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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4화 (14/123)

14화

데반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10년도 넘게 자신을 괴롭혀 왔던 저주가 이토록 쉽게 풀렸다는 사실이 허탈한 걸지도 몰랐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든 것처럼 물어왔다.

“오른쪽은? 내일은 오른쪽의 저주를 풀 수 있나?”

“그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왼쪽은 지금까지 하던 것과 똑같았지만, 오른쪽은…… 확신할 수 없었다.

방금 전 날 쫓아오던 그 검은 형체를 상상하기만 해도 한기가 돌 지경이었으니까.

오른쪽을 치료하려면 그것과 맞서야 했다.

그게 가능할까? 아니, 가능하다고 해도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일단 조금 느긋하게 가죠. 원래 신력이 그렇게 한 번에 막 쓸 수 있는 게 아니라서.”

횡설수설하는 나의 변명에도 데반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신전이 정보를 독점하고 있기에, 일반인들에겐 신력에 대해 알려진 바가 별로 없었다.

데반은 그저 내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처음으로 신전이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래, 그럼 일단 바로 의사를 부르지. 돌아가서 쉬어도 좋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데반을 난 덥석 붙잡았다.

“잠시만요. 저는 말한 대로 저주를 풀었어요. 전하께서도 하실 걸 하셔야죠.”

“뭐?”

그는 미간을 찌푸리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돈을 달라?”

“……네.”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왼쪽 눈을 치료한 건 맞았지만, 지금의 그는 별다른 걸 느끼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여전히 내가 사기를 치고 있다고 의심한다면 돈을 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데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역시 눈이 보이지 않는 자답지 않게, 자연스럽게 제 책상으로 향했다.

딸랑― 그가 종을 흔들고 얼마 안 가 노집사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돈을…….”

말을 하다 말고 데반이 내 쪽을 바라봤다.

“돈이 좋은가? 보석이라든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전생의 기억은 있지만, 솔직히 이 세계의 화폐 구조를 잘 아는 건 아니었다.

소설에서 그런 걸 자세히 다뤄 줄 리가 없었으니까.

환생을 한 후엔 그런 류의 기초 교육도 없이 신전과 백작가에 갇혀 살았으니 알 리가 없었고.

만약 돈이 내 상상대로 금화라면, 그걸 이고 지고 도망치는 것도 무리였다.

그렇다고 마냥 보석으로 달라고 하기엔, 현금화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저, 실은 제가 화폐에 대해 잘 몰라서요.”

난 고민 끝에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는 내가 백작가에서 사랑받고 자라난 여식인 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나이이니, 화폐에 조금 무지하다 한들 아주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이 제국에서 도망치려면 어떤 게 좋을까요. 돈으로 받는 것과 보석으로 받는 것 중에.”

노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 무언갈 고민하는 듯 제가 기대 있는 탁자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도망친다라. 누구한테서?”

“네?”

난 그제야 내가 말실수를 했단 걸 깨달았다.

도망친다고 하면 안 됐는데.

“그냥…… 제국을 떠나고 싶어서 하는 말이에요.”

“떠나고 싶은 게 제국이 맞나?”

날이 선 말투였다.

“그런 건 묻지 말라고 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전 전하의 저주를 풀고, 전하는 저에게 돈을 주고. 그게 다예요.”

그가 책상을 두드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이 제국을 떠나면 어디로 갈 거지?”

“그걸 말씀드려야 할 이유는 없어요.”

“……제국마다 화폐 단위가 다르다. 이 정돈 알고 있겠지?”

데반은 약간 턱을 치켜올렸다. 꼭 정곡을 찔렀다는 표정이었다.

난 잠시 망설였다가, 의연하게 답했다.

“국경에서 충분히 바꿀 수 있겠죠. 그렇지 않다면 제국 간 거래를 어떻게 하겠어요?”

정말로 그런지는 몰라도, 제국끼리 교류가 있는 이 세계에 환전이란 개념이 없을 린 없었다.

내 태도에 데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집사를 바라보며 명했다.

“돈을 가져와라. 그리고…….”

그가 다시 고심하듯 턱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더니 돌연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어떻게 생겼지?”

“……네?”

갑자기 어떻게 생겼냐니?

뜬금없는 질문에 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데반은 상대를 바꿨다.

“집사.”

“아……. 예, 전하. 그러니까 아가씨는.”

노집사는 슬쩍 날 바라보며 말을 골랐다.

“초록색이 섞인 노란 꽃잎 같은 머리칼에, 바다 같은 눈동자를 가지셨습니다. 아, 눈동자에는 은하수를 흩뿌려놓은 듯하군요.”

꼭 음유시인 같은 집사의 말투에 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난 손등을 볼에 대곤 괜히 헛기침했다.

“그러니까 금발에 청안이다, 이거군.”

“……그렇습니다.”

데반은 집사의 긴 미사여구를 한마디로 정리해 버렸다.

“청금석이 좋겠군. 어머니가 남기신 브로치가 있을 거다. 찾아와.”

“예, 전하.”

노집사는 빠르게 방을 나섰다.

어머니라면, 황후인가?

난 잠시 고민했다. 청금석이 뭔지는 몰라도 황후의 브로치면 굉장히 비싸지 않을까.

그런 귀한 브로치를 과연 돈으로 바꿀 수 있을까. 차라리 값싼 보석 여러 개를 받는 편이 현금화하기 쉽지 않을까.

“여기 있습니다. 전하.”

“나 말고, 저쪽에게.”

그러나 그런 생각은 집사가 건넨 상자 뚜껑을 열자마자 사라졌다.

그곳엔 고급스러운 윤기가 나는 브로치가 있었다.

꼭 심해처럼 어두운 색의 파란 원석 위로 누군가가 금가루를 뿌린 듯 점점이 황금빛 반점이 찍혀 있었다.

그 원석을 감싸는 꽃잎처럼 황금이 있었고, 중간중간 다이아로 보이는 보석까지 박혀 있었다.

거기에 브로치를 착용하기 위한 핀은 꼭 화살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난 살포시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화살?

“이건…….”

“어머니가 개인적으로 남기신 물건이다.”

난 화살이 잔뜩 박힌 사자가 그려진, 란티모스가의 인장을 떠올렸다.

그 화살이 브로치에도 박혀 있는 게 단순한 우연일까?

황가의 물건이 아니라는 그의 말을 믿어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황가의 것이라면 다른 제국에서 팔았다가 무슨 사달이 날지 몰랐으니.

“……비싸 보이는데요.”

데반의 입꼬리가 아주 오랜만에 슬쩍 올라갔다.

그가 집사에게 물었다.

“잘 어울리는 것 같나?”

노집사는 브로치를 들고 있는 날 바라보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아가씨와 완벽하게 잘 어울립니다.”

“그래. 그럼 됐다.”

두 손에 소중히 브로치를 내려놓고 빤히 바라봤다.

확실히 내 눈동자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뭐, 괜찮겠지.

데반이 소중한 황가의 보물을 나에게 건넬 리가 없었다.

정 찝찝하면 브로치를 분해해, 보석만 따로 팔아도 될 테고.

난 안일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브로치를 다시 상자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좋아요, 그럼.”

“아, 아가씨. 여기 따로 금화를 준비해 뒀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에게 노집사가 벨벳으로 만든 꾸러미를 건넸다.

그 안에는 금화가 들어 있었고, 역시나 꽤 묵직했다.

모든 대가를 금화로 받았다면, 무거워 들고 다니지 못했으리라.

보석으로 나눠 받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봐요. 의사를 부르는 걸 잊지 마시구요. 조급하다고 빛 아래에서 안대 벗지도 마시구요.”

“그러지.”

난 그대로 내 방으로 향했다.

*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품 안에 있는 상자를 꺼내 열었다.

청금석이 잘 세팅된 브로치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시 봐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거라면, 바로 이곳을 떠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유혹이 들었다.

침대에 던지듯 놓아 둔 꾸러미도 열어 확인했다. 금화는 꽤 묵직했다.

이 세계의 화폐 단위를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게 적은 돈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똑똑―

노크 소리에 저도 모르게 놀라, 꾸러미와 상자를 이불 속에 숨겼다.

“아가씨, 저예요.”

힐다의 목소리였다.

“……들어와.”

그녀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치료는 끝나신 거예요?”

“그래.”

“목욕 준비를 할까요?”

잠시 고민하다, 난 손가락을 까딱해 힐다를 가까이 오게 했다.

그러곤 이불 속에서 꾸러미를 꺼냈다.

“이게 뭐예요. 아가씨?”

꾸러미를 열어 금화를 보여 주자 힐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정도면 얼마니?”

“네?”

“그러니까 이 정도 돈이면…… 얼마나 생활이 가능하겠느냐고.”

힐다는 꾸러미를 뒤적거리며 금화를 눈대중했다.

“저희 집은 이 정도면 세 달은 먹고 살겠어요!”

“너희 가족 전체가?”

“예, 아가씨!”

“몇 명인데?”

“저까지 넷이에요.”

네 명의 평민이 세 달 동안 생활할 수 있는 돈이라.

그렇다는 건 나 혼자 1년은 살 수 있단 소리였다.

나는 애초에 백작가에서 제대로 된 귀족 영애 취급을 받으며 자라지 못했다. 그러니 평민들과 함께 생활한다한들,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아마 국경을 넘는 데에는 큰돈이 들 것이다.

이 세계든 저 세계든 한 제국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일단은 이 돈으로 어떻게든 엘리운에 도착하고, 그 후에 브로치를 현금화하자. 그리고 그 돈이 다 떨어지기 전에 일을 구한다면…….

현실적인 가능성이 보이자 근육이 팽팽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가씨?”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힐다가 의아한 얼굴로 날 올려다봤다.

“……목욕 준비를 해 줄래?”

“네, 아가씨!”

힐다가 후다닥 방을 나갔다.

난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고민했다.

내가 그의 오른쪽 눈을 치료할 수 있을까?

방금 전 느꼈던 검은 형체를 생각하자 자신감이 뚝뚝 떨어졌다.

그럼 차라리…… 지금 당장 도망간다면 어떨까.

신전에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지금, 데반이 날 완전히 믿고 있을 때 도망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데반의 눈을 생각하면 죄책감이 가슴을 콕콕 찔렀다.

이대로 그의 저주를 풀지 않고 도망친다면, 그는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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