그러니 그녀 역시 도움을 줘야만 했다.
“그때는, 꼭 이름 알려 주기예요, 대공 전하.”
소곤소곤 귓가에 대고 속삭이자, 소년이 놀란 듯 크게 두 눈을 떴다. 레이블라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면서 크게 웃었다.
네 비밀, 정말로 알고 있었어. 놀랐지?
라는 뜻을 담아서, 아주 환하게.
* * *
일주일 만에 복귀한 황녀궁은 여전히 행복이 넘치고 있었다.
독살 미수 사건의 여파인지 몇몇 시녀가 방출되고, 인력을 충원하지 않아 다들 더 분주해지긴 했지만 웃음꽃은 만발했다.
그도 그럴 게 며칠 전, 황녀의 제안으로 시행했된 마수 토벌에 대한 영지민들의 감사 인사가 오늘 아침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전하께서는 어쩜 이렇게 영민하실까요? 어떻게 마수가 나올 것을 미리 아셨는지, 정말 대단하세요.”
“그러니까요. 역시 우리 황녀 전하세요.”
“그간 궁 분위기가 침울했는데, 좋은 소식이 전해져서 다행이에요.”
“정말이요.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얼마 전 사건 때문에 조금 침울해하셨잖아요. 황제 폐하께서도 걱정하시고요.”
“오랜만에 웃으셔서 정말 좋아요. 이제야 사람 사는 것 같아요.”
시녀들은 정말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토록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아이가 제 옆을 지나가는데도 웃음이 사라지지 않으니 말이다.
시녀들을 지나 복도 한 귀퉁이에 있는 쪽문 안으로 들어갔다. 조리실과 식사를 위한 다이닝룸 사이에 마련된 작은 공간은 황녀의 시식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였다.
레이블라가 제자리에 착석하고 시식할 준비를 마치자 음식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사이에도 시녀들은 레이블라의 존재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칼슨 경도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황녀 전하께 모든 공로를 돌리셨잖아요.”
“폐하께 당당히 ‘주군께 이 모든 영광을 바치겠다.’라고 하셨다면서요? 진짜 멋지세요.”
“그분께서 가장 멋있었을 때는 기사의 맹세를 하시던 때였죠. 아, 아직도 생각나요. 엄숙한 표정으로 검에 손을 얹었다가 쓱 빼내어서 무릎을 꿇고 검을 앞으로 내밀던 그 모습!”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잘 살아 있나?’
문뜩 약제소에서 만났던 기사가 떠올랐다. 마수에게 할퀴어 죽음을 오가던 사람. 해독초를 주고 아이를 만나기 위해 묘에 들렀다가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물어도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추후 경과는 알지 못했다.
‘그때는 마지막 남은 약초인 줄 알았지.’
그래서 그 사람을 살리는 일에 조금 주저했었다.
‘그때 그 사람을 도와서 이렇게 복을 받았나?’
넘치도록 많은 해독초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덥석 입 안에 음식을 넣고, 우물우물 씹는 중에도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이제 먹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마음이 편해지니 그간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다채로운 맛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이었다.
꿀꺽.
시원하게 음식을 삼키고 난 다음 음식을 기다리는데, 웬일인지 주변 분위기가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 재잘거리던 소리가 사라지고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뭐지?
슬쩍 시선을 들어 올리자, 눈을 마주친 시녀들이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레이블라의 눈에는 그냥 외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지금 시녀들은 무척이나 당황한 상태였다.
시식가가 시식을 하면서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