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전, 전하…….”
기사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우리 마차를 앞뒤로 호위하며 함께 오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각자 어깨나 팔 따위를 부여잡고 있었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이도 있었다.
“유니스!”
난 그들 사이에 안절부절못한 채 껴 있는 유니스를 불렀다.
그녀는 나에게 곧바로 뛰어 와선 내 팔을 붙잡고 울먹였다.
“마님!”
그나마 그녀는 눈에 보이는 상처가 있진 않았다.
“이상하군.”
데반이 중얼거렸다.
“마물 여덟에게 둘러싸인 상황이, 제가 봐도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그것도 그렇지만, 이 마물들 왜 우릴 공격하지 않지?”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했다.
그들은 마차를 부수기만 했을 뿐, 그 후로는 우릴 포위한 채 그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들의 부상 역시 마차의 파편으로 인해 생긴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들은 우릴 공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것들은 그다지 똑똑한 족속들이 아닌데.”
“마물에 대해 잘 아세요?”
“모르진 않지. 존재하는 모든 걸 본다고 알려져 있는 마물이다.”
눈이 다섯 개나 달려 있는 꼴을 보니, 듣지 않아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잘 때도 항상 눈 하나는 감지 않는다는 점에서, 존재하는 모든 걸 본다는 둥 과장된 수식이 붙어 있을 뿐이지. 사실은 멍청한 족속들이다. 별생각 없이 때려 부수기로 유명한데…….”
“근데 왜 이러고 있는 거죠?”
데반은 말없이 그들을 관찰했다.
기사들은 어느새 슬금슬금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형세가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 확실한데도 마물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정말로 이상했다.
마차를 부숴서 병력을 흩트려 놓았으면 곧바로 공격하는 게 당연한데, 그들은 꼭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기다린다고?”
“뭐?”
내 중얼거림에 데반이 뒤를 돌아봤다.
퍼뜩 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우릴 감시하고 있는 거예요. 기다리고 있는 거라구요.”
“기다리다니, 무엇을?”
“뭔지는 몰라도…….”
그렇다면 마차는 뭐 하러 부순 걸까. 안에 넣어 놓고 감시해도 충분할 텐데.
우리를 밖으로 꺼내기 위해서? 어째서?
순간 오싹한 한기가 들었다. 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데반의 팔뚝을 붙잡았다.
“에블린?”
“……하얀, 마석.”
그들의 가장 아래쪽 눈에, 정확히는 새하얀 동공에 마석이 꽂혀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마석이.
데반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완전히 억지군.”
본래 마석이란, 저런 식으로 꽂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물의 근원이었으니 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니 사체를 해체하지 않고는 마석을 채취할 수 없는 게 맞았고.
하지만 저건 억지로 박아 넣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모양새였다.
“이럴 때가 아니에요. ……도망쳐야 해요.”
“네 말대로 무언가를 기다리며 우릴 감시하고 있다면, 순순히 보내 줄 리 없지.”
데반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그는 검을 고쳐 쥐곤 중얼거렸다.
“저 마석만 노린다면…….”
“잠깐만요. 싸울 생각이에요?”
한눈에 보기에도 형세는 좋지 않았다.
사지가 멀쩡한 기사가 한 명도 없었다.
마법이 걸리지 않은 보통의 마차를 타거나, 말을 타고 쫓아온 탓이었다.
역시 우리가 타고 온 마차에 걸려 있던 마법은 단순히 진동을 상쇄하는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일단 내가 기사들을 치료할게요. 어차피 지금 당장 이들이 공격할 것 같진 않―”
“그럴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데반이 돌연 날 홱, 어깨 위로 둘러멨다.
갑자기 뒤바뀐 시야에 난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는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무슨 짓이냐고 소리칠 수도 없었다.
쿠궁― 방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땅이 커다란 굉음을 내며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무슨―”
“저들이 눈치챈 것 같군.”
나를 다시 땅에 내려놓은 데반이 검을 들곤 전투태세를 취했다.
“눈치채다니, 뭘요?”
데반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어딘가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너를.”
그리고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데반의 검이 향한 건 내 뒤에 있는 거인의 오른 다리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등 위로 뜨끈한 피가 쏟아졌다.
“날 눈치채다니, 그게 무슨.”
“뭐겠어.”
데반이 날 거칠게 잡아당겼다.
한 손으로 날 감싸 안고, 그는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거인들은 하나같이 나만 노리고 달려들었다.
날 눈치챘다는 데반의 말이 실감 났다. 다리에 박힌 하얀 마석도.
왜 진작 대비하지 못했지?
신전이다. 신전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나를 데려오라고, 혹은 죽이라고.
그들은 점점 과격해지고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그건, 그들이 꽤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부상을 입은 기사들이 데반을 돕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거인에게 달려들었지만, 거인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거인은 꼭 날벌레라도 쫓아내는 것처럼 다리에 붙은 기사들을 가볍게 걷어찼다.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도 마석의 영향일까.
“이봐. 방해되니까 다들 비켜.”
데반의 명령에 기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 후로는 파란이었다.
데반은 혼자서 여덟 마리의 거인을 상대했다.
정확히는 거인들이 그를 상대한다고 하는 게 맞았다.
그는 내 허리를 놓더니, 주위를 돌며 검을 휘둘렀다. 난 그저 초조하게 몸을 움츠리고 있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그는 검과 한 몸이 된 것처럼 싸웠다.
얼마 전까지 눈이 안 보였던 사람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데반은 나에게 말한 대로 마석이 박혀 있는 다리만을 노리고 있었고, 그런 면에선 몸집이 작은 편이 유리했다.
거인들은 그 커다란 몸집과는 다르게 굉장히 민첩했지만, 데반에게 비할 바는 못 됐다.
데반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단 몇 번의 칼부림으로 마석은 튕겨 나왔다.
마석이 제거된 거인들은 이리저리 허우적거렸다. 꼭 최면이라도 걸렸다 풀려 난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거인들 중 세 마리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고,
두 마리는 어딘가로 달려갔으며,
한 마리는 광분해 마구잡이로 주위를 부수다가 데반에게 목이 찔려 죽었다.
남은 건 단 두 마리였다.
그 일련의 과정에도 데반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났을 뿐이었다.
“후…….”
데반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나도, 기사들도 그를 멍하니 지켜봤다.
도와야 한다거나 위험하다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럴 정도로 압도적인 힘이었다.
데반은 새빨간 피가 묻은 얼굴을 손으로 아무렇게나 닦아 냈다.
그 탓에 이리저리 번진 선혈 사이로 그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는 약간 지친 것 같기도 했다.
혼자서 그 많은 수를 상대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남은 두 마리 중 하나가 다시 나를 목표로 하고 달려들었다.
난 움찔 몸을 떨었고, 데반은 거인의 다리를 노리며 검을 고쳐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돌연, 마물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것도 두 마리 모두, 꼭 정지 버튼이 눌린 것처럼.
뭐지?
난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어딘가 섬뜩했고, 오한이 들었다.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거인들이 기다리고 있던 무언가가 온 것이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우리에게 좋은 건 아닐 거라는 직감도.
데반은 인상을 찌푸렸다가 어쨌든 해치워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건지 다시 마물을 향해 도약했다.
“잠깐―”
그를 막으려고 막 손을 뻗었을 때였다.
쿠웅―
낮은 진동이 대지를 울렸다.
해가 사라진 것처럼 순식간에 주위가 어두워졌다.
……해가 사라졌다고?
퍼뜩 고개를 들자, 넓은 대지를 다 메울 정도로 커다란 날개를 가진 무언가가 하늘에 떠 있었다.
꼭 거대한 매 같기도 했고, 꼭…… 드래곤 같기도 했다.
드래곤이라니, 드래곤!
신전이 드래곤마저 조종할 수 있다고?
그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마물을 조종할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드래곤은 나를 주시하듯 상공을 맴돌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거인들이 마차를 공격한 이유. 우리를 마차에서 쫓아낸 이유.
나를 알아보기 위해서, 내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잡히면 죽는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젠장.”
낮은 욕지거리가 들리더니, 시야가 거칠게 흔들렸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이지. 눈을 깜빡거렸다.
눈앞에 보이는 건 새까만 것뿐이었다.
데반의 가슴팍이었다.
“크윽.”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렸다.
그가 날 껴안고 있었다. 갈비뼈가 부서질 것처럼 강하게.
“……데반?”
몸이 잘게 떨렸다. 심상치 않았다.
뜨끈한 피가 그의 등에서 내게로 쏟아졌다.
마물의 것이 아닌, 그의 피가.
“……데반!”
“……조용히, 하지.”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와 달리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점점 상황 파악이 됐다.
순식간에, 미처 내가 인식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드래곤이 하강한 것이었다.
날 낚아채 가기 위해.
그러나 드래곤은 실패했다.
사람 크기만 한 날카로운 발톱이 나 대신 데반의 등에 박혀 있었으니까.
몸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떨리는 손을 들었다, 놨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전하!”
“마님!”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렸다.
기사들과 유니스가 어떻게든 우리 쪽으로 오려고 노력했지만, 드래곤의 날갯짓 한 번에 모두 나가떨어졌다.
우리는 고립된 채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에 있었다. 우릴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데반을 구해야만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구해야 한다. 알고 있었다.
살려야 한다. 하지만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 믿었던 데반이 피를 철철 흘리며 나에게 기대고 있다는 사실,
거기에 이 모든 일이 다 나 때문이라는 사실.
그 두 가지 사실이 내 몸을 족쇄처럼 얽매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데반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내가, 움직여야…….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