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이렇게 헐레벌떡 뛰어나와 얼굴을 비춰주시니 말입니다. 하얀 마석을 숨기고 싶어 안달복달하시는 게 아니라면, 아주 상냥한 성격이신 거지요.”
웃으며 내뱉은 가시 돋친 말에 신관의 얼굴이 아무렇게나 일그러졌다.
그의 뒤쪽에 서 있는 두 명의 신관도 몸을 바짝 긴장시키는 게 보였다. 명령만 떨어진다면 당장이라도 기다란 신관복 아래에 숨긴 검을 휘둘러 날 벨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쪽도 마찬가지였다. 돌아보지 않아도 카렌이 온몸으로 위압감을 내뿜고 있는 게 느껴졌으니까.
겨우 표정을 갈무리한 신관이 말했다.
“설마……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얀 마석을 입에 올리신 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건가요?”
“그저 제대로 된 절차를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신관이 살기 가득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오히려 몸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근거가…… 있다면 어떨까요? 제대로 된 증거가 있다면요?”
신관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내가 마석을 가지고 있을까 봐 두려운 눈치였다.
“스스로의 말에 책임지셔야 할 겁니다.”
나는 신관을 똑바로 응시하며, 품 안에 든 하얀 마석을 남몰래 꾹 쥐었다.
지금 이걸 보여준다면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마석만 빼앗긴 채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것이고, 제대로 진행된다면…… 데반을 구하는 대신 킬리언이 죽을지도 몰랐다.
불현 듯 결혼식장에 들이닥쳤던 킬리언의 모습이 떠올랐다. 피 칠갑한 얼굴 사이로 보였던 광기 어린 눈동자가.
긴장으로 떨리던 손도, 빠르게 뛰던 심장도 점차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마치 그의 존재가 내게 별 것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것처럼.
그와 동시에 내 마음속 한 켠에 남아 있던 망설임의 이유를 깨달았다.
아무런 악의도 느껴지지 않던, 순수하게 빛나는 진녹빛 눈동자.
그래, 내가 정말로 두려워한 건 이런 것이었다.
나는 킬리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이 일을 망설이는 게 아니었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일이 성공해 데반이 별궁으로 돌아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돌아온 그가…… 코델리아와 사랑에 빠질까 봐.
‘레이디가 킬리언 디에고를 떠올리는 것 그 자체가 싫었을지도요.’
데반이 정말로 그런 걸 원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펠로스의 말대로 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킬리언의 목숨을 손에 쥐고 쥐락펴락하면서도 내 머릿속엔 온통 그에 대한 생각뿐이었으니까.
웃기게도 나는 여기까지 와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곤, 품 안에서 하얀 마석을 꺼냈다. 그리곤 그걸 보란 듯이 신관의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어…… 어떻게!”
경악과 공포로 물든 얼굴을 하고선, 신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정도면 책임은 충분하겠죠?”
신관을 올려다보며 나는 내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데반이 돌아오는 게 두려운 만큼, 코델리아에 대한 질투심이 강해지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데반을 구하고 싶었다. 당장 그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 싶었다. 냉정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꽤나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데반이 보고 싶었다. 그와 닿고 싶었다.
그 단 하나의 감정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를 구해야 했다. 설령…… 돌아온 그가 코델리아와 사랑에 빠질지라도.
*
신전과의 협상은 무사히 끝났다. 신관은 하얀 마석을 실제로 마주한 뒤부터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나는 그들에게 하루의 유예기간을 줄 테니, 그동안 데반을 감옥에서 빼 오라고 했다. 그가 안전한 걸 확인한 후에 마석을 넘겨주겠다고.
신전은 내가, 펠로스가, 아스트릴라가, 그리고 어쩌면 데반이 예상했던 대로 움직였다.
킬리언이 이 모든 일의 주동자라고, 결혼식을 망칠 만큼 나와 데반에게 악의를 품은 그가 누명을 씌운 거라고 주장했다.
모든 게 단 하루 만에 이루어졌다. 마침내 데반이 잡혀간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응접실 테이블에 앉아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렸다. 펠로스와 카렌이 마석과 데반을 교환하러 나간 참이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잘 진행될까? 교환을 하는 도중에 그들이 다른 속셈을 먹으면 어쩌지? 함정을 파면? 그래서 데반이 위험해진다면…….
“괜찮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마님.”
테이블 옆에 서서 차를 따라주던 유니스가 나를 다독였다. 그녀의 존재마저 잊고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싱긋 웃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무사히 돌아오실 거예요! 신관님이 알아서 하신다고 했으니까요.”
“……그래.”
유니스가 말하는 신관님이란 펠로스였다. 둘은 함께 보석상 보수를 마치고 돌아온 이후로 꽤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평민임에도 글을 읽을 줄 아는 유니스는, 내 예상보다 더 책이나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때문에 그녀는 아는 게 많고 영리한 펠로스를 동경하는 듯했다. 누군가 떠받들어 주는 걸 즐기는 펠로스 역시 그런 그녀가 싫을 리 없었고.
“신관님이 그러셨잖아요. 마도구를 사용해 교환을 진행할 거라고, 그 마도구로는 절대 거래가 실패할 수 없다고요!”
“뭐, 그렇긴 하지만…….”
“여기, 차나 한 잔 더 하세요. 조금 진정이 되실 거예요!”
유니스가 능숙하게 차를 따라 내게 내밀었다. 그제야 긴장 탓인지 목이 따가울 정도로 건조해진 것이 느껴졌다.
유니스의 말이 맞았다. 걱정한다고 달라질 일도 아니었고, 나보단 이런 일에 능숙한 펠로스가 알아서 하겠지.
애써 마음을 진정하고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는데, 정중한 노크소리가 들렸다.
설마……. 곧장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들어와요.”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실제로는 몇 초도 되지 않을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지고, 마침내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문을 꽉 채울 것 같은 커다란 키였다. 그다음엔 새까만 머리카락이었고, 그다음엔 붉은 눈동자……. 그다음엔…….
“데반!”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에게 달려가 안긴 뒤였다.
“에블린.”
따스하고 넓은 가슴팍이 느껴지고,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름이 불린 것과 동시에 심장이 아래로 녹아드는 기분이 들었다.
잠깐 멈칫한 데반이 이내 내 허리를 단단히 받쳤다.
“이런 열렬한 환영이 있을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올 걸 그랬나.”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가슴팍에 묻혀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군.”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건지. 감옥에 갇혀있던 건 자신이면서 데반은 꼭 내 안색을 살피듯 이리저리 뜯어봤다.
그 핑계로 나 역시 데반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데반은 한눈에 보기에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살이 빠진 건지 안 그래도 날카롭던 턱선이 더욱 도드라졌고, 눈 아래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그러나 입가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괜찮은 거예요?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데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 믿음직스럽지 않아,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데반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살펴봤다.
“너야말로 괜찮은 건가? 안색이 좋지 않은데.”
“그야 당연히……!”
“당연히?”
“…….”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떨궜다. 당신이 없는데 어떻게 안색이 좋을 수가 있느냐고, 무의식중에 말할 뻔한 탓이었다.
“에블린?”
“그냥… 다친 곳 있으면 꼭 말하라고요. 신력으로 치료해줄 수 있으니까….”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리자, 데반이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도닥였다.
“안 그래도 묻고 싶었는데 신력은 괜찮은 건가? 그자를 깨웠다고 들었는데. 코델리아였나.”
순식간에 몸이 차갑게 식었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지만, 그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데반이 돌아왔다는 건, 그와 코델리아가 언제라도 마주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대답하지 않고 있자, 데반이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쳐 왔다. 핏빛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했다.
“역시 몸이 안 좋은 건가? 그때 신력을 많이 소진했던 것 같던데, 그자까지 깨운 거면 네 몸이…….”
“언제까지 문을 막고 있을 생각인 거지?”
그 순간, 데반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심드렁한 얼굴의 펠로스가 데반의 옆으로 얼굴을 삐죽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옆에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노집사도 있었다.
“……펠로스?”
“예, 레이디. 감동적인 재회를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가만히 있다간 아주 몇 날 며칠이고 껴안고 계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차츰 인식이 되기 시작했다.
유니스에, 집사에, 펠로스까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정말로 신혼부부라도 되는 양 데반을 껴안은 것이다.
팟― 서둘러 데반의 가슴팍을 밀치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데반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구겼다.
“제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나 봅니다. 서러워서 이거 원.”
마침내 데반을 밀어내고 방 안으로 들어온 펠로스가 과장되게 슬픈 표정을 지었다. 차마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데반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하지, 펠로스 키베온.”
“더 할 생각도 없었는데?”
펠로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예의 심드렁한 얼굴로 돌아왔다. 어느새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그는 유니스와 다정하게 인사를 주고받더니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신경 쓸 것 없어, 에블린.”
어느새 다시 다가와 부드럽게 내 팔목을 붙든 데반이 답지 않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얼굴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부끄러운 걸 떠나서, 스스로의 행동에 의문이 생겼다.
내가 도대체 왜 그랬지? 왜 껴안아선……. 생각해보면 떨어진 지 고작 닷새일 뿐인데. 몇 주 간 떨어져 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지 않았던가.
아니, 애초에 왜 그렇게 보고 싶었던 건지. 뭐가 그렇게 초조했던 건지…….
“에블린?”
의아함과 걱정을 품은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데반을 이토록 걱정했던 것도, 모든 감정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를 구하고 싶었던 것도, 지금 이렇게 벅차오르는 것도 모두 내가 그를…….
그 순간, 응접실의 문이 다시 한번 벌컥 열렸다.
“아……!”
반가움을 품은 가냘픈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