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머뭇거리는 병사에게 단장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봐, 마물이 이 근처에 있다는 게 무슨 소리겠나.”
“……예?”
“당장 막지 않으면 이곳까지 쳐들어올 수 있다는 소릴세. 결국 마물을 해치우는 것 역시 황녀전하를 지키는 자네들의 소임이란 말이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느꼈는지 단장이 서둘러 앞장섰다.
병사 하나가 그 뒤를 따랐고, 끝까지 망설이던 한 명 역시 결국 발걸음을 뗄 수밖에 없었다.
간 건가?
데반은 고개를 빼꼼 내밀고 휘장에 가려진 문을 바라봤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모두 펠로스와 카렌이 벌인 짓이 틀림없었다.
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하나 싶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얼마 안 가 황후궁의 시녀가 도착할 것이다.
지금이 기회였다. 데반은 휘장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달칵― 그리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은 아주 커다랗고 온통 번쩍거렸다. 한가운데에 꼭 금으로 만든 것 같은 요람이 있었다.
그 안에 아스트릴라가 있으리라. 데반은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요람은 까마득하게 높았다. 발돋움을 해도 그녀의 붉은 머리칼만 몇 가닥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도 보지 못하고 갈 순 없었다.
데반은 근처 책장에서 커다란 책 몇 권을 뽑아, 요람 옆에 높게 쌓았다.
그 후엔 요람의 가장자리를 붙잡고 아슬아슬하게 책 위로 올라섰다.
드디어, 아스트릴라의 얼굴이 보였다. 데반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녀는 잠든 것 같았다. 그새 꽤 길어진, 타오를 것 같은 붉은 머리가 베개 위에 헝클어져 있었다.
데반은 손을 뻗어 그녀를 건드리려다가, 제 손에 흙이 잔뜩 묻은 것을 보고 관뒀다. 꽃을 꺾고, 나무를 타고, 담을 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대신 그는 뒷주머니에 꽂아둔 꽃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후후― 혹시라도 묻어있을 흙을 불었다. 그걸 그녀의 옆에 두려다, 데반은 멈칫했다.
직접 본 아이는 그의 생각보다 더 작고 약해보였다.
혹시라도 더러운 게 묻어 있으면? 그게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면?
데반은 꽃과 아스트릴라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때였다.
벌컥―
“……황녀님!”
갑자기 문이 열리고 고함소리가 들렸다. 금방 돌아올 거라던 황후궁의 시녀였다.
놀란 데반은 홱,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그 탓에 몸의 중심을 잃었고, 휘청이는 몸은 그만 아기가 있는 요람 위로 푹 쓰러지고 말았다.
“아스트릴라!”
운이 나쁘게도, 방 안에 들어온 건 시녀뿐이 아니었다.
가슴께에서 파도치는 새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과할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가 성큼성큼 요람으로 다가왔다.
아스트릴라의 어머니, 제 아비의 아내, 그리고 이 나라의 황후였다.
“아스트릴라!”
새빨간 머리칼을 휘날리며 다가온 황후가, 아스트릴라를 요람에서 벌떡 일으켜 꼭 껴안았다.
“아가! 괜찮니?”
그 소란에 잠에서 깬 아스트릴라가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울지도 않았고,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황후의 미간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데반을 향했다.
“너…….”
데반은 겨우 요람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높게 쌓아둔 책이 어느새 무너져 있었다. 그는 겨우 요람에 팔을 걸친 채 버티고 있었다.
도움을 받지 않고는 높은 요람에서 내려오기 힘들었다.
그러나 황후는 그를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시녀는 그녀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여긴 왜 오신 거죠.”
방금 전 ‘너’라고 지칭한 게 거짓말인 것처럼, 황후가 공대했다.
대답을 원하는 질문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보단 타박에 가까웠다.
데반은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요람을 붙들고 있는 팔이 점점 저려왔다.
그는 쓰러져 있는 책 사이로 보이는 평평한 바닥을 바라보며 심호흡했다.
한 팔로 요람을 붙잡고, 허벅지에 단단히 힘을 줬다.
“읏.”
그러나 불편한 자세로 이리저리 흐트러져있는 책을 피해 착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데반은 결국 커다란 책등을 밟고 그대로 주욱― 미끄러졌다.
발목이 이상한 모양으로 꺾였다. 데반은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을 참았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면서도 황후의 눈매는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아스트릴라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뒷걸음질 쳤다.
마치 보호라도 하듯이.
제 앞에 있는 게 발목을 삔 여덟 살짜리 소년이 아니라, 끔찍한 마물이라도 된다는 듯이.
“대체 여길 어떻게 오신 겁니까.”
“아, 아기를 보고 싶어서…….”
고통을 감내하며, 데반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우물거렸다.
황후를 직접 본 것도 오늘로 채 다섯 번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저 새빨간 머리칼도 무서운 눈매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아기가 보고 싶다면 정식으로 절차를 밟으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데반은 황궁의 그 누구와도 자의로 만날 수 없었고, 그녀도 그걸 알고 있었다.
붉은 입술을 짓이기며 황후는 데반을 노려봤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가 아스트릴라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매서운 눈매가 데반을 향했다가, 쓰러진 책들을 향했다가, 요람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데반이 엎어지는 바람에 무게에 짓눌려 볼품없어진 붉은 꽃 한 송이로.
“저건…….”
데반의 표정에 기대감과 비슷한 게 나타났다.
“아스트릴라에게 주려고……!”
그러나 황후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녀가 손짓하자, 시녀가 요람에서 조심스럽게 꽃을 집어 건넸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죠?”
꽃을 든 황후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죽일 생각인가요?”
“……예?”
“그 하고 많은 것 중 붉은 꽃이라니.”
데반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붉은 꽃이 무슨 문제가 되는 걸까. 그가 알기로 그런 법은 없었다.
무언가 오해가 생긴 것이리라. 그래야만 했다.
“저는, 그저…… 정원에 꽃이 피었기에……. 아스트릴라의 머리색과 똑같다고 생각해서…….”
황후가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꽃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이 나라에서는 저주를 걸 때, 머리색과 똑같은 색의 꽃을 사용한답니다.”
“……저, 주라니. 그게 무슨.”
“그래서 황궁 안에는 붉은 꽃이 한 송이도 피지 않죠. 그런데 정원에서 가져왔다고요?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건지, 거짓말을 쉽게도 하시는군요.”
그녀가 비아냥거렸다.
데반은 그제야 정원 구석에 붉은 꽃이 단 한 송이뿐이었던 이유를 알게 됐다.
별궁의 정원은 집사 단 한 명이 관리했다. 때문에 우연히 날아온 꽃씨가 싹을 틔우는 걸 미처 보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그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머리색과 같은 종류의 꽃으로 저주를 건다니. 데반은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몰랐습니다……. 저는 그저, 잘 어울릴 것이라…….”
“축복을 내릴 때는 눈동자와 같은 색으로, 저주를 내릴 때는 머리카락과 같은 색으로. 제 아무리 천한 신분이라도 제국에 내려오는 저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린아이라고 할 지라도요.”
데반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황후는 그의 이야기를 믿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가자.”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가 홱 몸을 돌렸다.
시녀가 문을 열었고, 아스트릴라를 소중하게 껴안은 채로 황후는 망설임 없이 방을 나섰다.
붉은 꽃이 그녀의 발아래에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데반은 그녀를 붙잡기 위해 손을 들었다가, 맥없이 떨궜다.
방을 반쯤 나서던 황후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는 데반을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조금 큰 목소리였다.
“제 어미와 똑 닮은 붉은 눈동자부터…….”
흠칫, 데반이 고개를 쳐들었고 그 순간 탁― 문이 닫혔다.
이제 이 커다랗고 텅 빈 방에 남은 건 그뿐이었다.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요람과 덩그러니 놓인 데반.
데반은 멍하니 창가로 다가갔다. 한 면을 가득 채운 창은 그의 키보다도 컸다.
천천히, 창에 손바닥을 댔다. 손에 닿는 유리는 시릴 정도로 싸늘했다.
데반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모두가 혐오스럽다 말하는 붉은 눈동자가 깜빡, 깜빡. 보였다가 사라졌다 보였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붉은 눈동자.
황제의 후사 중 눈동자에 조금도 황금빛이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데반이 유일했다.
데반이 태어났을 때, 제도는 불건전한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그들은 데반의 어미가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고 의심했다.
황가의 피가 섞이지 않아, 데반이 붉은 눈동자를 지닌 것이라고.
그의 어미가 출산 직후 죽었다는 사실은 피어오르는 의심에 불을 붙이기 충분했다.
황제의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 에서 황제의 아이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로.
소문이 사실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무엇보다 반박할 사람이 없어서, 소문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퍼져만 갔다.
데반의 어머니는 명목상의 작위만 가진 천애 고아였다.
오로지 그녀의 아름다움만을 보고, 황제가 강행한 국혼이었다. 그런 출신과 배경은 소문에 힘을 실어주기 충분했다.
정말일까.
데반은 창문에 비치는 제 눈을 멍하니 바라보다 미끄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내 시큰거리던 발목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파왔다.
제 눈을 파내고 싶었다. 그게 안 된다면 가리고 싶었다. 영영 눈을 감고 지내고 싶었다.
오늘따라 눈동자가 유난히 붉어보였다.
데반의 시선이 아무렇게나 떨어져 짓밟힌, 붉은 꽃으로 향했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쪽으로 손을 뻗으려다가, 그는 대신 눈을 감았다.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황후는 황제에게 오늘의 일을 말하리라. 저는 지금보다도 더한 멸시를 받으며 별궁에 갇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쫓겨나게 될 지도 모르지.
모두가 아스트릴라를 원하고 있었다.
아스트릴라가 원의 중심이라면, 그는 원의 가장자리를 하염없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주변인이었다.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았다.
데반은 한숨처럼 호흡했다. 창가에 하얀 김이 서렸다.
황금빛 눈, 그 아무것도 아닌 색. 여덟 살 데반이 바란 건 고작 그런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