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잠시만요, 전하!”
지하로 내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데반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눈이 먼 채로 지냈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황태녀 전하!”
황태녀라니? 아스트릴라가 이곳에 왔단 말인가? 데반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힘을 뺐다.
아스트릴라가 무슨 일로 온 걸까? 어쩌면 저를 꺼내주기 위함일 수도 있었지만, 그 반대일 확률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전하, 이렇게 막무가내로 오시면―”
쩔쩔매는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우뚝 발소리가 멎었다.
“자네는 집에 들어갈 때 허락을 맡고 들어가나?”
“그건…….”
“이곳은 황궁 감옥이고, 근위대의 관할이다. 그 근위대를 통솔하는 게 바로 나고. 그대가 나를 막아설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은데.”
냉철한 목소리의 주인은 아스트릴라였다. 그 여전한 성격에 데반이 작게 웃었다.
사내는 무어라 웅얼거리며 대꾸하는 듯했지만, 신경질적인 발소리에 묻혀 잘 들리진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척은 데반이 갇힌 방 바로 앞에서 느껴졌다.
“열어.”
아스트릴라의 낮은 명령과 사내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머뭇거리는 듯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자네는 이만 가보게.”
“하지만 전하―”
“신전에서 자네를 협박한 것 알고 있네. 내가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하겠지.”
사내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적어도 아스트릴라는 신전의 편이 아니라는 소리인가? 데반은 차근히 상황을 가늠했다.
사내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듯 아스트릴라의 목소리가 한층 작아졌다.
“그러니 자네도 이 일을 비밀에 부치는 게 좋지 않겠나? 나도 협박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잘하거든.”
“크흡― 큭―”
사내의 억눌린 신음이 들렸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데반은, 소리만으로 아스트릴라가 그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협박이라……. 이렇게까지 해서 아스트릴라가 나를 찾아올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데반은 슬쩍 눈을 떴다. 어두운 주위 탓에 대놓고 바라보지 않는 한 그가 눈을 뜬 것을 들킬 리는 없었다.
눈앞의 광경은 그가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간수로 보이는 사내가 아스트릴라의 한 손에 목이 졸린 채 발버둥 치고 있었다.
“알아들었나?”
“아, 알겠, 커억―”
숨을 쉬기 힘든지, 사내의 얼굴이 점점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격렬했던 몸부림조차 어느새 힘이 빠진 듯 느려지기 시작했다.
아스트릴라가 사내의 목덜미를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다. 그대로 바닥에 엎어진 그가 연신 콜록거리며 기침을 내뱉었다.
그런 사내와 눈높이를 맞추며 쭈그리고 앉은 아스트릴라가 이번엔 한 손을 내밀었다.
“커억, 큭― 뭐…… 뭡니까?”
“해독제.”
“……예?”
“공기 중에 독이 가득한데 자네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군. 신전에게서 이미 해독제를 받은 거겠지.”
“그, 그건…….”
데반은 살짝 미소 지었다.
아스트릴라는 그보다 훨씬 어릴 때부터 몇 배나 되는 종류의 독에 대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비록 신전에서 사용하는 독에는 내성이 없다고 할지라도, 중독되는 미묘한 감각에 대해선 누구보다 훤했다.
거기에 해독제를 원하는 걸 보면, 아스트릴라가 신전과 손을 잡지 않은 것은 확실해 보였다.
아스트릴라가 사내를 빤히 응시했다. 말 한마디, 접촉 하나 없었지만 사내를 위협하기엔 충분했다.
“여, 여기…….”
결국 사내가 품 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그것을 휙 낚아챈 아스트릴라가 그만 나가보라는 듯 턱짓했다.
씨근거리며 바닥을 바라보던 사내가 결국 철창 밖으로 나섰다. 아스트릴라는 그가 계단을 올라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마침내 덜컹거리며 감옥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고, 데반은 다시 눈을 감아 정신을 잃은 척했다.
여전히 아스트릴라의 의도가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은 탓이었다.
“흐음…….”
아스트릴라는 데반에게로 천천히 향했다. 그녀는 데반의 코앞에서 팔짱을 끼고 빤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그의 뺨을 손으로 툭툭 쳤다. 그럼에도 데반의 얼굴엔 미동도 없었다.
“고작 이 정도 독에 정신을 잃다니. 내 오라비는 생각보다도 더 유약한 사내였군 그래.”
빈정거리는 말투에 데반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결국 천천히 눈을 뜬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스트릴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데반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네가 정신을 잃은 척하고 있다는 걸? 애초에 믿지도 않았지.”
아스트릴라가 그에게 작은 병을 건넸다. 방금 전 사내에게서 건네받은 해독제였다.
“……나에게 주는 건가?”
“그래. 이 정도 양이면 몇 날 며칠이고 갇혀 있어도 끄떡없겠군.”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던 데반이 이내 품속 깊은 곳에 병을 숨겼다.
“그래서? 이깟 해독제를 주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내 꼴을 비웃어 주려고 온 건가?”
“그럴 리가. 어떤 꼴로 있나 궁금해서 와봤지. 우리 대공비 전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셔서 말이야.”
에블린? 데반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그 표정을 보지 못한 척 아스트릴라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며 말했다.
“막상 와보니 왜 걱정하는지 알겠군. 제대로 된 판결도 나지 않은 황족이 갇힌 곳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열악한 환경이야. 거기에 독이라니. 그거 알고 있나? 이 방이 다른 곳과 철저하게 단절돼 있다는 것을.”
“에블린과 만났나? 그녀는 어떻지?”
신난 얼굴로 떠들던 아스트릴라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물을 게 그것뿐인가?”
“아스트릴라.”
놀리는 게 분명한 말투에 데반이 얼굴을 굳혔다.
“글쎄……. 어떻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군.”
“건강한가? 안색이 어때 보였지?”
아스트릴라가 얼굴을 이상하게 구겼다. 웃는 건지 어이가 없는 건지 모를 듯한 표정이었다.
“재미없는 사내인 줄만 알았더니―”
“아스트릴라, 묻는 말에나 대답해.”
데반이 그녀의 말을 뚝 끊고 일갈했다.
순식간에 낯빛을 굳힌 아스트릴라가 데반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방금 전, 사내를 위협할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내가 사랑의 메시지라도 전달해 주러 온 것 같나?”
“…….”
“에블린을 만난 건 맞아. 우리는 협상을 했고, 손을 잡기로 했지. 하지만 그게 네 종노릇을 하겠다는 뜻은 아니야.”
“……뭐? 손을 잡아?”
에블린과 아스트릴라가? 어째서?
“오래 전 내가 했던 말, 잊진 않았겠지?”
아스트릴라가 데반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모든 걸 무너뜨리겠다고 했던, 그 말.”
“너…… 그걸 에블린에게 말한 건가? 황제를 죽이고, 대신관까지 없애겠다는 그 말을?”
“그래. 반색하더군.”
삽시간에 몸을 비튼 데반이 아스트릴라의 멱살을 붙잡고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였다. 방금까지 독에 취해 기운이 없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한 속도였다.
그러나 아스트릴라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에블린을…… 끌어들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가 협박이라고 했나? 분명히 협상이라고 한 것 같은데. 손을 잡겠다고 결심한 건 그 아이야.”
그녀가 핏줄이 선 데반의 팔목을 거칠게 털어냈다.
“모르겠나? 모든 건 다 널 빼 오기 위한 거란 걸. 괜한 데에 화풀이하지 말고 탓하려면 스스로를 탓해.”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속셈?”
“내가 이곳에서 몇 날 며칠을 뒹굴다 죽어버려도 네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라는 건 제국민 모두가 알고 있을 텐데. 굳이 네가 나를 빼내기 위해 에블린과 손을 잡은 이유가 뭐냐고 묻는 거다.”
아스트릴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첫째, 너를 황위에 올리겠다고 노력하는 신관을 내 밑으로 데려올 수 있지. 신관치고는 꽤나 머리가 돌아가는 작자라 말이야.”
“……펠로스를 말하는 건가?”
“둘째, 우리 대공비 전하께서 내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더군. 신전을 무너뜨리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셋째…….”
에블린의 이야기에 데반의 분위기가 다시 서늘해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싱긋 웃어 보인 아스트릴라가, 그의 뺨을 툭툭 쳤다. 데반이 짜증스럽게 그 손을 치워냈다.
“우리는 혈육이 아닌가.”
“너…….”
“자, 바보 같은 대화는 여기서 끝내지. 나는 너에게 통보를 하러 온 거지, 의논을 하러 온 게 아니니까.”
아스트릴라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데반은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다.
“네가 알아야 할 건 하나야. 우리는 신전의 약점을 잡을 거고, 그걸 빌미로 너를 빼 올 생각이다. 괜히 허튼짓하다가 일을 망치지 말란 소리를 하는 거다.”
“약점을 잡는다고?”
“에블린이 너도 알 거라고 하던데. 그 하얀 마석에 대해.”
하얀 마석……. 데반 역시 염두에 뒀던 방법이었다. 에블린에게 펠로스와 카렌을 불러 의논하라고 했던 것도 그 이유에서였고.
“코델리아인지 뭔지 하는 자도 정신을 차렸다고 하니,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야.”
“코델리아…….”
데반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코델리아가 깨어났다, 라. 예상외의 결과였다. 하얀 마석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애초에 신전이 바랐던 건 에블린이었다. 데반을 체포한 것은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그러니 코델리아까지는…….
“그래, 그 똑똑한 키베온의 말에 따르면 닷새면 일이 해결될 거라고 하더군. 너를 꺼낸 이후엔, 본격적으로 손을 잡아―”
“잠깐만.”
생각에 빠져있던 데반이 아스트릴라의 말을 뚝 끊었다.
“그 하얀 마석을 고작 나 하나 빼오는 데 쓰는 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