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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6화 (16/123)

16화

킬리언이 나를 찾으러 오고 있다.

그가 오기 전에, 내가 먼저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돈도 있었고, 주변도 조금이지만 파악한 뒤였다.

그러니 엘리운까지 가는 자세한 경로를 알아낸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제 오는데요?”

일주일 정도만 시간이 있다면…….

초조하게 입술을 물었다.

데반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날아와 꽂혔다.

“내일.”

난 그대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탓에 무릎이 테이블을 쳤다.

와장창, 식기가 불쾌한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이게 무슨 짓이지?”

데반의 미간이 짙게 패였다.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내일?

킬리언이 온다. 내일. 대공 저로. 나를 찾으러.

이틀 전 느꼈던 오싹한 시선이 떠올랐다. 사랑을 갈구하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도.

“이봐.”

왜? 어떻게? 물음표만이 가득했다.

“에블린.”

데반을 홱 바라봤다.

“왜, 아니.”

“괜찮은 건가?”

“그러니까…… 미룰 순 없나요?”

“뭐?”

데반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미 허락한 알현의 일정을 바꾼다는 건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당장 내일이라면, 킬리언은 이미 출발했을 가능성이 컸다.

제도에서 이곳 대공령은 꽤 거리가 멀었으니.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가 빠르게 팽팽 돌아갔다.

그가 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

어떻게?

주방 열쇠를 훔치고,

창문으로 뛰어내려서,

성벽을 타고,

담을 넘어서,

다리를 건너고,

그대로 국경으로,

엘리운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꼭 죽기 직전의 생선이 제 운명을 직감하고 팔딱거리는 것처럼.

“대체 무슨 일이지? 만나길 원치 않는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만.”

데반을 빤히 바라봤다.

저 남자가 날 도울 수 있을까?

아니, 그에게 나는 단순히 저주를 풀어 줄 수단일 뿐이었다.

오른쪽 눈의 저주를 풀지 못한다면 그가 날 보내 줄 리 없었다.

“오늘…… 오른쪽 눈을 치료하는 게 좋겠어요.”

“뭐? 이봐, 갑자기 그게 무슨…….”

“전하께서도 치료가 급한 것 아닌가요?”

목구멍을 짜내듯, 겨우 말을 내뱉었다.

데반이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무슨 일인지 알려주지 않겠다는 거군.”

“…….”

“……알았다. 그럼, 같은 시각에 내 방으로 오지.”

“……알겠어요.”

여전히 멍한 상태로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엔 온통 킬리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

식사를 끝마치고, 난 무작정 정원으로 나갔다.

그러곤 산책이라는 명목으로 성벽 주위를 둘러봤다.

몇 걸음 떨어진 뒤에서 갑옷을 입은 카렌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역시 나에 대한 데반의 신뢰가 한층 높아졌다는 방증이었다.

딱 붙어서 산책해야 했던 전과 달리, 어느 정도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하…….”

절로 한숨이 나왔다.

킬리언이 이곳에 온다. 당장 내일.

이걸 어쩌지?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혹 신전과 결탁한 건가? 아니면, 대공령에 퍼져 있는 소문을 듣고 눈치챈 걸까?

그는 아스트릴라의 수하였으니, 황태녀가 와 있다는 대공의 거짓말을 쉽게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백작은 알고 있을까, 아니면 킬리언의 단독 행동인 걸까.

만약 들킨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지하실로 다시 끌려가는 걸까?

차라리 킬리언을 설득해서 다른 곳으로 함께 도망치는 건 어떨까.

고개를 세차게 도리질했다.

그런 건 불가능했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킬리언과 단둘이 평생을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가슴팍이 위아래로 크게 요동쳤다. 피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단 하나.

오늘 밤,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성을 나가는 경로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문제는 체력이 부족한 내가, 모든 병사들을 따돌리고 나가는 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슬쩍 카렌을 곁눈질했다. 카렌이라면 한 손으로도 나를 저지하고, 팔다리 하나쯤 부러트리는 건 일도 아니겠지.

원래는 시간을 두고 좀 더 그럴 듯한 계획을 세우려고 했는데…….

킬리언이 당장 내일 온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되든 안 되든 오늘 데반의 오른쪽 눈을 치료하고, 그의 도움을 받아 빠져나가는 수밖에.

“그래, 한번 시도해 볼 순 있겠지.”

만약 저주를 푸는 데 성공하면 약속했던 대로 보수를 받으면 됐다.

하지만 만약 저주를 풀지 못한다면…….

도망쳐야지.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그 수밖엔 없었다.

설령 운이 따라주지 않아 중간에 잡힌다고 할지라도, 손 놓고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았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그나마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까.

“아가씨, 데이지를 좋아하시나 봐요?”

그 순간, 뒤쪽에서 갑자기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바라봤다.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힐다였다.

“너…… 언제부터 있었니?”

“뭘 그렇게 놀라세요?”

“……내가 분명 시트를 모두 갈아 두라고 하지 않았어?”

사나운 말투에도 그녀는 전혀 기죽지 않은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시키신 일 모두 끝내고 방금 왔죠. 이 넓은 성에 하녀라곤 저 하나뿐인데, 제가 아가씨를 모시지 않으면 누가 모시겠어요?”

분명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힐다는 여전히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로, 나와 빤히 눈을 맞추고 있었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내 앞에서 겁먹은 듯한 몸짓도, 더듬는 말투도 하지 않았다.

―나는 힐다가, 내가 쓰러진 사이에 여러 정보를 얻었다는 걸 알게 됐다.

―대체 그런 정보를 어디서 얻었느냐고 물어보니, 다 아는 수가 있다며 눈을 찡긋거렸다. 이 정도면 호기심도 재능이었다.

―나보다도 하루 늦게 온 그녀가 어떻게 저토록 자신만만한 줄은 알 수 없었지만, 든든하긴 했다.

새삼스러운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저 그녀가 호기심이 많아서 그렇겠거니, 일을 배우는 것에 능숙하겠거니 싶어서 넘어갔던 일들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정체, 데반과의 거래, 신전의 움직임까지.

이 집에 사용인이라곤 노집사 하나뿐인데 그가 하루 만에 힐다에게 성의 지리를 모두 가르쳐 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당연히 데반이 한낱 하녀에게 이런 것들을 말할 리도 없었고.

거기에 그녀가…… 다른 사람이랑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던가?

내 옆에 있다가도 다른 사람만 나타나면 어느샌가 사라지지 않았던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이제껏 왜 눈치채지 못했지?

“너…… 신전에서 날 찾고 있다는 사실을 어디서 들었니?”

힐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까르르 웃었다.

어쩐지 오싹한 그 웃음에 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왜…… 말을 더듬지 않지?”

“왜요, 아가씨? 그때가 그리우세요?”

“뭐?”

돌연, 그녀는 몸을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이곤 날 곁눈질로 바라봤다.

누가 봐도 겁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아, 아, 아니면 아가씨는…… 이, 이런 제 모습이 좋으신 건가요?”

심지어 그녀는 몸을 잘게 떨기도 했다.

익숙한 혐오감이 온몸을 감쌌다.

이 느낌을 언제 받았더라?

“너, 너…… 뭐야.”

“어머, 이젠 아가씨가 저 대신 말을 더듬으시네요? 가련하기도 해라.”

서둘러 주위를 둘러봤다.

저 멀리 카렌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힐다와 내가 평범하게 이야기하는 중이라 생각할 테고, 목소리가 들릴 거리도 아니었다.

도움을 요청하고 카렌이 이곳으로 오는 것과 힐다가 나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

둘 중 뭐가 더 빠를까.

그런 걸 가늠하던 차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힐다가 몸을 붙여 오더니 내 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널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아마도.”>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꼭 두 명이 말하는 것처럼, 힐다의 높은 목소리와 어딘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네? 난 좀 더 둔할 줄 알았더니. 너 빼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거든. 그 불쌍한 사내도, 노련한 집사도. 하긴 넌 눈칫밥만 먹고 자랐으니까. 살아남으려면 응당 그래야지. 안 그래?”>

그녀가 킬킬거리며 혼자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스스로에게 도취된 모습이었다.

<“미안. 네 주위에 있을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어.”>

힐다가 두 손을 모으고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눈과 눈썹이 이상하리만치 처졌고, 그 과장된 동작에 괴리감이 밀려왔다.

난 입술만 달싹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미안. 좀 거북할지도 몰라.”>

“뭐?”

말을 마치자마자, 힐다가 내 눈앞에서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탁―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가씨, 데이지를 좋아하시나 봐요?”

어느새 다가온 힐다가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물었다.

얘는 도대체 언제 온 거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갑자기 웬…… 데이지 타령이니.”

“그야 아가씨가 데이지 앞에서 한참을 서 있으시니 그렇죠. 전에도 그러셨고.”

그제야 난 내 아래에 피어 있는 새하얀 꽃을 굽어봤다.

“……이게 데이지니?”

“예, 아가씨.”

허리를 숙여 꽃향기를 맡아 봤다.

펜던트에 농축된 향기와는 약간 달랐지만 확실히 데이지 꽃향기가 맞았다.

그걸 깨닫고 나자 정원에 유난히 데이지가 많이 피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꼭 허리춤까지 쌓인 눈처럼, 숨이 막힐 것 같이 널려 있었다.

일부러 심은 걸까?

그 저주와 데반, 코델리아를 떠올리자 입맛이 썼다.

“그다지 좋아하진 않아.”

“……그러세요?”

힐다가 날 빤히 올려다봤다.

응? 미간을 찌푸렸다.

자꾸 뭔가가 목 끝에 걸린 것 같았다.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어버린 것 같은…….

“아가씨?”

의아한 목소리로 힐다가 물었다.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자 어쩐지 토기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기억해선 안 된다는 경고와도 같은 메시지가 머리에 울렸다.

“……아무것도 아냐.”

난 힐다의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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