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03화 (103/123)

103화

“신전이 유니스를 조종하기 전에, 제가 먼저 한다면요?”

그렇게만 된다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펠로스가 외쳤다.

“그러면 신전의 조종이 먹히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아니, 그뿐 아니에요! 제가 만약 유니스에게 누구의 명령도 듣지 말고 스스로의 의지로 맡은 일을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요?”

내 목소리 역시 점차 격양되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신전의 조종에 걸릴 리 없겠군요. 이미 받은 명령과 상충되니까요!”

우리는 감격스럽기까지 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정말로 이거라면, 유니스가 조종당하지 않게 만들 수도 있었다.

“레이디, 정말이지……!”

흥분에 방방 뛰던 펠로스가 꼭 껴안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뻗었다.

순간, 그 사이를 막아내듯 커다란 손바닥이 내 눈앞을 가렸다. 익숙한 기다란 손가락의 주인, 데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데반?”

“둘 다 진정해. 아직 에블린이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지 어떤지, 또 그게 몸에 무리를 가게 하는 건 아닌지 아무것도 모르지 않나.”

분명 난항에 빠져있던 문제의 돌파구를 찾아냈음에도 데반의 얼굴은 어쩐지 불만스러워 보였다.

펠로스가 들으라는 듯 푸핫, 웃음을 터뜨리더니 나에게 속닥였다.

“추잡한 사내의 질투가 또 등장했군. 신경 쓰지 마십시오, 레이디.”

“펠로스!”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뭐, 하지만 일견 맞는 말이긴 합니다. 일단 레이디가 정말로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지 알아내야 해요. 그리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지도.”

데반이 끼어들었으나, 펠로스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고 두 개의 명령이 상충될 때 앞선 명령을 따르는지, 혹은 뒤의 명령을 따르는지도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

새로운 명령이 들어오면 앞선 명령이 모두 리셋되는 형식일지도 몰랐다. 일리 있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우리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흐음…….”

펠로스가 나와 유니스를 바라보다 말했다.

“역시 실험을 해보는 수밖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얀 마석은 이미 신전에게 넘겼잖아요. 실험을 할 수 있을 리가…….”

척, 펠로스가 검지를 까딱였다.

“신력을 쓸 수 있다면 하얀 마석은 필요 없는 게 아닙니까.”

설마…….

“그리고 지금 이 별궁 안에 신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둘이죠.”

음흉한 얼굴로 웃고 있는 펠로스를 보자, 영 좋지 않은 직감이 들었다.

*

직감은 적중했다.

그 이후로 별다른 소득 없이 연회가 끝나고 바로 다음 날.

펠로스는 실험을 위해서라며 나와 유니스, 그리고 코델리아를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것도 평소엔 카렌과 병사들이 훈련하는 연무장으로.

“싸울 것도 아니고. 굳이 이런 흙먼지나 날리는 곳에 부른 이유를 모르겠군.”

그곳에는 왜인지 데반도 함께였다.

“자네를 부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부부가 함께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자네는 결혼 서약도 모르나?”

결혼의 당사자인 나 역시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결혼 서약을 들먹이며, 데반이 내 옆에 붙어 섰다.

“에블린, 다시 한번 말하지만 혹시나 몸에 무리가 가는 것 같으면 바로 중지해.”

“괜찮대도요.”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알아서 판단하지.”

신전에 잠입할 때 신력을 쓰다 쓰러지는 걸 봐서인지, 데반은 어제부터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영 미심쩍은 건지, 내 안색을 집요하리만치 살피곤 했다.

걱정해주는 건 물론 좋았지만, 좋은 만큼 신경 쓰이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코델리아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어쩐지 조금…….

눈치를 보며 슬쩍 뒤로 몸을 물렸다.

“신관님, 그래서 실험은 어떻게 하는 거죠?”

본인이 실험체라는 걸 알긴 하는 건지, 유니스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물었다. 헛기침을 한 번 한 펠로스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건 뭐어……. 레이디 두 분께서 알아서 하셔야죠.”

“……네?”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자, 펠로스가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제가 신력을 감지하는 데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거기에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만…… 신력을 직접 사용하지는 못해서요.”

“결국 아무것도 모른다는 소리군요?”

정곡을 찔린 듯 펠로스는 대답 대신 딴청을 피웠다.

“그나저나 제가 직접 구슬 운반책을 하면 좋을 텐데요. 조종당하는 기분도 느껴보고 싶고 말입니다. 얼굴이 너무 알려져 있어서 아쉽군요. 하긴, 제 얼굴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얼굴이라.”

쓸데없는 소리만 지껄이는 펠로스 대신, 나는 곁눈질로 코델리아를 슬쩍 바라봤다.

분명 펠로스가 설명을 했다고 들었는데, 그녀는 제가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편한 건가? 하긴……. 저만 빼고 모두 아는 사이인 데다, 데반은 아직 그녀에게 싸늘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으니. 그다지 편한 자리는 아니리라.

“저기, 펠로스.”

잠시 고민하다, 나는 유니스에게 무어라 떠벌리고 있는 펠로스를 불렀다.

“예, 레이디.”

“아무래도 우리 셋만 남는 게 좋겠어요.”

“예?”

“뭐?”

데반까지 홱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눈동자에 원망이 서린 것 같기도 했다.

“펠로스도 딱히 방법을 아는 건 아니잖아요. 솔직히 방해만 돼요. 저랑 코델리아, 그리고 유니스만 있으면 충분하다고요.”

“하지만 에블린,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거나―”

“데반.”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데반에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고,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여긴 연무장이라 바로 옆에 카렌이 있잖아요.”

“카렌 녀석은 둔해서 나처럼 빠르게 상황을 파악할 수 없을 거다. 네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네가 신력 때문에 내 앞에서 쓰러진 게 몇 번인지 알고 하는 소리인가?”

데반은 심지어, 아주 오래 전 대공 저에서의 일까지 꺼내고 있었다. 내가 그의 저주를 치료할 때마다 픽픽 쓰러졌던 일을.

“그건…… 그건 이유가 있어서 쓰러졌던 거잖아요. 힐다 때문이었다고요!”

“알게 뭐지? 내가 아는 건, 네가 신력을 사용하고 끝이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뿐이다.”

“데반!”

“그래, 생각해보니 스스로 손을 그은 적도 있었지. 넌 네 몸을 너무 혹사시키는 경향이 있어.”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내버려 뒀다간 첫 만남부터 줄줄 읊을 작정인지도 몰랐다.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그를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다, 나는 다시 한번 설득을 시작했다.

“우리끼리 집중하는 편이 더 빨리 끝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신력을 사용하는 건 누군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요.”

데반의 미간이 곱게 찌푸려졌다. 그는 몇 번 더 다른 핑계를 찾을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데반. 중요한 일이잖아요. 집중하게 해줘요.”

진심을 담아 부탁하자, 마침내 데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러더니 이내 제 필요성을 설파하는 펠로스까지 끌고 연무장에서 사라졌다.

뙤약볕이 내리쬐고 흙먼지가 날리는 연무장에 마침내 나와 코델리아, 유니스만이 남았다.

“어……. 마님, 양산이라도 가져올까요?”

유니스가 멋쩍은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 차라리 모두 저쪽에 가서 앉는 게 좋겠구나.”

연무장과 정원 사이에 있는 가제보를 가리키자 유니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코델리아는 연무장에 온 이후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를 순순히 따라왔다.

“그럼 차라도 준비해올까요?”

실험체인 주제에 쓸데없이 의욕적인 유니스는 가제보에 도착해서도 가만히 앉아 있질 못했다.

“으음…….”

차를 마실 기분은 아니었지만,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구나.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니까.”

“예, 마님!”

씩씩하게 대답한 유니스가 빠르게 자리를 떴다. 이제 가제보에 남은 건 나와 코델리아뿐이었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나는 여전히 서 있는 코델리아에게 말했다.

그녀는 어색한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선선한 바람이 우리 둘 사이를 가로지르며 불어왔다. 코델리아의 얼굴에 나뭇잎의 그림자가 비쳐 진녹빛 눈동자가 신비로운 빛깔로 반짝거렸다.

처음 신전에 갇혀 있는 걸 봤을 때만 해도, 살집 하나 없이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별궁에 온 뒤로 충분한 영양을 섭취한 탓인지 그녀의 상태는 훨씬 좋아 보였다.

아마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원작에서 묘사된 모습과 똑같아지겠지.

내가 떠나면, 코델리아가 대공비가 될 테니까.

나와 데반이 했던 명목뿐인 결혼이 아닌 진정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결혼을 하겠지. 그 후엔 제대로 된 대공비로서 이 별궁의 안주인이 되리라.

데반의 억지로 겨우 정원을 관리한 나와는 달리 그녀라면 별궁 이곳저곳을 화사하게 꾸밀 수 있을 것이다.

겨우 구색만 갖춘 드레스나 장신구들도 다양하게 사들일 테고, 별궁에는 매일 연회가 열리겠지.

나는 무얼 하고 있을까. 엘리운의 평범한 레아로 살아가고 있을까?

예정돼있을 미래가, 바꿀 수 없는 운명이 심장에 콕콕 박혔다.

“……미안해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겨우 말을 꺼냈다. 코델리아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자꾸 피한 거요.”

유니스를 부러 보낸 건 코델리아와 둘만 남기 위함이었다.

더는 그녀를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를 향한 질투는 전혀 희석되지 않았지만, 길고 긴 시간을 돌아 겨우 만나게 된 두 사람을 위해…… 이제는 내가 물러서야 할 차례였으니까.

잠시 말을 고르던 코델리아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당신도…… 신전에서 자랐다고 들었어요. 펠로스라는 신관한테서요.”

“……맞아요.”

“나를 꼭 구해야 한다고 했던 것도 당신이라고……. 그러니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그녀의 곧은 시선이 나를 떠나 하늘로 향했다.

“우린 둘 다 상처를 가지고 있잖아요. 신전에서…… 그곳에서 어떻게 자라났는지 알 수 있는 것도 이제는 우리뿐이고요.”

입술을 꾹 짓씹었다. 신전에서 함께 자랐던 아이들은 모두 죽었다. 남은 건 그녀의 말대로 우리 둘뿐이었다.

“말한다고 전해지지 않는 상처니까…….”

코델리아의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휘날렸다.

“그래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많은 위안이 됐어요. 그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요.”

“코델리아…….”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울컥거렸다. 그녀가 다시 나를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목이 메어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전할 수 없는 상처를 공유하듯,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복잡한 감정도 그녀의 마음으로 전달되길 바라며.

그와 동시에 나는 내가, 처음으로 코델리아를 살아 숨 쉬는 사람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원작의 여주인공이나 예언의 주인공처럼 정해진 역할이 아닌 자신의 상처로부터 벗어나고자 발버둥칠 뿐인 사람, 그 자체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