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50화 (50/123)

50화

나는 오랜만에 어린 시절을 떠올려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사교회에 참석했던 그때를.

억지로 미소 지으며 억지로 장단 맞추고 억지로 대답했다.

다행히 데뷔탕트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걱정했던 황궁 암투 따윈 없었다.

사실은 생각보다 우리를 주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데뷔탕트라는 연회의 주목적이 약혼자 찾기인 만큼, 이미 짝이 있는 우리에겐 큰 관심이 쏠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수군거리는 목소리는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었다.

“대공 전하가 황좌를 노린다는 소문이 정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주가 풀린 시점에 떡하니 제도에 오겠어요? 거기에 데뷔탕트라니. 선전포고나 다름없죠.”

“오자마자 황태녀 전하의 궁에 가서 한바탕했다는 소문도 있던데요.”

“대체 무슨 힘이 있다고요? 뻔뻔하네요.”

“하지만 잘생기긴 했잖아요.”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절대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수다가 끊기고 정적이 흘렀다.

데반을 힐끔거리는 눈길이 많아졌다.

그러다 한 명이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디에고 영애가 결혼식을 하기 위해 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애초에 그것도 이상하죠. 이 년도 넘게 소식이 없던 영애가 갑자기 결혼이라니. 디에고가에서 그녀를 얼마나 찾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뻔뻔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그 집 장남이 근위대장이라고 하던데, 지난 이 년간 실종된 누이를 찾기 위해 난리였대요.”

“그 근위대장도…… 잘생겼었죠.”

“그런데 그분은 어째서 결혼도, 약혼도 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아직 혼자라는 게 정말인가요? 어쩌면 따로 숨겨둔 분이 있을 수도…….”

“그럴 분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요.”

질투에 눈이 먼 한 남자가 괜히 이야기를 돌리기 전까지, 그런 말들은 계속됐다.

결국 우리를 먹잇감으로 시작됐던 대화는 저들의 약혼자 찾기로 종결됐다.

그 덕분에 헛소문을 정정할 타이밍은 놓치고 말았지만,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데반은 황좌에 관심이 없었고, 우리는 얼마 안 가 이혼할 사이였으니까. 나와 데반을 둘러싼 소문도 금세 잠잠해질 것이다.

“이런 곳에 처박혀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소란스러운 연회장과는 동떨어진 테라스에 서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 나에게 데반이 다가왔다.

어린 시절을 제도에서 보냈고, 황족이라는 지위가 있다 보니 연회장에서 나보단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

나와는 관련 없는 ―정확히는 데반과도 큰 관련 없는― 전쟁이나 경제 상황 따위의 화제에서 슬쩍 벗어난 참이었다.

“아무래도 지루해서요.”

“역시 그렇지.”

그가 와인 잔 하나를 내게 건네며 난간에 팔을 기댔다.

연회장의 소음이 멀게 들렸다. 우리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해가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고, 테라스에는 작은 조명만이 켜져 있었다.

은은한 빛에 비치는 그의 옆얼굴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럽게 감탄이 나왔다.

“잘생기셨네요.”

데반이 몸을 완전히 돌려 내 쪽을 바라봤다.

그의 입꼬리가 약간 올라가 있어서, 난 내가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냈다는 걸 눈치챘다.

얼굴이 달아올라 괜히 딴청을 피우듯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눈을 못 마주치는군.”

그가 한 걸음 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상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난 왠지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딱히 그런 것 같지 않은데요. 그저 피곤해서 그래요.”

“이번에도 구두가 불편하다고 할 건가?”

“무슨―”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오늘 아침 마차에 탔을 때 내가 아무렇게나 지껄인 핑계를 데반은 처음부터 눈치챈 모양이었다.

억울한 마음에 그를 흘겨봤다.

“……그래요. 구두가 불편해서 그래요. 됐어요?”

하하, 하고 그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그것도 아무런 악의가 없는 웃음은 꽤나 드문 것이었기 때문에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데반이 돌연, 제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어트렸다.

“뭘 하는 거예요?”

앞머리를 거칠게 털어내자, 어느새 깔끔하게 넘겼던 머리가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은 어떻지?”

“……뭐가요.”

내 목소리가 약간 잠겨 있다는 걸, 나조차 눈치챌 정도였다.

데반이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드레스 자락에 숨겨져 있는 내 발 쪽으로.

“구두 말이다. 불편한 게 내 머리 때문인 것 같아서. 아닌가?”

난 차마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괜한 짓을 했군. 기왕이면 제대로 된 모습이 좋다고 집사가 조언하기에.”

“물어본 적 없어요.”

“이 모습이 취향인 걸 알아냈다니 그건 좋은데, 역시 눈은 마주치고 이야기하는 게 편해서 말이야.”

“……안 물어봤다구요.”

“혼잣말하는 거다만.”

그가 픽, 한 번 더 웃었다.

분명 매일 봐왔던 데반의 모습이 맞는데도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머리를 내린다고 한번 인식한 아름다움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정리되지 않은 듯 흐트러진 머리가 다른 사람에겐 보여주지 않는 모습 같아서 꼭…….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난 팍, 인상을 찌푸렸다.

“짜증냈다가 흐뭇했다가 다시 짜증이라. 하도 표정이 다채로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군.”

데반이 다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테라스로 넘어온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한바탕 헤집어 놨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마찬가지로 붉은 석양이 물들었다.

꼭 완벽하게 동그란 태양 같았다. 검은 힘이 일렁거리는 쪽은, 꼭 새까만 밤하늘 같았고.

“눈동자가…….”

“뭐?”

“전부터 생각한 건데 눈동자가 참 예쁜 것 같아요.”

분명 칭찬을 한 건데도, 데반은 어쩐지 불쾌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난 괜히 억울해져서 씨근거렸다.

“진심이에요. 꼭 붉은 태양 같다구요. 그 검은 쪽도 꼭 밤하늘 같고. ……물론 얼른 없애면 더 좋겠지만.”

“웬일로 부끄러운 소리를 잘도 하는군. 그것도 듣기 싫은 소리만 골라서.”

“듣기 싫다뇨? 칭찬을 싫어하는 성격은 아니잖아요.”

“……글쎄.”

데반은 다시 테라스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데반의 표정이, 연회장에 들어올 때 마차에서 보였던 표정과 비슷하다는 걸 눈치챘다.

어쩌면 이것도 그의 과거와 관련된 이야기일까.

데반의 과거와 눈동자……. 저주에 걸린 이후에는 눈을 안대로 가리고 다녔으니, 눈동자와 관련이 있다면 그보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라는 건데.

어린아이, 붉은 눈동자, 그리고 별궁…….

난 전생에 봤던 원작을 떠올렸다.

원작에서 데반의 어린 시절은 스쳐 지나가듯 묘사돼 있었다. 덕분에 나도 정확하게 기억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기억났다.

별궁에 사는 붉은 눈의 황자.

그게 데반의 별칭이었다.

대대로 황제가 황금빛 눈동자였던 황가에 나타난 붉은 눈의 황자.

저주 받은 게 분명하다고 손가락질을 당하곤 했었지. 그렇다면 별궁에 지내며 차별을 받은 것도 전부 다 눈동자 때문이었다는 건가?

잠깐, 붉은 눈동자의 어린아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잔상에 입이 약간 벌어졌다.

“잠, 잠깐 나 좀 봐요.”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데반의 몸을 억지로 돌렸다.

데반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힘을 줘 버티다가,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덩달아 심각한 표정이 됐다.

“왜 그러지?”

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잠깐만, 거기 그대로 있어 봐요.”

데반이 미간이 찌푸렸다. 나는 천천히 그와 거리를 더 벌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가 됐다.

“에블린?”

참을성 없는 데반이 나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나는 그가 다가온 만큼 다시 뒤로 물러났다. 데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날 피하는 건가?”

“……그 아이요.”

“아이? ……아까 그 아이를 말하는 건가? 네가 봤다던, 그 데이지 꽃을 든 아이?”

“네, 그 아이요.”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헝클어진, 눈썹을 덮는 어두운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기억과 천천히 대조했다.

새까만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또렷한 이목구비에 비해 조금 마른 듯한 몸, 고급스럽지만 낡은 옷까지.

단서는 고작 그것뿐이었음에도 확신이 들었다.

“……당신이었어요.”

“도대체 무슨―”

황당하게 중얼거리던 그의 눈빛이 변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 아이가…….”

이번엔 그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테라스의 난간을 세게 부여잡은 데반의 커다란 손에 핏줄이 불거졌고, 잔뜩 커진 눈동자에는 핏발이 섰다.

난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열었다.

“……당신의 어린 시절이었어요.”

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데이지 꽃을 들고 있던 붉은 눈의 황자와 내 눈앞의 사내가 여전히 꼭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

데반 란티모스. 그가 막 다섯 살이 됐을 때, 대신관 마르시오텔리오스 17세가 황궁으로 전령을 보냈다.

대신관이 직접 움직이는 일은 손에 꼽았기에 제국민 모두가 숨을 죽였다.

어쩌면 당사자인 데반보다도 다른 이들이 그의 운명을 일찍 알아챘을지도 몰랐다.

전령은 황제를 직접 대면해, 단 한 줄의 전언을 전달했다.

아스트릴라가 다섯 살이 되는 해에 자격 시험을 치르겠노라고.

그 안에는 배려도, 제안도 없었다. 오직 통보뿐이었다.

데반의 동생, 그 전언의 주인공 아스트릴라가 태어난 지 만 하루가 되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그 짧은 전언을 황제에게 전해 듣고 데반은 직감했다.

황위를 잇는 것은 제가 아닌 아스트릴라일 거라고.

다섯 살짜리가 봐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그 문장은 지나치게 그녀에게 치우쳐 있었다.

데반이 열 살이 되는 해가 아닌, 아스트릴라가 다섯 살이 되는 해였으니까.

신탁뿐 아니었다. 모든 게 그랬다.

모든 게 다 아스트릴라에게 치우쳐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누구도 데반을 중심에 두지 않았다는 게 맞았다.

그의 어머니가 죽은 뒤부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