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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42화 (42/123)

42화

결혼식을 치르기 전, 데뷔탕트를 먼저 해야 한다는 데반의 의견이 꽤나 강하게 들어간 모양이었다.

황태녀는 곧바로 올해의 데뷔탕트를 몇 달 앞당겼다.

앞당겨도 너무 앞당겨서, 그게 당장 2주 후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눈에 보이는 걸 중시하는 디에고 백작이 나에게 귀족으로서의 예의범절 하나는 잘 가르쳤다는 점이었다.

데뷔탕트를 위한 춤도, 사교계에서의 교양도 따로 배울 필요가 없었다.

“아가씨, 방으로 가시나요?”

“그래.”

황궁에서 붙여 준 전담 시녀가 조용히 내 뒤를 쫓아왔다.

드레스 가봉을 겨우 마친 후였다.

지긋지긋한 데뷔탕트 준비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레이디 에블린!”

그 순간 들리는 반가운 목소리에 홱,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에서 갑옷을 차려입은 카렌이 장난스럽게 경례했다.

그는 노집사가 마님이라 부르라고 몇 번이나 언질을 줬음에도 아직까지 날 레이디라 부르는 걸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실은 나도 그편이 편했고.

“카렌 경.”

카렌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황궁에 도착한 지 벌써 며칠이 됐지만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어쩐지 오랜만인 것 같네요.”

“레이디께서 바쁘신 탓이 아닙니까.”

능청스러운 말투에 난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제도로 돌아온 게 내 덕이라는 걸 눈치챈 후로 태도가 돌변했다.

그렇다고 날 깍듯하게 존중해 준다기보단 친근하게 대하는 쪽이었지만.

난 슬쩍 시녀 쪽을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자리를 피해 줄래?”

시녀가 입술을 달싹이며 곤란한 눈빛을 했다.

“어서.”

난 짐짓 냉정한 투로 말했다.

그녀는 아스트릴라가 붙여 준 시녀였다.

아직 황태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시녀들에게 붙잡혀서 고생했던 전적이 있던 터라 여러모로 불편했다.

날 보필한다기보단 감시하는 것에 가까운 눈빛이기도 했다.

아마 지금 카렌과의 이야기도 황태녀에게 빠짐없이 전하리라.

카렌이 스윽―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야를 차단하며 내 옆에 와 섰다.

빠르게 걸으며 거리를 벌리자, 그녀도 더는 쫓아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인 걸 확인하고서야 내가 입을 열었다.

“엘리운에서 별걸 못 알아 오셨다면서요?”

그를 밉지 않게 흘겨봤다.

“애초에 뭐가 있을 거라고 크게 기대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레이디께서도, 대공 전하께서도요.”

그건 그랬다.

이미 하얀 마석도 채취하고 증거까지 인멸했는데, 신전이 다시 엘리운에서 흔적을 남겼을 리는 만무했다.

내가 기대했던 건 그 목격자에게서 더 많은 증언을 얻는 것이었는데, 아마 수확이 없는 듯했다.

카렌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나저나 대체 마물의 사체를 왜 쫓는 건지, 그 하얀 마석이 뭔지 안 알려 주실 겁니까? 이번에는 또 제도 주위에 쓰러진 드래곤을 찾고 계시다면서요?”

“저보단 데반에게 물어보시는 편이 빠를걸요. 그래서 그 드래곤은 찾았어요?”

“저야 이제 합류했으니……. 저보단 근위대에게 묻는 편이 빠를걸요.”

그가 내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근위대…….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근위대장인 킬리언이 떠오른 탓이었다.

황궁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킬리언에 관련된 소식은 아무것도 없었다.

직접 물은 건 아니었지만 황태녀조차 그의 소식을 모르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불안해져만 갔다.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서.

“펠로스 녀석을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카렌이 대수롭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아, 친구라고 하셨죠. 네, 음……. 좋으신 분이더라고요.”

“괴짜라고 하셔도 됩니다.”

“좀 특이하기도 하고요.”

“그 녀석 신전에 있습니까?”

“아마 그럴걸요? 아마…….”

며칠 전 갑옷을 입고 황궁에 숨어들었던 펠로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닐 수도 있고요.”

“뭐 알고 계십니까? 아무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니까요.”

그는 혼자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더니 장난기 있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보다 레이디, 데뷔탕트를 치르신다면서요?”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다 아는 수가 있지요. 그래서, 데뷔탕트 파트너는 정하셨습니까?”

카렌이 장난스럽게 물으며 검지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은 무슨 의미죠?”

“정 파트너가 없다면 제가 되어드릴 수도 있다는, 뭐랄까. 저의 넓은 아량과 관대함 같은 걸 표현하는 손짓이죠.”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당신 바보죠?”

“예?”

검지를 내리고, 카렌이 얼굴을 구겼다.

“계속 레이디라고 불러서 까먹은 모양인데 전 대공비거든요.”

“……그래서요?”

“당연히 파트너도 데반이겠죠.”

“아아……. 그런가요?”

그가 입술을 약간 내밀었다.

파트너 자리에 아쉬움이 남았다기보다는 아무래도 데뷔탕트에 가는 걸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 레이디께서 제가 황궁에 오길 그토록 간곡히, 간절하게 바라셨다고 해서 혹시나 했죠.”

“설령 데반이 아니더라도 카렌 경과 함께 입장할 일은 없을 것 같네요.”

“네? 왜요?”

억울한 표정의 카렌에게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제 취향은 카렌 경보단 펠로스 쪽이거든요.”

그 순간 뒤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참 의외군.”

홱, 고개를 돌렸다. 데반이었다.

제도에 와서 처리할 서류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며, 며칠째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터였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카렌과 내 사이를 가로막았다.

“의외라니 뭐가요?”

“펠로스같이 화려한 쪽은 싫어하는 줄 알았거든.”

“잘생겼잖아요. 입만 안 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카렌을 남겨 둔 채 걸음을 옮겼다.

“잠깐, 대공 전하, 레이디!”

“새로운 소식은 없나요?”

다급한 외침을 무시하고 데반에게 물었다.

카렌이 서둘러 데반의 옆에 바짝 붙었고, 그는 약간 인상을 구겼다.

“새로운 소식이라면?”

“드래곤이나, 유니스나, 하얀 마석이나 그것도 아니면…….”

“코델리아?”

우리의 이야기를 카렌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데반이 복도 끝을 턱짓했다.

“카렌 위보우. 오늘 안에 별궁 근위대 편성을 다시 마치라고 했을 텐데 이럴 시간이 있나?”

“예? 전하께서 분명 며칠간의 말미를 주겠다고―”

“그 말미의 끝이 오늘이지.”

카렌이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데반이 쐐기를 박았다.

“알았으면 꺼져.”

카렌은 약간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눈썹을 축 늘어트린 모습이 깊이 상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그가 사라지자, 데반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앞장섰다.

“별궁에도 따로 근위대가 있나요? 황태녀 전하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요?”

“본래 정확하게 나누진 않지만, 나누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왜요? 전하를 믿지 못하세요? 아니면 그건가? 전에 말했던 피바람?”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리자, 그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정말 전하와 단둘이 무슨 얘길 했는지 안 알려 주실 거예요?”

“기밀이다.”

데반은 복잡한 표정을 했다.

아마 지난 며칠간 그가 유난히 바빠 보였던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피바람이라.

꼭 역모라도 일어날 거라는 소리로 들렸다.

설마 하니 데반이 그녀를 몰아내고 황태자의 자리에 앉으려는 걸까?

그럴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고, 지금도 역시 그러고 싶은 사람 같진 않았다.

그럼 도대체 무슨 피바람?

“그보다 네가 그토록 원하던 새로운 소식에 대해 할 말이 있는데.”

난 눈을 크게 떴다. 드디어 뭔가를 알아낸 게 틀림없었다.

“뭐죠? 드래곤인가요? 유니스? 하얀 마석? 그것도 아니면…….”

기대에 찬 내 눈빛을 보고 그가 픽, 웃음 지었다.

“그래, 코델리아. 그 아이야.”

*

대공 저에서 먹었던 것보다도 싱싱하고 화려해 보이는 음식이 식탁 한가득 차려졌다.

아무래도 주방장이 황궁에까지 자신을 데려온 데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힘을 쓴 것 같았다.

그것도 아니면 제도의 식재료가 훨씬 풍부해서일 수도 있었고.

하지만 내 신경은 음식보단 다른 쪽에 가 있었다.

“얼른 자세히 이야기해 줘요. 코델리아가 왜요? 그 애를 만날 수 있나요? 아니면 새로운 소식이 있는 건가요? 안 좋은 쪽은 아니죠?”

불안감이 엄습했다.

신전은 나를 납치하기 위해 드래곤까지 보냈다. 그건 그들이 그만큼 급박하단 소리였다.

즉, 코델리아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소리이기도 했고.

설마…… 죽은 걸까?

“안 좋은 쪽은 아니고, 그다지 새로운 소식도 아니고. 단지 그 애를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말요?”

눈을 크게 뜨고, 비명처럼 물었다.

그 괴성에 데반이 한쪽 눈을 구겼다.

“어떻게요? 어떻게 만날 수 있는데요? 신전에서 허락했어요?”

“설마. 정확히는…… 볼 수도 있다는 소리다.”

“제대로 설명해 봐요.”

데반이 제 앞에 놓인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우아하게 썰어 입에 넣었다.

덕분에 애가 타는 건 내 쪽이었다.

“믿을 수 있는 정보원으로부터 그녀가 아직 신전에 있다는 사실을 얻었거든. 죽지도 않은 것 같고. 뭐, 그다지 건강한 것 같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신관들이 신력을 모아 그녀를 잠시 멈춰 둔 모양이야.”

“멈춰 뒀다는 건…….”

“체내의 모든 기능을 정지시켰다는 말이지.”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듣기만 해도 코델리아의 상태가 꽤나 위험해 보였다.

“그래서요? 어떻게 볼 수 있죠?”

“대충 어디에 있는지는 알았으니…….”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몰래 보겠다고요?”

“그래.”

데반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결혼식 날 만큼은 신전 대부분의 공간이 개방되거든. 결혼식의 주인공인 우리 둘에게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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