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결혼식 날만큼은 신전 대부분의 공간이 개방되거든. 결혼식의 주인공인 우리 둘에게만은.”
난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식을 치르기 위해선 꽤 많은 공간이 필요했다.
나와 그의 치장을 위한 사용인만 해도 한가득이었고, 하객이 쉴 곳도 있어야 했으니까.
“그럼 결혼식 날…….”
“그다지 긴 시간이 허락되진 않겠지. 그리고 그 애가 있는 곳은 그럼에도 개방되지 않은 곳일 거다.”
그가 딸랑― 테이블 위의 종을 울렸다.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노집사가 들어왔다.
그는 미리 준비한 듯, 돌돌 말린 종이 뭉치를 건넸다. 그러곤 데반의 옆에 발을 모으고 섰다.
데반은 그 종이를 내게 건넸다.
그걸 받아 들면서 난 슬쩍 곁눈질했다.
“집사님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 너와 나, 집사까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함께했던 사람이니 그럴 만도 했다.
데반이 그를 왜 데리고 왔는지 새삼 이해됐다.
믿을 만한 보좌관이 필요했던 거겠지.
“그래서 이건요?”
“펴 봐.”
돌돌 말린 종이를 펼치자, 그 안에는 웬 도면이 그려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킬리언이 그렸던 대공 저가 떠올랐지만, 그보다 훨씬 전문적으로 보였다.
“어디의 도면이죠?”
황궁? 별궁? 눈에 익은 곳이 없었다.
“신전이다.”
번뜩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봤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기를 우물거리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놀랄 것 없어. 이 정도는 조금만 돈을 찔러 넣으면 쉽게 얻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그다음이지.”
다음 장을 펼쳤다.
그곳엔 또 다른 도면이 있었다.
구역 하나하나가 나눠진 세세한 첫 번째 것과 달리 대충 뭉뚱그려진 도면이었다.
“두 개를 대조해 봐.”
데반의 말에 나는 위아래로 종이를 놓고 비교했다.
두 개의 도면에 그려진 건물 모두 가로로 길고, 중앙에 세로로 복도가 튀어나와 있는 모양새였다.
“이건 설마…….”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둘째 장의 복도가 첫 번째보다 눈에 띄게 깊었다.
“숨어 있는 공간인가요?”
“그래. 첫 번째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신전 내부의 도면, 두 번째는 외부에서 길이를 측정해 비율을 맞춘 거지. 즉, 신전 안에는 알 수 없는 비밀의 공간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곳에…….”
“그 아이가 있겠지. 아마, 거의 확실할 거야.”
이 안에, 코델리아가 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드디어 그 아이를 만날 수 있다.
상기된 얼굴로 데반을 바라봤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어차피 만나는 건 결혼식 날일 테니.”
“아, 결혼식 날짜는 잡힌 건가요?”
“그래. 네 데뷔탕트가 2주 후인 건 알고 있겠지? 그로부터 일주일 뒤다.”
약간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었지만 굳이 늦출 이유도 없었다. 명목뿐인 결혼식이었으니까.
조심스럽게 종이를 다시 둘둘 말아 집사에게 건넸다.
“식순은 어떻게 되죠? 그사이에 짬을 내서 코델리아를 만날 시간이 있을까요?”
“모르는 건가?”
데반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우리 둘은 결혼식 전날 신전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해.”
“……네?”
“그게 관례다. 결혼하기 전 몸과 마음을 정화한다는 의미지.”
도대체 신전은 하룻밤을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
황위를 계승할 자를 뽑는 자격 시험 때도 그러더니, 신전에서 고작 하룻밤을 잔다고 뭔가가 크게 변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황당한 내 표정에 데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닐 텐데.”
“나쁜 일이 아니라니요? 우리가 같이 하룻밤을 보내는 게요?”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봤다.
“……새벽엔 경비가 허술할 테니 방을 빠져나와 그 아이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하는 거다.”
“아…….”
난 괜히 드레스 자락을 몇 번 털곤, 헛기침을 했다.
“……새벽에 경비가 허술하다고 어떻게 보증하죠?”
“난 한 번 그곳에서 잔 경험이 있으니까. 자격 시험 때, 나와 아스트릴라는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이상하리만치 맥없이 잠들었거든.”
“신전에서 무슨 수를 썼다는 소리인가요?”
“그래. 그게 뭔지도 대충 알 것 같고.”
“하지만 그때와 지금이 같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때는 자격 시험이었고…… 지금은 결혼식이잖아요.”
“신전에서 식을 치른 귀족 몇을 조사해 보니 모두 같았어. 그 방에 들어가자마자 정신을 잃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수면제 같은 걸 쓴다는 건가.
“그게 뭔지는 몰라도, 신전은 그걸 믿고 방심하고 있다……?”
“신전에서 황궁 근위대를 믿을 리도 없고. 용병을 고용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저들의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는 선일 테니까. 정말로 숨기고 싶은 건 남들에게 맡기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저들끼리 경비를 선다는 걸 텐데 제아무리 훈련한다 해도 신관은 신관. 제압하는 게 어렵진 않겠지.”
데반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전에 그가 마물을 쓰러트렸던 일이 떠올랐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고 꽤나 믿음직했다.
“다만 이번 경우엔…….”
데반이 불현듯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죠?”
그는 조금 복잡한 표정이 됐다.
누가 봐도 말을 돌리는 것처럼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니, 그저 식사가 식겠다고.”
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내 앞의 고기를 천천히 썰었다.
신전에 대해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았지만, 필요하면 언제든 해 주리라는 안일한 생각 때문이었다.
코델리아를 찾았다는 사실, 그리고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있는 믿음만으로도 기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조금 식었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고기가 몇 번 씹지 않아도 절로 넘어갔다.
데반도 말없이 식사를 이어가고, 홀에는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드디어 코델리아를 만날 수 있다. 그런 기쁨에 빠져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침묵을 깨트리며, 데반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데뷔탕트 파트너는 정했나?”
“……네에?”
입 안에 든 고기를 그대로 뱉을 뻔했다. 이미 꿀떡꿀떡 넘어가 뱉을 것도 없었지만.
데뷔탕트 파트너라니?
당연히 데반일 것이라 예상했던 난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꿈뻑꿈뻑 감았다 떴다.
데반은 시선을 내리깐 채 고기를 써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설마하니, 나 혼자 착각한 걸까? 결혼을 했어도 데뷔탕트 파트너는 따로 있는 걸까?
“그게…….”
“아직 정하지 않은 모양이군.”
우물쭈물거리자, 혼자 답을 정한 데반이 다 먹은 접시 위로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손수건으로 입을 톡톡 두드리는 동작이 지나치게 우아했다. 눈치 빠른 집사가 식기를 순식간에 치웠다.
“그……. 데반은……. 당신은 데뷔탕트에 안 가나요?”
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보다시피 요 며칠 정신이 없어서 말이야. 시간이 날지 모르겠군.”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그러니까 정말로?
“……보통, 데뷔탕트 파트너는…….”
“아버지라든가.”
고개를 세게 저었다.
“남자 형제라든가.”
인상을 팍 구겼다.
데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애초에 데뷔탕트의 본질은 약혼자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결혼한 귀족 영애가 데뷔탕트라니,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니 파트너 중에 남편이 있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겠지.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에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내가 멍청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왜 그런 표정을 하지?”
돌연, 오래전 일이 기억났다.
디에고 백작의 저택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사교회를 열었던 때, 많은 영애들과 데뷔탕트에 대해 떠들었던 일이.
그 날, 그 자리의 모두가 킬리언을 파트너로 탐냈다. 그리고 한 영애가 소리쳤었지.
‘저기, 저, 그렇다면 소백작님. 제 데, 데, 데뷔탕트 파트너가 되어 주시겠어요?’
새된 비명과도 같은 말투였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난 그때 그녀가 꽤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모름지기,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가지는 법이었으니까.
“……데반.”
“그래.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그……. 파트너요.”
“파트너가 왜? 따로 마음에 둔 상대가 있는 건가?”
그가 눈을 약간 찡그렸다.
내 생각은 여전했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 법이었다.
함께 데뷔탕트에 가자고, 내 파트너가 돼달라고 하면 됐다.
아무리 전례가 없는 일이라도, 내가 부탁한다면 들어줄 것이다.
별 대단한 말도 아니었다. 그러니 입을 열어야 했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
그게 얼마나 대단한 용기였던가.
난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그 귀족 영애를 떠올렸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킬리언과 데뷔탕트를 치렀을까.
그로부터 얼마 안 가 내가 납치됐으니, 킬리언이 거절했을 수도 있겠다.
혹 제도에서 만나게 되면 사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토록 대단한 용기를 냈는데 내가 다 망쳐 버렸으니. 존경한다고도 해야지.
정원을 걸으며 발로 툭툭 돌멩이를 걷어찼다.
뒤에 따라오던 전담 시녀가 불만스러운 눈빛을 하는 게 느껴졌다.
누가 봐도 대공비는 고사하고 귀족 영애가 보일 몸가짐은 아니었으니.
내가 이토록 불만이 가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결국, 내가 음식을 다 먹고 데반이 차를 다 마시고, 심지어 내 후식을 기다리며 그가 차를 한 잔 더 마셨음에도.
난 말하지 못했다.
그에게 데뷔탕트 파트너가 돼달라는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대체 그게 뭐라고!
팍― 한 번 더 돌멩이를 걷어찼다. 돌멩이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무의식중에 시선으로 좇자, 훈련 중인 근위대병들과 카렌이 보였다.
연무장이었다.
카렌! 난 눈을 번쩍 떴다.
그래, 카렌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그가 나에게 파트너를 제안하지 않았던가.
서둘러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렌 경!”
연무장 입구에서 소리치자 모든 병사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카렌은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병사들에게 대충 손짓하며 뭐라 명하는 모습도 보였는데, 아마도 아까 말한 대로 그가 별궁의 근위대를 통솔하고 있는 것 같았다.
“레이디! 여기까진 무슨 일이십니까? 저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찾아오시면 흉흉한 소문이 날지도 모르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