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96화 (96/123)

96화

“그 하얀 마석을 고작 나 하나 빼오는 데 쓰는 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나?”

“뭐?”

뜬금없는 데반의 말에 아스트릴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나 하나라니? 황궁 감옥에 갇혀 있는 자가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그 말은, 하얀 마석으로 뭔가를 더 할 수 있다는 뜻인가?”

“네 말대로 코델리아가 정말 깨어났다면, 그녀의 신력과 하얀 마석의 신력을 대조하는 게 가능하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를테면?”

“이를테면…….”

데반은 모든 힘을 잃고 하얗게 질린 에블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신전 지하에 갇힌 자들을 구하느라 그녀는 이미 많은 양의 신력을 소진했었다. 그 와중에 코델리아가 깨어났다는 건, 그 몸을 하고도 그녀가 또다시 신력을 사용했다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그렇게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에블린은 결국 모든 신력을 잃어 매우 위험한 상태일 수도 있었다.

아니, 지금까지 그녀가 위험한 상태가 아닌 적이 있었나?

알면 알수록 에블린의 인생은 위험천만했다. 어릴 때부터 신전에서, 또 백작가에서 학대와 방치를 당했고 자란 후에는 저에게 납치를 당하지 않았던가.

연고 하나 없는 엘리운에서 1년을 지내다 마물에게 습격을 당했고, 함께 제도로 향하다 또 한 번 마물을 마주해야 했다. 그 이후로도 쭉…….

데반은 지긋지긋함을 느꼈다. 에블린은 어째서 위험 속에서 살아야만 할까? 언제까지?

그러다 그는 깨닫고 만 것이다. 에블린이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날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을. 그건…….

“신전을 무너뜨리는 것.”

고요한 감옥 안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아스트릴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고작 이런 걸로 신전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고작이 아니지. 펠로스가 확실히 뭐라고 전했지?”

“코델리아가 깨어났다. 닷새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

“펠로스는 쉽게 확언하는 자가 아니야. 아주 조금이라도 일이 틀어질 가능성이 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지.”

“그래서?”

“닷새면 모든 일이 끝난다. 거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그는 닷새라는 시간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 그건 신전에서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다.”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증거……. 아스트릴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데반을 바라봤다.

“그래서 그 증거로 신전을 무너뜨릴 수 있다?”

데반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아무리 그럴싸한 증거가 나타난다 해도, 신전에서 자신들의 악행을 인정할 리는 없지.”

“그럼 도대체 어떻게 무너뜨린다는 거지?”

어느새 초조한 얼굴이 된 아스트릴라가 물었다. 데반은 그런 그녀를 여유롭게 응시했다.

“생각해 봐. 그들이 언제 악행을 인정할 것 같나?”

신전은 다른 것보다 대외적인 이미지를 중시하는 집단이다. 그런 그들이 악행을 제 입으로 인정할 때는…….

“……현장을 들켰을 때?”

“그래.”

데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을 들키는 것. 그것도 모든 제국민의 앞에서.

그게 신전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현장을―”

“지금부터 네가 할 일을 알려주지.”

“뭐?”

“여길 나가면 펠로스에게 오늘 이야기를 빠짐없이 전달해라. 아마 그라면 모든 일을 이해할 테니까.”

아스트릴라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어느새 이야기의 주도권이 데반의 손으로 넘어간 탓이었다.

“그리고 만약 내 예상대로 그가 어떤 확실한 증거를 만들고 있다면……. 그 증거에 대한 정보를 신전에 흘려라.”

“신전에 흘리라고?”

신전을 무너뜨릴 방법은 현장을 덮치는 것뿐이다, 신전에 일부러 정보를 흘린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뜻하는 건…. 아스트릴라가 미간을 구겼다.

“함정을 팔 생각인가?”

데반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어느새 그는 차가운 돌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군. 널 희생해서라도 신전을 무너뜨리라는 소리인가?”

“그럴 리가. 내가 왜 희생해야 하지?”

아스트릴라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방금 전 데반은 ‘고작 나 하나’를 구하기 위해 마석을 쓰는 건 아깝지 않느냐고 했었다.

만든 증거들로 자신을 감옥에서 구출하는 대신 신전을 무너뜨리라고. 그 소리는 최소한 일이 모두 마무리될 때까지는 감옥에 갇혀 있겠다는 게 아닌가?

그녀의 의문점을 알고 있는 듯 데반이 말했다.

“나를 빼 오는 건 닷새 후다. 펠로스가 신력이 같다는 증거를 만든 후, 이제는 쓸모없어진 하얀 마석을 이용해서.”

하, 아스트릴라가 황당한 웃음을 내뱉었다.

“하얀 마석만으로 널 빼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나 역시 처음에는 하얀 마석과 너를 교환하려고 했었지. 하지만 네 그 잘난 친구, 펠로스 키베온이 그러더군. 신전은 스스로 잘못된 판단을 했다는 걸 인정하길 죽기보다 싫어한다고.”

데반이 계속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하얀 마석만 가지고는 신전이 마물을 조종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없어. 알고 있지 않나?”

사뭇 당당하게 소리쳤으나, 데반은 여유로운 얼굴로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을 원하는 아스트릴라에게 약간의 짜증을 느끼면서.

데반은 인내심을 가지고 대꾸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를 꼬리가 있지 않은가.”

“꼬리?”

아스트릴라의 얼굴이 다시금 구겨졌다.

“펠로스의 말이 맞아. 신전이 스스로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인정하게 만드는 건 어렵지.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누명을 씌웠고, 신전은 그저 휩쓸렸을 뿐이라고 변명할 기회를 준다면?”

“신전이…… 자신들 대신 누군가를 희생시킨다는 소리인가? 누구를?”

“킬리언 디에고.”

데반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자를 이 모든 사건의 주동자로 모는 거다. 애초에 결정적 증거인 마도구 역시 그의 것이니 어렵지 않겠지.”

킬리언 디에고……. 아스트릴라는 한때 자신의 직속부관이었던 근위대장을 떠올렸다.

“왜? 부관이라고 아끼는 마음이라도 드는 모양이지?”

데반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럴 리가. 그저 그자의 성정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자가 과연 신전을 위해 희생할지 모르겠거든.”

“그자의 성정 따윈 상관없어. 신전 쪽에서 킬리언을 잘라야겠다, 판단할 테니까.”

“나보고 그들에게 제안을 하라는 소리인가? 디에고를 희생시키라고? 신전이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나? 내가 굳이 그들을 살리고 부관이었던 자를 희생시키라 제안한다면 분명 뭔가 속셈이 있을 거라고 여길 텐데.”

“누가 너보고 하라고 했지? 신전과 접촉할 사람은 따로 있다.”

“……뭐?”

아스트릴라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데반은 그녀의 시선을 빗긴 채, 컴컴한 어둠을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펠로스, 어떻게 생각해요?”

마차 안에서 나는 펠로스를 향해 물었다.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스트릴라의 부름을 받고 황궁에 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내내 그랬다.

어느새 코델리아가 깨어나고 이틀이 지났다.

“뭘 말입니까?”

“뭐긴요. 방금 황태녀 전하께서 하신 말씀 말이에요. 그 구슬에 대한 정보를 신전에 흘리라는 말 못 들었어요?”

“그 이유가 궁금하신 겁니까?”

“이유야, 뭔가 함정을 파기 위해서겠죠. 그 정돈 알아요.”

“그럼요?”

나는 답답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봤다. 내 생각을 다 꿰뚫어 보고 있을 거면서 굳이 묻는 게 뻔했다.

“그 구슬은 하얀 마석에 든 신력과 코델리아의 신력이 동일하다는, 그러니까 신전이 마물을 조종했다는 증거잖아요.”

“그래서요?”

“그건…… 그건 데반을 구하기 위한 거였잖아요! 그걸로 신전에 함정을 파면, 데반은요?”

“그것 역시 황태녀 전하께서 친히 설명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하얀 마석으로도 데반을 구하기엔 충분하다고요.”

“하지만…….”

분명 아스트릴라는 그렇게 말했고, 펠로스도 그에 동의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며칠 전에는, 아니 어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요. 자존심 센 신전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요.”

“뭐…….”

펠로스가 내 시선을 피해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펠로스!”

도대체 뭐지? 펠로스 같은 사람이 한번 내뱉은 말을 쉽게 번복할 리 없었다.

마음을 바꾼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그것도 방금 전 황태녀와 나눈 대화 중에.

나는 모르고 펠로스는 아는 것이 대체 뭐지?

“레이디.”

펠로스가 진정하라는 듯 나를 불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마 황태녀 전하께서는 저희 몰래 데반을 만나고 왔을 겁니다.”

“무슨……. 뭐라고요? 황궁 감옥에 갇힌 데반을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펠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갑자기 저런 말을 하신 거겠죠. 모두 데반의 뜻일 겁니다.”

구슬을 데반을 구하는 용도로 쓰지 말라는 게 그의 뜻이라고?

“왜요? 데반이 왜 그런 결정을 한 거죠?”

설마 그가 다시 한 번 희생을 할 작정인 걸까?

가슴이 스산해졌다. 내 앞을 막아서던 데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보내주어야 했던 무력감…….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펠로스.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도대체 저한테 더 숨길 게 뭐가 있죠?”

낮게 혀를 찬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저야 레이디한테 숨길 게 하나도 없지요. 하지만 아마도 데반은 숨기고 싶은 것 같습니다.”

“데반이 저에게 숨기고 싶어 한다고요? 뭘요? 그리고 왜요?”

“글쎄요…….”

“펠로스!”

펠로스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왜 제가 두 분 사이에 껴서……. 데반이 레이디에게 숨기고 싶어 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레이디께 미움 받고 싶지 않아서겠지요.”

“……네?”

미움을 받아? 사안의 심각성에 비해선 너무나 가벼운 이유였다.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자, 펠로스가 한숨을 한 번 더 푹 내쉬었다.

“레이디. 황태녀 전하의 마지막 말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스트릴라의 마지막 말?

‘신전과 접촉해 협상을 진행하는 건 에블린 디에고, 네 몫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