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을 수 있다는 소리란다.>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을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힐다도 나에게, 끝나지 않은 아이라서 시작도 하지 못했다고 했지…….
<그 아이가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 아이요?’
신이 작게 웃었다.
<그래, 너를 이곳에 보낸 아이 말이다.>
‘……힐다를 말하는 건가요?’
<우리에게는 이름이 없지. 하지만 아마도 맞을 게다.>
우리라고? 마치, 자신과 힐다를 비슷한 개체로 묶는 듯한 단어였다.
‘힐다는 도대체…… 뭐죠? 그리고 또 당신은요? 당신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나요?’
<모든 것이라…….>
어쩌면 지금이 모든 걸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급하게 물었으나 신은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래, 적어도 네가 궁금해 하는 것들은 알고 있는 것 같구나. 뭐가 궁금한지 차근차근 물어보렴. 어차피 시간은 많단다. 그 아이는 네 안에서 신력을 모두 제거할 생각이거든.>
신의 말에 아래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내 육체는 미동도 없었고, 코델리아와 나 사이에 연결된 하얀 선도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실체화를 하는 편이 좋을 수도 있겠구나.>
‘실체화?’
눈을 한 번 깜빡거렸을 뿐인데, 순식간에 내 앞에 힐다가 서 있었다.
힐다! 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힐다는 사라졌었는데…….
그러다 나는 내 육체도 어느새 실체화가 됐다는 걸 깨달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몸이 생겨나 있었다.
절로 내 손과 몸뚱어리를 내려다봤다. 손을 천천히 주먹 쥐어 봤다. 정말로 내 몸이 맞았다. 어떻게 한 거지? 설마 다시 육체 안으로 들어온 건가?
그러나 나는 여전히 공중에 떠 있었고, 아래에는 내 육체가 여전히 쓰러져 있었다. 그럼 이 몸은 대체…….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내 앞에 선 힐다가 입을 열었다.
“그저 네가 편하도록 잠깐 만들어낸 것뿐이란다.”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이 떨렸다. 아까까지 내 머릿속으로 꽂히던 발화가 아니라 직접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심지어 그 목소리는, 내가 들었던 힐다의 목소리였다.
“혹시…….”
무심코 입을 열었다가, 나는 나 역시 다시금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목을 몇 번 가다듬곤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은 만들어낸 건가요?”
“그래, 네가 그나마 편할 것 같은 인물로 만들었지.”
힐다의 얼굴과 목소리로 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를 구사하자 영 낯설었다.
“하나도…… 편하지 않은데요.”
“그러니?”
잠깐 웃다가, 신이 꼭 힐다처럼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그러자 순식간에 힐다는 사라지고, 그 자리엔 데반이 나타났다.
“……데반!”
그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이 모습은 어떻지? 네가 가장 많이 떠올리고 있는 인물로 변해본 거란다.”
그러다 우뚝 멈춰 섰다. 낮은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역시나 특유의 어조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나는 속에서 울컥 치미는 무언가를 간신히 삼켜내곤 입을 열었다.
“……더 이상해요. 차라리 제가 모르는 모습으로 변해주시면 안 되나요?”
“흐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던 신이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겼다. 그러자 이번에 그곳에 있는 건 화려한 은발을 허리까지 늘어트린 미남이었다.
새빨간 눈동자를 가진 그 얼굴은 분명 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묘하게 익숙했다.
“이 모습은 어떻지? 너에게 친숙한 자들을 이리저리 합쳐 봤단다. 나는 아는 인간이 없어서 말이야.”
아……. 화려한 은발은 킬리언의 것이었고, 허리까지 늘어트린 긴 머리는 아스트릴라의 것, 새빨간 눈동자는 데반의 것이었다.
얼굴은 모두의 것이 묘하게 섞인 듯했는데 하필이면 펠로스의 지분이 컸다. 그러니까 꼭 펠로스의 형제가 있다면 저런 얼굴일 것 같다고나 할까.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신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 모습도 마음에 안 드는 거니?”
솔직히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중에는 제일 나았다. 이런 투정을 부릴 때가 아니기도 했고.
“뭐……. 모습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좋아. 그럼 이제 이야기를 해볼까?”
신이 한 번 더 손가락을 탁 튕겼다.
이번엔 주위의 풍경이 변했다. 아래엔 꼭 투명한 바닥이 생긴 것만 같았고, 우리 둘 사이에는 익숙한 테이블이 생겨났다.
“이건 제 방에 있는 테이블인데…….”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앉은 신이 고개를 까딱했다.
“너에게 가장 익숙한 것을 고르다 보니. 앉지.”
천천히 맞은편에 앉자, 이번에는 신이 주전자와 찻잔을 불러왔다. 응접실에서 손님이라도 맞이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래서, 궁금한 게 뭐니?”
익숙한 동작으로 내게 차를 건넨 신이 말했다.
궁금한 것? 궁금한 건…… 너무나 많았다. 도대체 뭘 먼저 물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힐다.”
“그 아이가 궁금한 거니?”
“도대체…… 힐다는 누구죠? 아니, 뭐죠?”
생각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불쑥 튀어 나간 질문이었다.
“그 아이에 대해 설명하려면 나에 대해 먼저 말을 해야겠구나. 인간들이 나를 ‘신’이라 불렀다는 건 이미 말했었지.”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신을 빤히 바라봤다.
“……네.”
“그러니 ‘신력’이라고 불리는 힘은 바로 내 힘이란다.”
거기까진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신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희들이 정의 내린 것처럼 성스러운 힘은 아니야.”
“성스럽지 않다뇨?”
신력은 웬만한 질병과 상처를 모두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구원이었다. 신전의 악행과는 별개로, 신력 자체가 성스럽지 않다니…….
설명하기 어렵다는 듯 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먼저 이것부터 이해해야겠구나. 내 힘, 아니 우리의 힘에는 그 어떤 가치 판단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가치 판단?”
“옳고 그른 것이 없다는 소리지. 내 힘은 그저 힘일 뿐이야. 상처를 입은 사람을 치료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렇게 설계됐기 때문이지. 내 힘이 특별히 자애로워서가 아니라는 거다.”
“그렇게 설계됐다는 게 무슨 뜻이죠? 정확히 어떻게 설계됐다는 거예요?”
“……모든 것을 태초로 돌려보낼 수 있게.”
“태초?”
“시작이라고 하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쉬울까?”
모든 것을 시작으로 돌려보낸다고?
“질병이 생기기 전, 상처가 나기 전. 그런 것들이 없었던 시작으로 돌려보내는 힘이지. 그래서 꼭 치유의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거고.”
“…….”
복잡한 생각을 채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데, 신이 덧붙였다.
“그리고 그 아이, 네가 힐다라고 부르는 그 아이의 힘은 그것과 정 반대란다.”
“반대라고요? 그럼…….”
“내가 시작이니, 그 아이는 끝이 아니겠니.”
끝……. 듣기만 해도 절로 두려움이 드는 단어였다.
“끝은 곧…… 죽음이 아닌가요?”
“끝을 죽음이라고 정의 내릴 수는 없단다. 하지만…… 그 힘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
지금껏 힐다의 힘이 저질렀던 일들이 떠올랐다.
내 안에 들어왔을 때, 잠겨있던 문을 열고 무언가를 폭파시키고, 결계마저 부쉈었지.
그 후엔 데반의 한 쪽 눈에 들어가 그의 눈을 멀게 했고……. 드래곤에게 당해 쓰러져 있던 우리를 구해줬을 때도 그럼, 그 마물들을 모두 없앤 건가?
모든 것을 파괴하는 힘이기 때문에?
“……그럼 그게 흑마법이라는 건 역시 모두 거짓말인가요? 왜 그런 거짓말이 사실처럼 자리 잡은 거죠?”
“생각해보렴. 모든 것을 파괴하는 힘이 얼마나 두려웠겠니.”
두렵다고?
“인간들 중에는 우리의 힘을 빌려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 몇 있단다. 네가 신력을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너는 내 힘과 상성이 잘 맞게 태어난 거란다.”
“막대한 신력을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니라, 신력들이 내 안에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빌려오는 거라고요?”
“물론 네 안에 자리할 때도 있지. 하지만 그 근원이 너인 것은 아니잖니.”
복잡해지는 이야기에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중요한 건 이거란다. 너처럼 상성이 잘 맞는 어떤 자가, 우리와 우리의 힘에 대해 알게 됐을 때 과연 어떻게 했을까?”
만약 내가 시작의 힘과 끝의 힘 모두를 빌려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릴 수도, 또 파괴할 수도 있다면?
그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고, 스스로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면…….
“누군가는 지배자의 위치에 서고 싶어 한단다.”
“……그게, 신전이라는 건가요?”
황권의 위에 군림해 이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신전. 신력에 대한 정보를 극히 제한하고, 그 신력으로 돈과 권력, 명예 모든 것을 얻은 신전…….
“그래. 끝의 힘을 흑마법이라 매도한 것도 모두 그들의 짓이지.”
신의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힘으로 인간들을 통제하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신을 만들고, 종교를 만들었다. 그 후에는 뭐가 필요했겠니?”
“……악역.”
“그래, 평화로운 세상에 종교는 필요하지 않으니까.”
펠로스와 황궁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 책에서 흑마법은 신과 대등할 만큼 두려운 악마의 힘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렇게 공포감을 조성한 뒤, 흑마법을 없앨 수 있는 것이 오직 신력이라고 포장한다면.
……아무도 신전에 반항할 수 없겠지. 그러니 이 모든 게 결국, 신전의 농간이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