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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60화 (60/123)

60화

한 발 앞서 조각상 안으로 들어간 데반이 우뚝 멈춰 섰다.

그러더니 돌연 몸을 돌려 나를 세게 껴안았다.

“읍.”

데반의 가슴팍이 내 얼굴을 꽉 조여 와서, 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무슨― 이거 놔 봐요.”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데반의 팔을 팡팡 두드렸지만 그는 팔을 풀기는커녕 더 세게 껴안았다.

떨림이 나에게 옮겨왔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데반은 꼭 내 눈앞을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절박하게.

“데반!”

팍― 데반의 가슴팍을 밀쳐냈다.

마침내 포기한 듯 나를 놓아준 데반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그가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끔찍한 걸 본 것처럼, 혹은…… 슬픈 것처럼.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를 지나쳐 한 발자국 나가, 굳이 눈앞의 진실을 마주한 이유는 뭐였을까.

아마도 두려움에 대한 호기심이겠지.

지하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이곳저곳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꼭 동굴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으나 공기 자체가 서늘했다.

마침내 빛에 익숙해진 눈이 펼쳐진 광경을 담았다.

일견, 숨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에블린.”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데반이 내 허리를 낚아채듯 붙잡았다.

그는 나를 껴안은 채 바닥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리곤 내 앞을 가로막으며 자리했다.

내가 이미 모든 것을 봤음에도, 더는 보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데반.”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른 말은 생각이 나지 않아서였다.

“데반…….”

입을 뻐끔거렸다. 산소가 부족한 기분이었다. 그럴 리가 없음에도.

데반이 내 등을 천천히 쓸었다. 제 가슴팍 안에 나를 감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난 이번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숨고 싶었다. 눈앞의 광경으로부터.

보지 않아서 없던 일이 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몸이 잘게 떨렸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모두 꿈은 아닐까. 이거야 말로 힐다가 보여주는 환상인 건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지독한 악몽이었다.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데반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맞춰오는 그의 눈에 혼란과 걱정이 마구잡이로 얽혀 있었다.

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데반의 어깨너머로 악몽 같은 장면을 바라봤다.

드넓은 공간에, 사람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그들의 손과 발이 한데 얽혀 있었다. 꼭 하나의 생명체인 것처럼.

수십, 수백 명의 인간이 그곳에 있었다.

그 어떤 규칙도 없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었다.

다른 이의 머리카락과 묶여져 있기도 했고, 얼굴과 얼굴이 맞닿아 코가 짓눌려 있기도 했다.

어렵지 않게 아는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함께 대공 저에서 제도로 온 병사들이 있었고, 유니스가 있었다.

아주 어릴 적, 기억에서 지웠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있었다.

나와 함께 고아원에서 지냈던 아이들. 신전에게서 신력을 강탈당한 아이들이 세월을 빗겨간 채 예전 그 모습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도축장 같았다. 지옥 같기도 했다.

그런 인간들의 정 가운데에 한 여자가 있었다.

모두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실 같은 하얀 빛과 이어진 채로, 여자는 눈을 감고 제단 위에 눕혀져 있었다.

코델리아였다.

*

코델리아.

나는 그녀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묘사 그대로였다. 허리까지 오는 풍성한 갈색 머리, 창백해 보이는 하얀 피부.

그러나 설령 그녀의 머리색이 변했다 하더라도 알 수 있었으리라.

노력하지 않아도 그녀가 본래 방대한 신력을 품었던 몸이라는 게 느껴졌으니까.

거기에 지금은, 신력이 모두 빠져나가 텅 비어있다는 것도.

데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신관들이 신력을 모아 코델리아를 잠시 멈춰뒀다고.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녀는 마치 죽은 것처럼 미동도 없이 제단에 누워 있었다.

“에블린.”

데반이 뒤에서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이대로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너무나 충격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던가.

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코델리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 게.”

억눌린 목소리가 나왔다.

“상황 파악은 나중에.”

그가 내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방을 나서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난 그의 팔목을 붙잡아 저지했다.

“에블린?”

“……나갈, 나갈 수 없어요.”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눈앞의 광경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이라고 한들.

코델리아, 유니스, 병사들, 십수 년 전의 아이들까지.

내가 찾던 모든 것이 이곳에 있는데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갈 순 없었다.

데반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날 말리고 싶은 듯했지만, 내 표정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깊게 심호흡했다.

헛기침을 해 가라앉은 목소리를 정돈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천천히 제단 쪽으로 걸었다.

가까워질수록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코델리아가 텅 빈 상태라는 것이.

“……코델리아.”

제단 바로 앞까지 와 그녀를 내려 봤다.

코델리아는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 같았다. 오랜 시간 정신을 잃은 상태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혈색이 좋았다.

그녀의 몸 이곳저곳에 엮여 있는 하얀 빛 무리를 바라봤다.

“에블린, 이건 혹시…….”

데반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도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신력이에요.”

“그렇다는 건…….”

“아마…… 이들의 신력을 모두 모아서 코델리아에게…….”

시선이 쌓여 있는 인간 탑으로 향했다. 정신을 집중해도 그들에게선 아무런 신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의 신력이라도 모두 모아, 코델리아의 몸 안으로 흘려 넣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덕에 그녀가 모든 게 멈춘 상태로 살아있을 수 있는 거였고.

“저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미…….”

“어쩌면, 신체적으로 훼손되지만 않았다면 살릴 수 있을 지도 몰라요.”

“살릴 수 있다고?”

“펠로스가 했던 말과 같아요. 저와 코델리아의 경우엔 워낙 몸에 빈 공간, 그러니까 막대한 신력이 들어가 있었던 공간이 많아서 신력이 비었을 때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다른 자들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신력이 작아서, 신력이 다 떨어져도 살 수 있다?”

“네. 아마도요. 하지만…….”

수십, 수백이 넘는 숫자였다. 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어떻게 데려가죠?”

“뭐?”

“치료가 필요해요. 신력은 제가 주입하면 될 것 같지만…….”

그들은 아무렇게나 얽혀 있었다.

코델리아를 살리기 위한 도구취급이었다.

특히나 유니스와 병사들은 사라진 지 몇 주 되지 않았으니 치료가 가능하겠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은 십수 년 전부터 저 상대로 얽혀 있었으리라.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해야 해요. 그러려면 모두를 이곳에서 데려가야 하는데…….”

상황이 좋지 않았다. 우리는 단 둘뿐이었고, 거기에 몰래 도망친 참이었다.

언제 신관들이나 용병이 몰려올지 몰랐다.

“어떻게 해야…….”

코델리아를 내려 보다, 힘없이 벌어진 손을 꼭 붙잡았다.

온기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시체처럼 차갑지도 않았다.

데반이 그녀와 붙잡은 내 손을 빼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이곳을 나가야 해.”

“하지만―.”

“시간이 없어. 알고 있지 않나?”

할 말이 없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많은 수의 사람을 우리가 데리고 나가는 건 무리야. 설령 이들이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어려운데, 정신을 잃고 있다면 더하지.”

“그럼 이대로…… 버리자는 건가요?”

“……일단 나간 후, 다시 돌아오는 거다. 상황을 파악했으니 그때는 대책을 가지고 올 수 있겠지.”

그의 말이 모두 맞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망설이는 나에게 데반이 말을 이었다.

“거기다 지금 이…… 신력이라는 하얀 실을 끊으면 이 여자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잖나.”

날 위로라도 하듯 그가 토닥였다.

그것 역시 맞는 말이었다.

코델리아가 지금 무슨 수로 신체를 유지하고 있는지 알아내기 전까진, 함부로 그녀를 움직일 수 없었다.

어쨌든 신전은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다. 최소한 목숨이 위험할 일은 없으리라.

내 마음이 흔들리는 걸 눈치챈 건지, 데반이 내 어깨를 감싸며 슬쩍 밀었다.

이대로 못 이기는 척 방을 나가고,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 다시 돌아온다.

그게 최선이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잠깐만요.”

다시 발걸음을 우뚝 멈추자, 데반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내려다봤다.

“……잠깐……. 십 분, 아니 오 분만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몸짓이었다.

데반의 품에서 빠져나와 다시 코델리아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았다.

“위험한 짓은…….”

“안 해요. 그저 제 신력을 불어넣으려는 거예요.”

“뭐?”

“당신을 치료했을 때와 똑같아요. 위험한 건 아니에요.”

데반을 치료했을 때 몇 번이고 쓰러졌던 전적을 생각하면 황당한 말이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을 뿐 별다른 제재를 하진 않았다.

혹시나 내가 쓰러진다면…… 왔던 것처럼 그가 날 들쳐 업고 돌아갈 수 있겠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고개를 주억거린 후, 눈을 꼭 감았다.

내 몸 깊은 곳에 있는 신력을 끌어내기 위해 집중하는데, 잘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양이 전보다 확연히 줄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펠로스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흑마법, 그러니까 그 미지의 힘이 내 신력을 먹고 있다. 그리고 신력이 모두 먹히면…… 죽는다.

그렇다면 신력을 사용하는 건, 죽음을 앞당기는 일이 아닐까? ……정말 신력을 사용해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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