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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8화 (18/123)

18화

“내가 정신을 얼마나 잃었던 거지?”

“……그게, 그러니까.”

의사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손을 발발 떨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해.”

데반의 목소리는 낮게 잠긴 탓에 더 살벌하게 들렸다.

잠깐의 정적이 방 안에 흘렀다. 참다못한 데반이 직접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노집사가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전하. 전하께서…… 정신을 잃으신 날은.”

노집사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오늘로부터 1년 전입니다.”

“……뭐?”

데반이 답지 않게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노집사가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카렌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더니, 머뭇거리며 입을 달싹거렸다.

“저…….”

“……또 할 말이 남았나?”

데반이 자조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실은…… 에블린 아가씨가 사라졌습니다.”

*

이상한 기분이었다. 온몸에 에너지가 넘치는 기분. 세상에 두려울 게 하나 없고, 모든 게 내 발아래에 있는 기분.

난 눈을 번쩍 떴다.

또다시 사자가 그려진 천장, 그리고 옆에서 잠들어 있는 힐다.

창가를 보니 이미 밤이 늦은 시각인 것 같았다.

빠르게 기억을 복기했다.

치료는 실패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거 하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검은 존재에게 졌다.

그러니…… 도망가야 했다. 지금, 당장.

주방은 분명히 열한 시에 문을 닫는다고 했었다.

당장 주방으로 가 담을 넘어야 한다.

힐다에게 들키지 않도록 천천히 침대를 빠져나왔다.

미리 챙겨 뒀던 브로치와 금화가 든 꾸러미를 품에 안았다.

“후.”

한숨을 짧게 쉬곤, 방을 빠져나왔다.

내 바로 옆은 힐다의 방이었다.

망설임 없이 들어가자, 역시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서둘러 힐다의 옷으로 갈아입고, 검은 로브를 눌러썼다.

노집사는 항상 화려한 드레스를 사다 주곤 했다. 그 차림새로 나갔다간 불편하기도 할뿐더러 어딜 가나 눈에 띌 게 분명했다.

거울에 서서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했다.

정말이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분명 신력을 탈탈 털어 썼는데 정신이 맑았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몸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 모든 일이 내 뜻대로 굴러갈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까지 들었다.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그레이트 홀까진 금방이었다.

거기서 왼쪽 복도로 꺾으면 주방이지만, 당장 내 목적지는 주방이 아니었다.

일단은 열쇠를 확보해야 했다.

이 성에 계속 머무르면서, 데반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종일 생각해 봤지만, 그런 사람은 노집사밖에 없었다.

그리고 노집사는 그레이트 홀에서 오른쪽 코너를 돌면 나오는 별관에서 지냈다.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떼다가 멈칫했다.

왜일까.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주방으로 향하길 원하고 있었다.

왜?

의문은 잠시였고, 행동은 빨랐다.

난 왼쪽으로 목적지를 순회했다.

얼마 가지 않아 주방 문이 나왔고, 내가 손을 뻗자 철컥―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이게 뭐지?

방금까지 잠겨 있던 문을 열었다. 그것도 내 힘으로.

어딘가 기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두렵진 않았다.

주방에 들어가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다봤다.

까마득해 보였지만, 못할 것도 없었다. 중간중간 울퉁불퉁한 돌이 튀어나와 있어 밟고 내려가기 수월해 보였다.

대공 저에 온 뒤 며칠 동안 지금까지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든든한 식사를 한 상태였다.

전보다 체력이 좋아졌으니, 가능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나에겐 신력이 있었다.

넘어져 팔다리가 부러진다 해도, 죽지만 않는다면 곧바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입에 재갈만 물면 됐다. 비명만 지르지 않는다면 주위에 어떤 병사도 날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런 각오가 필요할까?

집사가 있을 방으로 향하는 대신 주방 문을 덜컥 열었을 때처럼 어쩐지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짓 따위 하지 않아도 이 벽을 수월하게 내려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

창틀을 잡고 천천히 몸을 내렸다.

그 상태로 한 발짝, 한 발짝 튀어나온 벽돌을 조심스럽게 밟았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내가 밟았던 벽돌을 손으로 붙잡았다. 그걸 번갈아 하기만 됐다.

한평생 제대로 된 운동도 하지 않은 이 몸뚱어리가 이 정도로 벽을 타다니. 어딘가 이상했다.

그런 의구심을 품었을 때였다.

오른쪽 발을 디딘 순간, 아래로 주욱― 미끄러졌다.

“흡!”

그 탓에 몸이 중심을 잃고 성벽과 부딪혔다.

겨우 비명을 삼켰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몸의 온도가 내려갔다.

진정하자.

슬쩍 내려다보니 바닥까진 2미터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뛸까? 생각하자마자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팟― 성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자마자 몸이 붕 떴고, 이상하리만치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후우…….”

재빨리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사람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커다란 담을 넘어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그랬다.

정문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을 테고, 또 단단히 잠겨 있을 테니 담을 넘고 강을 헤엄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난 당당하게 정문으로 향했다.

이대로라면 정문을 여는 것 역시 수월하리라.

정문은 두 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고개를 갸웃거리다 눈을 번쩍 감았다 떴다.

펑―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저쪽에서 난 것 같은데…….”

정 반대쪽에 있는 정원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났고, 병사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내가 한 짓인가? 분명 그러려고 하긴 했는데…….

아래를 내려 보고 주먹 쥐었다.

아무래도 이상했지만 지금은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 정문으로 갔다. 잠긴 문을 여는 것은 간단했다.

그러곤 그대로 문을 나서려고 했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결계?”

손끝을 가져다 대자 파지직― 듣기 싫은 소음이 났다.

꽤나 상급 결계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쩐지. 이 큰 성을 고작 몇 명의 병사로 지키고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 결계조차 나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렵다기보단 쉽게 뚫을 수 있다는 직감이 앞섰으니까.

천천히 결계 속으로 나아갔다.

파직― 파지직― 베일 듯 날카로운 결계의 파열음이 들려왔지만, 내 몸엔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그대로 문을 나서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어두컴컴한 성의 동쪽 탑 중 한 곳에만 옅은 불이 밝혀져 있었다.

데반이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깨어난 걸까? 아니면 집사가 곁을 지키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원래대로 코델리아가 당신을 만났다면 저주를 금세 풀고 그녀와 순탄히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해요.”

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목덜미가 허전해 더듬자, 항상 차고 있던 노란색 펜던트가 사라져 있었다.

“펜던트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언제 잃어버린 거지? 벽을 타고 내려올 때였나. 미끄러진 탓에 벽에 몸을 박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쩌지? 다시 찾으러 가야…….

순간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시선을 떨궜다.

펜던트 따위 이제 필요 없었다.

더 이상 데반을 만날 일도, 그의 앞에서 데이지 꽃향기를 풍겨야 할 일도 없었으니까.

“어쩌면 잘된 일인가.”

이걸로 이곳과는 영원히 안녕이었다.

천천히 몸을 돌렸을 때였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홱,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먼 언덕 너머에서 새빨간 불빛이 보였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것도 꽤 많은 수였다.

누군가…… 오고 있다!

서둘러 다리를 건넜다.

이 다리만 건너면 숲이었다. 오늘은 달마저 구름에 가려진 날이었다.

난 불빛 하나 가지고 있지 않으니, 이 어둠 속에서 날 알아볼 리는 없을 것이다.

섬칫― 돌연 몸이 경직됐다.

빳빳한 목을 겨우 돌려, 말발굽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불빛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느껴졌다.

그 끈덕진 시선. 갈구하는 황금빛 눈동자가.

내일이라고 했는데, 어째서?

킬리언이다. 그가 온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겨우 끌고 다리 끝으로 내달렸다.

지금 걸리면 끝장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거의 구르듯이 뛰어서, 숲으로 들어갔다.

키가 큰 나무들이 날 짓누르듯 내려 봤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쉬지 않고 내달렸다.

날카로운 나뭇가지들이 뺨을 스치며 상처를 내고, 거친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래도 멈출 순 없었다. 마지막 기회마저 놓칠 순 없었으므로.

*

“에블린 아가씨가 사라졌습니다.”

데반은 방금 제가 들은 이야기가 도통 이해되질 않았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지 1년, 거기에 에블린은 사라졌다?

“사라졌다니? 도대체 언제?”

“전하께서, 그러니까 두 분께서 쓰러지신 그날 밤입니다. 한마디도 남기시지 않고 그대로 사라지셨습니다.”

노집사가 대답했다.

“흐음……. 어째서?”

“예?”

“내 저주는 모두 풀었다고 하지 않았나?”

데반의 시선이 의사를 향하자, 그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예. 맞습니다. 분명 저주는 풀렸습니다.”

“……그렇다면 당당히 보수를 받고 떠났으면 될 것을. 왜 굳이?”

방 안에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쓰러져 놓고 그토록 급하게 떠났어야 할 이유가 뭘까. 그렇게나 돈에 집착했으면서.

데반은 마음이 언짢았다. 카렌이 끼어들었다.

“사실 정확히는…… 도망쳤다고 하는 게 맞습니다.”

“도망?”

데반의 머릿속에 에블린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이 제국에서 도망치려면 어떤 게 좋을까요. 돈으로 받는 것과 보석으로 받는 것 중에.’

‘도망친다라. 누구한테서?’

‘네?’

‘떠나고 싶은 게 제국이 맞나?’

“떠나고 싶은 게…….”

떠나고 싶은 게, 나였나.

데반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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