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전 근위대병에게 고한다. 당장 신관들을 잡아들여라!”
수많은 병사가 우르르 나타나 순식간에 신관들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신력을 내뿜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정말로 이대로 끝나는 건가? 긴장으로 쿵쾅거리는 심장이, 어쩐지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을 거라는 직감을 느끼게 해줬다.
지금까지는…… 모든 게 예상한 대로인데.
‘유니스를 조종하지 못하게 된 그들은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결국 흑마법을 쓸 수밖에 없을 겁니다.’
펠로스의 자신만만하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의 말대로 조종이 불가능해지자, 대신관은 마침내 흑마법을 사용했다.
‘현장을 잡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들이 안심하고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모든 게 거짓이었다. 응접실도, 복도도, 벽도. 그들은 처음부터 단상 위에서 놀아난 것이다.
수많은 제국민이 보는 앞에서 저희들의 추잡한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들이 쌓아온 역사로 인해, 그들은 무너질 겁니다. 이 제국에 흑마법을 악의 근원으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니까요.’
펠로스의 자신만만하던 표정이 이해됐다. 모든 게 그의 말대로 이루어졌고, 이제는 마무리만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걸로 끝인가?
그토록 오랜 시간 나를, 코델리아를, 전 제국을 마음대로 주물렀던 신전이 이렇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신력으로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내 옆에 선 데반 역시 검을 뽑아 든 채 빈틈없이 그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근위대병들이 대신관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불과 몇 분 전, 대신관이 흑마법을 사용한 걸 목격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대신관은 흑마법을, 그 힘을 사용하기 위해 검은 마석이 필요한 것 같아요.”
소곤거리며 말하자 데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마석을…… 어떻게 만들어낸 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품 안에 몇 개 더 숨겨뒀을지도 몰라요.”
“그래, 괜찮아. 방심하고 있지 않으니까.”
카렌의 말에 따르면 그의 검술은 굉장히 뛰어났지만, 검술로 흑마법을 이기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곁눈질했다.
“하지만 데반…….”
“대신관이 너처럼 힘을 사용할 수 있으면 모를까, 마석을 이용하는 거라면 승산은 없다. 그가 마석을 바닥에 내리치기 전, 팔을 베어버리면 그만이니까.”
데반이 검을 고쳐 잡았다. 마석을 내리치기 전……. 하지만 정말로 마석을 깨뜨려야만 사용할 수 있는 걸까?
확실히 하얀 마석으로 마물을 조종할 때는 직접 그 대상과 접촉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검은 마석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우리는 검은 마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까.
괜한 걱정일 수도 있지만, 내 시선은 자꾸만 데반에게로 향했다. 혹시나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단순히 데반을 향한 내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아니 최소한 내가 알기론 이 제국에서…… 대신관을 상대할 수 있는 자는 나뿐이었으니까.
다시 태어난 이후로 내 안의 신력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무한하게 느껴졌다.
신력을 아무리 많이 사용해도 육체적 피로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니 지금 네 사람분의 보호막을 만들면서도 멀쩡한 거겠지.
만약 대신관이 아까처럼 이곳 전체에 흑마법을 사용하려고 한다면, 내 신력으로 모든 사람을 보호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니 내가 해야 했다. 대신관이 무사히 사로잡힐 때까지 그를 상대하는 건 내가 돼야 했다.
잔뜩 긴장한 채 대신관을 노려봤다. 검은 마석을 몇 개 더 가지고 있을까. 하나? 둘? 혹은 그 이상?
비록 무한하게 느껴진다고는 하나 내 신력이 정말로 무한할 리는 없으니 분배를 잘해야 했다.
흑마법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신력을…….
중얼거리며 계산하고 있는데, 순간 대신관이 손을 움직이는 게 보였다.
“으아아!”
그리고 그와 동시에 대신관이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노리는 건 나……. 아니, 데반?
이렇게 막무가내로 다가올 거라고도, 또 데반을 노릴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내 반응은 몇 초 느렸다.
거기에 대신관은 나이를 생각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데반의 주위로 신력을 쏟아부었다. 다행히 늦지 않아, 대신관이 도착하기 전에 두꺼운 보호막이 만들어졌다.
이 정도라면 검은 마석을 어떻게 하든 괜찮…… 뭐?
대신관은 검은 마석을 바닥에 내던지지 않았다. 내던지기는커녕 마석이 마치 검이라도 되는 양 손에 꽉 쥔 채 앞으로 쭉 뻗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마석은 그대로 내 보호막을 통과했다.
“잠깐, 안 돼!”
마석이, 마석을 쥔 대신관의 팔이 그대로 보호막 안으로 들어왔다. 빠르고 깊숙하게.
보호막이 막을 수 있는 건 신력과 같은 폭발적인 힘이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공격해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데반……!”
당황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막아야 한다. 그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몸을 던졌고, 정신을 차렸을 땐 데반의 앞을 가로막은 뒤였다.
대신관이 달려들고, 내 보호막을 뚫고, 내가 데반의 앞을 가로막기까지…… 모든 일이 찰나에 이루어졌다.
검은 마석은 그대로 내 몸을 향해 돌진했다.
닿는다, 죽는다.
대신관의 크게 뜨인 눈에 희열이 비쳤다고 생각한 순간,
파앗―
무언가가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소리도 눈에 띄는 모습도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뭔가가…….
“이게 무슨!”
탁― 바닥으로 대신관이 쥐고 있던 마석이 떨어졌다.
분명 방금까지 새까만 색이었던 그것은 어느새 검은 기운이 모두 빠져 나가 하나의 돌덩이처럼 보였다.
이게…… 뭐지?
내 몸에 닿아서 이렇게 된 건가?
모두가 당황해서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잡아요! 대신관을 잡아요!”
코델리아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느새 다시 나를 막아선 데반이 재빨리 검을 대신관의 목에 겨눴다.
“크, 크윽…….”
잔뜩 들이밀어 진 검날에 대신관은 목을 최대한 치켜들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마석과 대신관, 그리고 내 몸을 둘러볼 뿐이었다.
내 신력이…… 검은 마석을 정화한 건가?
“이건 불가능해……!”
대신관이 이를 악문 채 고함쳤다. 나는 그의 손이 품이 넓은 하얀 신관복 소매 안에서 꿈틀거리는 걸 눈치챘다.
“데반! 또 마석을 꺼내려고 하고 있어요!”
데반의 동작은 누구보다 빨랐다.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두르더니, 그는 정말로 대신관의 팔을 베어 버렸다.
“으아, 으아아악! 팔, 내 팔!”
순식간에 떨어져 나간 제 팔목에 대신관이 괴성을 내질렀다. 그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닥쳐. 목까지 떨어져 나가고 싶지 않으면.”
데반의 검이 그의 목을 더욱 파고들었다.
“끄윽, 끅…….”
고통으로 새하얘진 얼굴을 하고서도 대신관은 차마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핏발이 가득 선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 역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로…… 팔을 베어버리다니.
“근위대병.”
데반이 낮은 목소리로 명하자, 섣불리 다가올 생각을 하지 못하던 근위대병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몸수색을 샅샅이 해라. 또 숨겨둔 게 있을지 몰라.”
“……예, 전하!”
근위대병들이 대신관의 몸을 빠짐없이 더듬었고, 그 안에서 하얀 마석 하나와 검은 마석 하나, 여러 마도구를 찾아냈다.
“팔…. 내 팔을….”
대신관은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제 팔을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에블린.”
뒤를 돌아본 데반이 나를 불렀다.
“끔찍하겠지만…….”
“아……. 네!”
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빠르게 눈치챘다. 처음부터 내 신력을 믿고 있었던 거구나.
피가 떨어지는 대신관의 팔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얼마 안 가 새하얀 빛이 그의 팔을 감싸고, 떨어져 나갔던 팔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끄으……. 흐…….”
그러나 고통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 대신관은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는 모든 전의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만. 완벽하지 않은 채로 끝내지.”
그의 상처가 거의 아물어 갈 무렵, 데반이 내 손을 붙잡았다.
“사지가 멀쩡했다간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하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신력을 내보내는 것을 멈췄다. 대신관은 공포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데반은 단호했다.
“끌고 가라.”
“예, 전하!”
근위대병 여럿이 대신관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꽁꽁 포박했다. 다른 신관들은 이미 붙잡힌 뒤였다.
“괜찮을까요?”
“근위대병들도 그렇게 얼간이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본보기도 보여줬고.”
힘없이 끌려가는 대신관의 뒷모습을 보다, 나도 모르게 힘이 빠져 데반의 팔뚝을 붙잡았다.
“괜찮나? ……미안하군. 말도 없이 끔찍한 짓을 해서. 사지를 빠르게 봉인할 방법이 그것뿐이라.”
“……괜찮아요.”
갑자기 떨어져 나간 팔에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데반의 판단이 옳았다.
대신관이 다시 검은 마석을 꺼냈다간 누군가가 희생됐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럼 정말로…… 끝, 난 건가요? 이렇게…….”
겨우 몸을 일으키며 말하는데, 그 순간―
“……와아!”
누군가의 커다란 환호성이 들렸다.
“와아아! 와아!”
그러더니 이내 광장 전체를 함성이 가득 채웠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