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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15화 (115/123)

115화

“에블린, 에블린. 괜찮아요?”

자리에서 일어난 코델리아가 나를 가볍게 흔들었다.

“코델리아…….”

“그래요, 나예요.”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라보자, 그녀가 내 손을 붙잡으며 눈을 맞춰 왔다.

“괜찮은 거예요?”

그 진녹빛 눈동자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여전히 원작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원작에서의 묘사가 먼저 떠올랐는데.

모진 학대를 견뎌온 작은 체구, 햇빛조차 통과할 것 같은 새하얀 피부, 풍성하게 어깨를 타고 흐르는 갈색 머리칼, 에메랄드 보석처럼 반짝이는 진녹빛 눈동자…….

지금은 그런 것들이 아닌 그저 코델리아라는 인간 자체가 보일 뿐이었다. 내가 직접 겪은 코델리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기억을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더욱더 원작이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뭐지? 그저……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기 때문인가?

“에블린…….”

코델리아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는 내가 죄의식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아니, 아니에요. …난 괜찮아요. 잠깐 당황했을 뿐이에요. 신전은… 신전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더듬거리며 말하자 코델리아가 다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제 의자를 끌고 내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앉았다.

“에블린, 난 에블린이 애초에 무엇을 사과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말했다시피 내가 당신 입장이었어도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했을 거예요. 그게 정해진 이야기라고 할지라도요.”

“아니에요, 코델리아. 그런 이야기가…. 달라요. 내가 당신의 자리를 빼앗았단 말이에요. 나 때문에 당신이… 신전에서 오랜 시간 고통받을 걸 알면서도요.”

코델리아가 미간을 지그시 찌푸렸다. 그녀는 아직 내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었다면 당신은 그런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었어요. 신관들에게 그런―”

“그랬다면 당신이 죽었겠죠. 아닌가요?”

“그건…….”

“그리고 당신 역시…… 백작가에서 모진 학대를 당했다고 들었어요. 당신의 말대로 백작가에 내가 입양됐어도, 당신이 받았던 고통을 그대로 받지 않았을까요?”

물론 원작대로 흘러갔다면, 내가 받은 학대와 방치를 그녀가 대신 겪었으리라. 하지만…….

“달라요. 나는 최소한 이삼 년은 먼저 그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요. 데반에게 열여덟에 납치당해서…….”

코델리아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삼 년 더 고통을 받았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에블린 당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면 별로 손해 보는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코델리아……. 그건, 그건 아니에요. 나는 이기적인 선택을 했어요. 당신은 나를 용서해선 안 된다고요.”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리자 그녀가 이번엔 내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용서를 빌고 있는 건 난데, 꼭 그녀가 날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에블린. 그렇게 말해도 나에겐 크게 와닿지 않아요. 신이니 시간이니 그런 것도 잘 모르겠고요.”

“그건―”

“설명을 더 해달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내 말은…….”

코델리아의 시선이 잠시 정원 끄트머리로 향했다. 정원의 끝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너머가 보이기라도 하는 듯, 꽤 오랜 시간 그곳에 시선을 두었다.

말을 고르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에게는 이게 내 인생이에요.”

“…….”

“이제 와서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다고 한들 잘 상상이 가지도 않고, 내 것을 빼앗겼다는 기분도 들지 않아요. 가져본 적이 없기에 그런 걸까요?”

다시금 나를 바라본 코델리아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에블린, 당신은 나를 구해줬고, 그 덕에 나는 지금 여기 있어요.”

“그건 모두 내 죄책감 때문에…….”

“거기에 우리는 신전을 물리쳤잖아요. 당신이 말한 그 이야기와 지금이 뭐가 다르죠? 아니, 오히려 지금이 더 낫지 않나요? 그 이야기 속에서 신전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면서요.”

“아뇨, 아니에요. ……다르단 말이에요.”

“도대체 뭐가요? 지금의 나는 충분히 행복한걸요.”

코델리아의 목소리에는 꾸밈이 없었다. 나를 위로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런 것처럼.

하지만 그걸 마냥 받아들일 순 없었다. 그녀에게 속죄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가 아직 남아 있었으니까.

“……데반이요.”

“네?”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겨우 말을 이었다.

“당신은…… 데반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었어요. 대공비는 코델리아 당신이었다고요. 하지만 그것조차 내가 빼앗은 거예요. 당신은 막대한 부와 권력과―”

하하, 코델리아가 터뜨린 작은 웃음소리가 내 말을 뚝 끊었다.

“에블린. 그럼 뭐해요. 지금의 나는 대공 전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걸요. 그분도 마찬가지고요.”

“…….”

“부와 권력은 애초에 바란 적도 없고요.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우리에게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아…….”

따스한 눈동자가 잘 알지 않느냐고 물어왔다. 말로 전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우리는 그 고통 속에서 살아남았다. 돈이나 권력 따위를 중요하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가 원했던 건 그저 삶이었으니까.

그 누구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삶, 그로 인해 우리의 마음속 어딘가에도 두려움이 숨어 있지 않은 삶.

디에고 백작은 죽었고, 신전은 무너졌다. 우리의 지난 삶 대부분을 고통으로 갉아먹은 이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얼이 빠진 채 그녀를 바라보자 코델리아가 입가에 작은 미소를 걸었다.

“에블린, 당신의 말을 전부 이해하진 못했지만, 아마 다 이해하게 되더라도 내 마음은 같을 거예요. 당신은 나에게 사과할 필요 없어요.”

“코델리아…….”

“사과해야 할 건 다른 이들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우리의 분노는 안이 아닌 밖을 향해야 한다는, 오래전 했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도 통 잠이 오질 않았다. 건국제 이후로 내내 그러긴 했으나 오늘은 유독 심했다.

코델리아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특히나 그 한 마디가.

‘지금의 나는 충분히 행복한걸요.’

행복이라.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코델리아가 나를 용서해 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스스로의 행복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행복……. 지금까지 나에게 행복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감히 꿈꿔본 적도 없었다.

코델리아와 헤어진 이후에, 나는 약속대로 펠로스에게 편지를 썼다. 힐다와 그 힘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적은 편지를.

그렇게까지 하자, 더는 이곳에 남아 있을 핑계가 없었다.

신전을 무너뜨렸고, 코델리아에게 모든 걸 고백했다. 펠로스에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전부 말했으니 혹시라도 필요할 때가 생긴다면 그가 알아서 해 주리라.

이제는 떠날 차례였다.

하지만…… 정말로 이대로 떠나도 되나? 아직 대신관은 죽지 않았고, 신전도 무너지지 않았다.

귀족파가 이긴다면 그들도 똑같이 신전의 탈을 쓴 채 또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게 아닌가.

거기에 아스트릴라가 황위에 오르는 것도 직접 보고 싶었고, 건국제 이후로 데반과 제대로 말 한마디 나눈 적도 없는데.

떠날 때 떠나더라도 얼굴 한 번, 말 한마디 정도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지저분한 미련만 덕지덕지 붙었다.

사실은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 꿈같았던 하루처럼, 내내 데반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 자리가 내 자리인 것처럼 뻔뻔하고 이기적으로. 그러면…… 안 되는 걸까? 그러면…….

입술을 아프도록 짓씹는데, 그 순간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유니스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의아함과 함께 경계심을 품은 채 방문을 바라보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블린, 들어가도 되겠나?”

“……데반?”

습관처럼 내뱉은 이름에 문이 열렸다. 창문을 넘어온 달빛이 방문까지 흠뻑 쏟아졌다.

꼭 그가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정말로…… 데반인가?

“아직 안 자고 있었군.”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데반은 조금 수척해졌지만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인지 퍽 기분이 좋아 보였다.

“데반, 이 시간에 무슨…….”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

“나와 산책을 해주지 않겠나.”

에스코트라도 하듯 우아하게 뻗어진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생각지도 못한 부탁에, 정원을 거닐면서도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하늘에는 밝은 달이 떠 있었고 어두운 정원을 비추는 것은 작은 조명들뿐이었다.

꼭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떠나기 전에 딱 한 번만 보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그도 그럴 게 데반은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웠고, 또 다정했다.

“춥겠군.”

“아니, 괜찮…….”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재킷을 벗어 입혀줄 정도였다. 익숙한 손길로 단추를 잠가 줬을 때는 절로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저기 데반……. 일은 다 끝난 거예요?”

“일?”

“황태녀 전하의 일을 돕고 있다고…….”

“아아…….”

데반이 심드렁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일이니까. 아스트릴라가 포기해야 끝나는 거라서.”

포기라니?

“포기를 해야만 끝난다는 건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거군요? 만약 그렇게 되면 귀족들이 노리는 대로 신전이…….”

대뜸 심각해져서 묻는데, 데반이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에블린.”

“……네?”

“그러고 보니 정원 한구석에 날 위한 선물을 준비해 뒀다고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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