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데반이 체포됐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신전의 권력은 황궁보다 위에 있고, 무엇보다 데반 스스로가 혐의를 인정한 탓이었다.
“레이디!”
응접실 소파에 쓰러지듯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카렌이 벌컥 문을 열고 다가왔다. 데반이 그에게 물러나 있으라고 한 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상황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으니 꽤 속이 탔으리라. 카렌이 황망하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카렌 경…….”
나는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다, 시선을 떨궜다. 그러다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다시 번뜩 고개를 들었다.
“펠로스가 필요해요! 데반이, 카렌 경과 펠로스에게 말하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는 말에 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펠로스는 아직 보석상에서 정리를 하고 있을 겁니다. 그 근처로 신전이 주위 검문을 시작한 터라 오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럼…….”
“전하께서 저와 펠로스에게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겁니다. 펠로스를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저어 내 말을 저지한 그가 답지 않게 퍽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었다.
“레이디는 곧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이만 쉬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늦은 밤입니다. 어제도 제대로 된 곳에서 자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카렌이 나를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이럴 필요까진 없다고 하고 싶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방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펠로스가 도착하면 지체 없이 깨워드리죠. 어떻습니까?”
“……그래요.”
카렌의 말이 맞았다. 어차피 펠로스가 오기 전까지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리라. 나는 카렌에게 몸을 맡긴 채 방으로 향했다.
“저, 카렌…….”
그러다 2층 복도에 올라왔을 때가 돼서야 카렌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떠올렸다.
“고마워요…….”
“레이디를 부축하는 것 정도는 운동도 안 됩니다.”
“그게 아니라요. 신전에서, 코델리아를 데리고 와준 거요. 위험할 수도 있었는데…….”
“그거야 뭐…….”
감사 인사가 어색한 듯 카렌이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레이디, 아니 대공비 전하께서도 이제 저의 주군이 아니십니까. 명령하시면 따라야지요.”
장난기 섞인 말투에 나도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어느새 내 방문 앞이었다.
“그럼, 쉬십시오.”
“잠깐만요, 카렌. 저 혹시 코델리아는…… 어디에 있죠?”
자리를 뜨려던 카렌이 내 부름에 뒤를 돌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안전한 곳에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지금은 신경 쓰지 않고 푹 쉬는 게 나을 것 같군요.”
“하지만…….”
“약속드립니다. 펠로스가 오면, 그때 모든 걸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레이디도 아시다시피 저는 영 무식한 사람이라 대공 전하를 어떻게 다시 빼 올지, 신전을 어떻게 골탕 먹일지 그럴듯한 생각을 하는 건 무리입니다.”
카렌이 척, 두 발을 모으더니 제 가슴팍을 두어 번 두드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별궁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만은 자신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낮은 목소리가 카렌의 엄숙한 마음을 대변했다. 데반이 없는 지금, 그는 별궁을 지키는 것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나는 더 말을 얹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의 나에겐 혼자 어두운 방 안에 누워 있는 시간이 간절했다.
*
카렌의 말대로 그 누구에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밤이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해가 떴을 때가 돼서야 펠로스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간밤 푹 자서, 그나마 나아진 몸뚱어리를 이끌고 서둘러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펠로스!”
다이닝룸에서는 펠로스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음식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레이디!”
음식물이 가득한 입으로 펠로스가 나를 반겼다. 예의니 뭐니 따질 것도 없이 나는 성큼성큼 식탁에 다가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당신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요.”
“하룻밤밖에 안 됐는데 제가 그렇게 보고 싶으셨습니까?”
“펠로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데반이 신전에 붙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여전히 펠로스의 표정에는 진지함을 찾을 수가 없었다.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자 펠로스가 다시 음식으로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
“일단 식사하십시오. 카렌도 곧 오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레이디.”
펠로스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달그락,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제야 그가 애써 쾌활함을 꾸며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전히 매끄러운 미소를 짓고 있으나, 그의 눈빛에는 장난스러운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펠로스가 곧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카렌이 오면 모든 이야기를 듣죠.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이야기를요. 데반이 저와 카렌에게 이야기를 전하라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수고를 하진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
“레이디께서도 아직 식사를 못 하신 것 같은데, 어서 숟가락을 드십시오. 배 속에 든 게 있어야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기 마련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를 눈앞에 두고, 펠로스는 다시 음식을 전투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카렌이 찾아오자마자, 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모두 전달했다.
신관들이 찾아와서 했던 이야기와 데반과 단둘이 나눴던 말들, 또 그가 마지막에 한 말까지.
“레이디가 잡혀가면 모든 게 끝이라고 했단 말이죠?”
그리고 펠로스는 그중 마지막 대화에 유난히 집착했다.
“네.”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했다고요.”
“그래요.”
물론 나도, 데반의 말을 허투루 들은 건 아니었다. 나는 펠로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젯밤 내내 생각해 봤어요. 그 말의 의미에 대해서요. 뭔가…… 묘했거든요.”
“그래서요? 레이디의 답은 뭡니까?”
“제 생각에는……. 신력과 관련된 일인 것 같아요. 제가 데반보다 나은 건 그것뿐이잖아요.”
“신력이라.”
펠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더군다나 저와 카렌을 부르면 수가 생길 거라고 한 걸 보면, 답은 하나겠죠.”
“그게 뭐죠?”
펠로스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했다.
“레이디가 어제, 아니 그제 했던 이야기 말입니다.”
그제 했던 말?
그제라면 분명 신전에 침입하기 전 회의를 할 때였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은 분명…….
‘저는 이 사실을 폭로한다면…… 신전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얀 마석에 든 신력과 생존자의 신력을 비교하는, 그 일 말이에요?”
“바로 그겁니다. 우린 그걸로 신전의 약점을 쥘 수 있어요.”
신전의 약점을 쥔다면…….
“그 약점으로 데반을 빼올 수 있다는 뜻인가요?”
“맞습니다. 말하자면 물물교환이지요.”
데반을 구할 수 있다…….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빠르게 두드리던 펠로스가 덧붙였다.
“하지만 하필이면 레이디가 있어야 한다고 한 건 왜일까요.”
“데반은…… 신력에 대해 잘 모르니까요. 그래서일지도 몰라요.”
“흐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펠로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 신력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아!”
번뜩, 머릿속에 한 사람, 아니 한 존재가 스쳤다.
힐다. 내가 각각의 신력에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도 힐다 덕분이었다. 어쩌면 힐다를 통해 새로운 단서를 얻을 수도 있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건가? 확실히 힐다는 데반보다 나에게 호의적이니까.
“뭔가 떠오르신 겁니까?”
그러나 펠로스에게 쉽게 털어놓기는 힘들었다. 그를 믿지 못한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설명하기엔 너무나…… 복잡해서. 힐다의 존재와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려면 시간이 다 부족할 지경이었다.
나는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가 뭔가 더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음……. 그 흑마법이요. 실제로는 흑마법이 아니지만, 하여튼 그것과 아주 관련 있는 존재가 있거든요.”
펠로스의 눈이 흥미로 반짝거렸다.
“존재요? 그게 누구죠?”
“그건…….”
예전에 제 시녀였는데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고, 저번에는 드래곤에게서 우리를 구해줬고, 지금은 남작가의 영애로 놀고먹고 있답니다…….
나는 입을 뻐끔거리다, 결국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이따가 같이 보러 가요. 그냥… 직접 만나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가까운 곳에 있습니까?”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처럼 펠로스가 몸을 들썩였다. 이 별궁 안에 있다고 했다간 정말로 당장 찾으러 갈지도 몰랐다.
일단 힐다를 만나 볼까……? 펠로스라면 뭔가 더 알아낼 수도…….
고민하고 있는데, 카렌이 불쑥 끼어들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뭐지?”
펠로스가 빨리 말하라는 듯 인상을 구겼다.
“도대체 왜 근위대병인 거지?”
“네?”
흑마법에 대해 물을 줄 알았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렌을 바라봤다.
“대공 전하를 끌고 간 건 신전입니다. 그런데 신전이 부른 건 근위대병이죠.”
“맞아요.”
“근위대병은 황실 소속입니다. 황궁의 물리적인 안전, 황실의 권위 같은 것들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대죠. 신전에 침입한 죄를 묻겠다면서 왜 근위대병을 데려온 걸까요?”
말을 듣다 보니 이상하긴 했다. 카렌의 의문에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펠로스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신전에 침입했고, 그 목적은 지하에 있는 생존자들의 탈환이었죠. 하지만 신전 측에서는 당연히 그 지하를 세간에 알리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그러니 그들은 당연히 우리가 신전에 침입한 이유를 다른 걸로 덮어씌울 겁니다.”
다른 이유라니? 더군다나 그것과 근위대병이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잠깐만요, 설마……. 황위와 관련된 일인가요?”
내 물음에 펠로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로 그겁니다. 신전에 몰래 침입했다는 건 즉, 신전의 권위를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황족이 신전의 권위를 거부한다는 것, 그것도 저주받은 황족이 그랬다는 건 잘만 엮으면…….”
그 순간이었다. 똑똑― 다이닝룸을 조심스럽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기민하게 묻자, 익숙한 목소리의 시녀가 대답했다.
“접니다, 대공비 전하.”
“들어 와.”
문을 열고 들어온 시녀는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이야? 방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시녀가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입을 뗐을 때였다.
“이게 얼마 만인가!”
그녀의 뒤로 붉은색 포니테일이 휘날리며,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태녀 전하…….”
그곳에 있는 건 아스트릴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