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카렌은 품 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1년 전 일을, 언제든 보고할 수 있도록 간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레이디 에블린은 일단 주방에 침입해서 벽을 타신 걸로 보입니다.”
“벽을 타?”
“예, 주방 창문이 열려 있었고, 바닥에 흔적이 가득했습니다. 그 후엔 성문으로 통과하신 것 같습니다.”
데반은 겨우 실소를 참았다.
“넌 무얼 했지? 감시하라 명하지 않았나?”
“……전하의 곁을 지키느라…….”
카렌이 고개를 툭 떨궜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결계도 쳐져 있지 않나.”
“그게…… 영문을 모르겠지만 병사들은 때마침 정원 한쪽에서 일어난 사고에 자리를 비웠다고 하고, 결계는 부서진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하.”
이번에 그는 실소를 참지 못했다.
결계를 부쉈다?
제가 알기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오로지 신력뿐이었다.
그런데 강력한 상급 마법으로 만든 결계를 깼다? 말이 되질 않았다.
카렌이 슬쩍 눈치를 보곤 말을 이었다.
“저희도 여러 방면으로 조사해 봤지만, 아무래도 뭔가 우연이 겹쳤다고밖에는…….”
“우연히 주방 문이 열려 있었고, 우연히 병사들은 자리를 비웠고, 우연히 결계가 부서졌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서늘한 그의 말에 카렌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대공 전하.”
데반은 이내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병상을 털고 일어나면 가장 먼저 경비 체제를 바꿔야겠군.”
스스로의 운명을 깨달은 카렌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대공 전하, 그리고 이걸…….”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노집사가 데반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줬다.
“이게 뭐지?”
“아가씨가 사라지신 날 정원을 수색하다가 발견했습니다.”
“목걸이?”
데반은 찬찬히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꼭 동전처럼 생긴 노란 펜던트였다.
“안의 내용은 조사해 봤나?”
“마도구의 일종으로 보이는데, 위험한 건 아니라고 합니다. 더 자세한 조사를 위해선 펜던트를 부숴야 하는데, 전하의 허락을 받지 못해…….”
마도구?
데반은 꼭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펜던트를 꽉 쥐었다.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펜던트는 별다를 게 없었다. 번화가만 나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흥미를 잃은 듯 목걸이를 협탁 위에 올려 뒀다.
“뭐, 상관없겠지.”
카렌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두실 겁니까?”
“저주도 풀었고, 약속은 다 지켰는데 그냥 두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나. 무엇보다 1년 전 일이고. 소식이 있으려면 이미 있었겠지. 그보다.”
데반의 시선이 다시 의사를 향했다. 그가 제 안대 부근을 만졌다.
“눈은 언제 보이는 거지?”
“서, 서둘러 훈련한다면 며칠 만에도 가능할 겁니다. 다만 1년간 정신을 잃고 계셔서 충분한 영양분 섭취가 필요할 겁니다. 그동안은 마법사들을 불러 겨우 몸을 유지한 터라…….”
“알았다. 오늘부터 몸을 회복하는 걸 가장 최우선으로 하지.”
*
데반 란티모스는 며칠간 쉬지 않고 훈련했다.
원래부터 모든 일에 빠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인생 최대의 의욕을 품고 달려든 일이니, 훈련은 의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빠른 진척을 보였다.
그는 거금을 들여 마법사를 두 명 더 고용했다.
그들은 매일 데반의 몸에 치유 마법을 쏟아부었다.
실력 있는 주방장은 모든 영양소가 완벽한 식사를 매 끼니마다 내왔다.
그러다 보니 고작 일주일 만에, 그는 오히려 1년 전보다도 더 건강한 모습을 자랑했다.
빛에 적응하는 훈련 역시 끝마쳤음이 당연했다.
마침내 오늘이 그 지긋지긋한 검은 안대를 푸는 날이었다.
노집사와 의사, 고용된 마법사까지 데반의 방에 모여 숨을 죽였다.
그는 모두의 도움을 거절한 채, 제 손으로 안대를 풀기로 했다.
긴장될 것이 분명한데도 그의 표정에선 별다른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데반이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눈가에서부터 귓바퀴, 그리고 매듭이 지어진 뒤통수로.
스르륵― 마침내 그가 매듭을 풀었다.
검은 안대가 내려가는 모습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노집사는 특히나 떨리는 모습으로, 연신 땀이 배어난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질러댔다.
데반은 안대를 툭―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깜빡, 깜빡.
훈련에 적응된 눈은 방 안에 들어오는 적당히 밝은 햇살을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데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천천히 방에 자리한 커다란 창문으로 걸어갔다.
바깥 풍경이 보였다. 정말로 바깥, 풍경이었다.
방 안의 모두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저 데반을 바라봤다.
햇살에 비치는 그의 짙은 검은색 머리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안대가 사라지자, 높은 콧대가 더욱 돋보였다.
눈썹은 결 하나하나가 단정했고, 높은 콧대 덕에 눈가에 깊은 그림자가 졌다. 길고 곧은 속눈썹은 만들어 낸 듯 일정한 간격으로 그 존재감을 뽐냈다.
오랜 시간 그를 주인으로 모셨던 노집사뿐 아니라, 고작 며칠간 지켜본 의사와 마법사들까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멈칫―
창가로 천천히 손을 뻗던 데반이,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제 손을 눈앞에 가져다 댔다.
“……이봐.”
방 안의 모두가 순간 빳빳하게 굳었다.
데반의 목소리에 희망이나 기쁨, 행복 따위가 아닌 명백한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는 벌이라도 서는 것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자들을 바라봤다. 너무나 아름답고, 또 냉랭한 표정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그 서늘한 시선에 방 안의 공기가 더욱 경직됐다.
“무,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겨우 용기를 낸 건 의사였다.
그가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왔다.
데반은 다시 한번 제 손을 눈앞에 가져다 댔다가, 꾹 주먹 쥐었다.
“왜, 오른쪽은 희미하게 보이는 거지?”
“네?”
의사가 멍청한 소리를 냈다.
노집사가 서둘러 데반의 곁으로 다가왔다.
“전하. 오른쪽 눈만 희미하게 보이신단 말씀입니까?”
“그래.”
데반은 스스로 왼쪽 눈을 가렸다.
고개를 조아리고 선 노집사가 흐릿하게 흔들렸다.
물론 저주로 눈이 멀었을 때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대로 보인다고 하기도 힘들었다.
의사가 서둘러 수습했다.
“오, 오랜 시간 동안 앞을 보지 못하셔서, 시력이 떨어진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회복될 겁니다.”
“시력이 떨어졌다라.”
데반이 팔짱을 끼더니 낮게 한숨 쉬었다.
“어이, 마법사들.”
갑작스럽게 불린 마법사 무리가 흠칫 몸을 떨더니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난 신체적으로 눈이 먼 게 아니야. 저주 때문이었지. 그 저주가 풀렸는데 시력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나?”
그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의사는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선 한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마법사이고, 저주는 신의 영역입니다. 때문에 그 물음에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자는 신관일 것입니다. 다만―”
짜증스럽게 구겨지던 데반의 표정이 뒤에 붙은 사족으로 살짝 풀어졌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그 사이에 물리적으로 어떤 상해를 입으신 게 아니라면, 시력이 떨어지는 일은 불가능하실 거라 판단됩니다.”
말을 마친 마법사는 깊게 고개를 숙이곤 다시 제 무리로 돌아갔다.
데반은 의사를 서늘하게 내려 봤다. 의사는 이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전하!”
돌연, 집사가 큰 소리를 냈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데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하, 눈이…… 오른쪽 눈이!”
노집사는 본분을 잊은 것처럼 무엄하게, 제 주인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그는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 있었다.
“눈이 어쨌다는 거지?”
데반은 성큼성큼 방 안에 걸려 있는 거울로 향했다.
이건…….
그가 거울 속에서 마주한 것은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였다.
왼쪽은 저주에 걸리기 전과 마찬가지로 익숙한 붉은 색이었지만, 오른쪽은 달랐다.
시커먼 형체가 그의 동공 위에서 불안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루비처럼 반짝거리는 붉은 눈동자를 금방이라도 뒤덮을 듯이.
저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
그의 오른쪽 눈이 예전과는 달리 검은빛을 띤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대공 저 안에 퍼졌다.
마법사와 의사들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들은 그 원인과 해결법을 찾으려고 했지만, 당연하게도 찾을 수 없었다.
데반은 무엇보다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점에 분노했다.
차라리 저주는 완벽한 해결책이라도 있었다.
그게 거의 불가능한 해결책이라고 해도, 예언의 주인공을 찾기만 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이건 원인을 모르니 해결책 역시 막막하기만 했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제가 이 불편함에 점점 적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느새 그는 강도 높은 검술 훈련을 시작했고, 제대로 된 성과를 내고 있었다.
물론 눈이 보이지 않을 때조차 웬만한 기사 이상의 검술을 다룰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내심 기뻤다.
이젠 그 갑갑한 검은 안대를 할 필요도 없었고, 조금이라도 보겠다고 정신을 집중할 필요도 없었다.
사용인들의 발걸음 소리를 외운 채, 한껏 예민하게 온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종종 들리던 그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그게 꼭 제가 정상이 됐다는 증거같이 느껴졌다.
그러니 데반은 어쨌든 저주가 풀리기 전보단 지금이 훨씬 편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한편 그 사실은 그가 평생 이렇게 살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희미한 오른쪽 눈에 적응해 가고 있었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와중에, 데반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제도까지 퍼졌다.
저주가 풀렸다는 소식도 함께였다.
그러자마자였다. 킬리언 디에고로부터 다시 알현 신청이 날아온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