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신전이 신력을 강탈해 마물을 조종했다는 증거가 되겠군요!”
펠로스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나 역시 상기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바로 그거예요.”
힐다가 말하길, 신력에는 그걸 사용하는 사람의 지울 수 없는 특성이 있다고 했다. 마치 지문처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신전의 악행을 온 제국에 폭로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재미있군요! 너무 재미있어요!”
펠로스가 테이블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중얼거렸다. 마석 안에 어떻게 신력을 주입할 수 있는지, 또 그 마석으로 마물을 어떻게 조종할 수 있는지 가늠해 보는 게 틀림없었다.
그가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먼저 그 하얀 마석이라는 것을 구해야겠습니다. 대조할 게 필요하니까요.”
“맞아요.”
“각각의 특성이라는 건 또 어떻게 밝혀내죠?”
“그건 신력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마도 펠로스 당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이런!”
펠로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금까지 제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니! 멍청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군요.”
“뭔가 짐작이 가는 게 있어요?”
“가끔 이상하다고 느낀 적은 있었습니다. 신력을 감지할 때, 사람마다 조금씩 느낌이 달랐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게 그저, 각자 가진 신력의 양이 달라서 그런 줄로만 알았죠! 바보 같긴!”
펠로스마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면, 힐다가 진실을 말했다고 여겨도 괜찮을 것이다. 펠로스는 나와는 달리 신력을 감지하는 데에 특화된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내내 생각하고 있던 말을 툭 내뱉었다.
“그래서 말인데, 사실은 그 생존자에 대해 할 말이 있어요.”
“뭐죠?”
코앞으로 불쑥 들이밀어 진 펠로스의 얼굴을, 데반이 밀쳤다.
“저리 떨어져. 정신 사나우니까 좀 앉고.”
구시렁거리면서도 펠로스는 자리에 앉았다. 데반이 그 옆에 앉아 나를 빤히 바라봤다.
이건 데반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던 거니까.
“코델리아라는…… 사람이 있어요.”
데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막대한 신력을 가지고 있고, 신전에게 착취당한 여자예요.”
“호오, 그 말씀은…….”
“네, 저는 아마도 신전이 그녀의 신력으로 마물을 조종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모르긴 몰라도 드래곤을 조종할 정도의 힘이라면…… 적은 양은 절대 아닐 테니까요.”
“코델리아, 코델리아라.”
“그러니까 그녀를 구한다면―”
“에블린.”
그 순간 데반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자를 구하고 싶어서 대는 핑계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나?”
“……네?”
“너는 오래전부터 그자를 신경 써 왔었지. 계속해서 행방을 묻고, 구하고 싶어 했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구하는 건 물론 좋다.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거니까. 하지만, 우선순위를 그자로 두는 것은 안 돼.”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물론…… 신전이 코델리아의 신력을 사용한 게 아닐 수도 있어요. 다른 생존자를 포기하겠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에요. 저는 다만―”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다른 생존자도 마찬가지야.”
“네……?”
내가 코델리아에게 정신이 팔려 다른 생존자를 구하지 못할까 봐 하는 말이 아니었나?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자를 구하는 것도, 최대한 많은 생존자를 구하는 것도 다 좋아.”
데반이 테이블을 한 바퀴 둘러봤다. 카렌과 펠로스가 어느새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최우선이 될 순 없단 말을 하고 있는 거다. 처음부터 말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였지.”
굴 안이라서일까. 데반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게 들렸다.
“확실하게 말해두지. 우리의 우선순위는 에블린의 안전이다.”
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본 데반이,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단호한 말투로 덧붙였다.
“설령 누군가를 포기한다고 해도.”
데반은 코델리아를 포기하더라도 나를 살리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그 말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원작을 비튼 탓에 데반은 코델리아를 제대로 마주한 적조차 없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방금 왜, 안도한 걸까.
코델리아의 것을 모두 빼앗은 주제에…… 데반이 나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안심하다니. 나는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아……! 그럼 좋습니다.”
가라앉은 분위기 사이로 펠로스의 발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최우선은 레이디, 그리고 우리 모두의 안전. 그 다음은 코델리아의 구출.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군요. 두 분 다 불만 없으신 것 맞죠?”
“……그래.”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카렌이 툴툴거렸다.
“사람은 셋인데 왜 내 의견은 묻지 않는 거지?”
“말이 통하는 사람과만 이야기하는 버릇 때문에. 미안하군.”
“뭐야?”
펠로스와 카렌이 서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내 침묵을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들의 다툼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렸다. 자꾸만 옆에서 데반의 꿰뚫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
“그럼 레이디와 데반은 저쪽에서 주무십시오.”
식사 자리를 정리한 뒤 잘 만한 곳을 찾아보려고 움직일 때였다.
펠로스가 아까 전 내가 마도구로 몸을 씻은, 그러니까 조금쯤 시야가 막힌 그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데반과 단둘이 자라고?
“……네, 네? 왜요?”
사방이 막힌 굴 안에, 내가 지른 비명이 메아리쳐 울려 퍼졌다. 민망한 마음에 서둘러 덧붙였다.
“아니, 제 말은… 다 같이 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뭐 그런 거죠. 굳이 저희만 저기서 잘 이유가….”
“레이디, 저는 추한 사내의 일면을 다시 보고 싶진 않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펠로스가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자리를 떴다.
“그만 가지.”
데반이 익숙하게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태도라 말릴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우리는 방 안이었다. 겨우 담요 몇 개를 펼치면 꽉 차는 넓이의.
이건… 이건 조금…. 우두커니 서 있자 담요를 정리하던 데반이 나를 바라봤다.
“선 채로 자기라도 할 생각인가?”
“…저, 데반. 저는 아무래도….”
“안 잡아먹는다고, 아까도 말한 것 같은데.”
담요를 모두 평평하게 펼친 데반이 그 위로 벌러덩 누웠다. 기다란 다리가 담요 밖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그는 어느새 두 팔을 위로 올려 베고 있었다. 퍽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데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꼭 이곳이 신전으로 향하는 지하 굴이 아니라 꽃이 잔뜩 핀 정원 같았다. 칙칙한 색의 담요는 화사한 돗자리 같았고.
“공간이 한정돼 있는데 어쩔 수 없지 않나. 저 좁은 곳에서 사내 셋이 껴 있을 수도 없고.”
“……그럼 제가 가면―”
“안 돼.”
데반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절로 입이 다물리고 시선이 떨어졌다. 나는 발치만 바라보며 이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하고자 애썼다.
그의 말이 모두 맞았다. 쉼터를 아무리 그럴듯하게 만들어 뒀다고 해도 공간의 크기는 한계가 있었다. 여기서 둘, 밖에서 둘이 자는 게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내가 세 명의 사내 중 꼭 하나와 자야 한다면…… 어쨌든 법적으로 결혼한 상대인 데반과 자야 하는 것도 맞았고.
그래, 다 맞긴 한데…….
“에블린.”
재촉하는 듯한 데반의 목소리에 몸이 움찔 떨렸다.
이런 쓸데없는 고민에 빠질 때가 아니지 않나? 내일은 신전에 잠입해야 했고, 그러려면 체력을 아껴야 했고, 그러니까 얼른 자는 게 효율적이고, 또…….
합리화를 끝마친 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데반의 옆에 가 주저앉았다. 꼭 무릎이라도 꿇는 듯한 모양새였다.
데반이 헛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눈앞이 어두워졌다. 조명 역할을 하던 마도구의 빛을 최소한으로 낮춘 모양이었다.
슬쩍 곁눈질로 데반을 바라봤다. 그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자고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평온한 얼굴이었다.
“하아…….”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곤, 조심스럽게 데반의 옆에 몸을 뉘였다.
막상 누우니 긴장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피로가 급격히 몰려왔다. 데반이 옆에 있다는 걸 잊고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았다.
어느새 두근대던 심장이 가라앉고, 노곤함이 느껴졌다. 딱딱한 바닥이 푹신한 침대 같았다.
내일은 어떻게 되려나……. 모든 게 생각대로 잘 될까……. 생각이 늘어지며, 의식이 반쯤 날아갔을 때였다.
“정원 한 구석에 있다는, 날 위해 준비한 선물이 대체 뭐지?”
데반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반쯤 일으켰다.
“데반! 깨어 있었어요?”
벌렁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나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외치자, 밖에서 커억― 하고 카렌이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데반이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쉿.”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어 입을 턱 막았다가 천천히 뗐다.
“……데반.”
“그래, 안 자고 있었지. 그 날도 지금도.”
‘사실은 정원 한 구석에, 당신을 위한 선물도 준비해뒀어요.’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데반이 자는 줄 알고 한 말이었는데. 민망함에 입술만 몇 번 달싹이다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왜, 왜요?”
“뭐?”
“왜 잠을 안 자시냐고요!”
데반이 몸을 떨며 웃었다.
“안 잔 게 아니라 못 잔 게 아닐까?”
“네? 왜요?”
불면증이라도 있는 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데반이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알고 싶군. 그보다 다시 눕지 그래?”
“아…….”
그래. 내일 할 일이 산더미다. 서둘러 다시 몸을 뉘였다. 내 쪽으로 아예 몸을 돌린 데반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은 천장에 고정한 채였다.
“그래서 뭔데, 그 선물이?”
“……별 거 아니에요. 왜 남의 말을 엿듣고 그래요!”
“어차피 나한테 한 말인데, 그걸 엿들었다고 할 수 있나?”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튼 얼른 자요. 저는 잘 거니까.”
데반에게서 홱 등을 돌리고 누웠다. 또 한 번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데반이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곤 제 팔을 그 아래로 밀어 넣었다.
절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순식간에 데반의 팔을 베개처럼 벤 꼴이 됐다.
……어떻게 하지? 잠결인 척 저 멀리 굴러갈까? 아니면 그냥 대놓고 비키라고 해버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자.”
내 머릿속을 훤히 꿰뚫어보는 것처럼 데반이 말했다. 곧이어 어깻죽지를 토닥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팔이 저릴 텐데……. 얼른 비켜달라고 해야…….
생각과는 달리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데반의 팔뚝도 딱딱하기는 바닥과 매한가지였는데, 어째서 이렇게 포근한 기분이 드는 걸까.
“……잘 자, 에블린.”
멀어져가는 의식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익숙했다.
아……. 저번 날, 앓고 있는 나를 다독였던 목소리도 데반이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지독한 수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