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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22화 (122/123)

122화

“마님! 마님!”

별궁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제일 먼저 반긴 건 유니스였다.

그녀는 넘어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헐레벌떡 달려 나오더니, 나를 부여잡고 엉엉 울다시피 했다.

“마니임! 도대체 어딜 갔다 오신 거예요!”

그제야 그녀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짐작이 됐다. 나를 마지막으로 본 것도, 편지를 쓸 종이를 마련해 준 것도 그녀였으니까.

“유니스, 괜찮아?”

쓰러질 것 같은 그녀를 겨우 붙드는데, 그 뒤로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는 게 보였다.

“마님!”

노집사부터,

“레이디!”

펠로스,

“에블린! 잘 왔어요, 정말 잘 왔어요.”

코델리아까지.

그 외에도 낯이 익은 시녀와 시종들이 나를, 아니 나와 데반을 반기고 있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노집사의 물음에 데반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 순간 뒤에서 나타난 카렌이 제 영웅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미리 마차와 병사들을 준비해 엘리운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 덕에 전하와 레이디를 빨리 데려올 수 있지 않았습니까! 아니었더라면 아마 내일쯤 꽁꽁 얼어서 발견됐을 겁니다.”

우리를 데리러 벽돌집까지 마차를 끌고 온 게 바로 카렌이었다. 분명 그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카렌 경, 그 집은 제가 두 달 간 문제없이 살았던 집이라고요. 꽁꽁 얼 리가 없잖아요.”

“허, 참. 제가 들어갔을 때 방 안이 얼마나 싸늘했는지 잊으신 겁니까? 그곳에서 두 분이 부둥켜안고 계시는 모습이란……. 조난이라도 당한 줄 알았습니다, 저는!”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들었던 잔소리가 한 번 더 귀청을 때렸다. 하필이면 카렌이 왔을 때 벽난로의 불이 모두 타들어 가 있었던 탓이었다.

괜히 데반을 흘겨봤다. 내가 잠들어 버리면 그라도 불을 지켜봤어야 하는 게 아닌가. 같이 잠들어 버렸으니…….

그러나 내 눈빛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데반은 한 발자국 나와 카렌을 옆으로 밀쳐 냈다.

“레이디가 아니라 대공비 전하라고 몇 번은 말했을 텐데?”

그리곤 내 손을 잡은 채 앞장서는데, 문득 이 광경이 몇 년 전 엘리운에서 돌아왔을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유니스가 아닌 힐다였지만. 어쨌든 하녀가 나를 부여잡고 울었고, 카렌도 나에게 빈정거렸었지. 데반은 꼭 지금처럼 앞장서며…….

‘웃기지도 않은 환영회는 나중에 하고, 일단 들어가지.’

라고 했었고.

“그만하고 들어가지.”

내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데반이 말했다.

“환영회는요? 환영회는 안 합니까? 우리 레이디, 아니 대공비 전하께서 돌아오셨는데.”

머릿속에 술 마실 핑계밖에 없는 카렌이 뒤따라오며 물었다. 데반이라면…… 환영회는 무슨 환영회냐며 일갈하겠지.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을 때였다. 우뚝 발걸음을 멈춘 데반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미소? 내가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그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환영회는 결혼식으로 대신하지.”

“……네?”

멍한 내 반문 뒤로 비명과도 같은 사용인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데반은 내가 돌아온 바로 다음 날부터 결혼식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저번 결혼식은 너무나 형식적이었다며, 정말로 우리 둘을 위한 결혼식을 하고 싶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그래, 그거야 뭐……. 나로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로 신전에서 다시 결혼식을 하시겠다고요? 도대체 왜요?”

신전이라니. 신전에서 왜 결혼식을 한단 말인가.

신전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내 옆에 딱 붙어 앉은 데반이 싱글벙글하며 답했다.

“저번 결혼을 신전에서 했으니까. 진짜 결혼식도 여기서 해야 저번의 기억이 덧칠되지 않겠어?”

“하지만… 그래도 신전이잖아요. 저는 신전은 조금….”

“걱정 마. 예전의 그 신전이 아니니까.”

예전의 신전이 아니라고?

데반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한때는 웅장했던 새하얀 첨탑이 반쯤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전이라기보단 신전 터라고 부르는 게 더 맞을 것 같은 광경이었다. 제국 한가운데에 이런 황폐한 광경이라니.

“……데반. 이런 곳에서 결혼식을 하자고요?”

“……이게 무슨.”

나뿐 아니라 데반도 많이 당황한 듯했다.

그 순간, 무너진 건물 뒤로 붉은 포니테일이 휘날리더니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게 누구야!”

“……황태녀 전하.”

아스트릴라가 여긴 왜? 깜짝 놀라 서둘러 예를 갖추자,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놀랄 만큼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를 입에 걸고서.

“우리 사이에 예의는 무슨.”

“우리 사이는 무슨.”

싸늘한 데반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거지? 왜 건물이 이 모양이 된 거야. 분명 건물은 유지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건물‘은’ 유지해? 그 말은…….

“그러려고 했는데, 막상 보니 역겨워서 안 되겠더군. 저 첨탑 안에 있는 동상하며…….”

“이게 다 무슨 소리죠? 신전이 어떻게 된 거예요? 분명 제가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귀족들이 권력을 장악하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아스트릴라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모두 네 덕분이지! 신전 지하 비밀 공간에 수많은 아이가 잠들어 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수색을 시작했거든.”

그제야 그녀가 나에게 유난히 관대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런 게 발견됐으니 더는 발뺌할 수 없겠지. 더군다나 저 첨탑.”

그녀가 슬쩍 뒤를 눈짓했다. 반쯤 무너진 외벽 안에 신의 형상을 한 동상이 보였다.

“저 안에 저런 걸 숨겨 뒀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귀족들도 저걸 보더니 학을 떼더군. 덕분에 신전은 없애는 걸로 결정했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아, 아니에요…….”

“알려준 건 나다만.”

불쑥 뒤에서 나타난 데반이 내 허리를 껴안으며 끼어들었다.

“허, 며칠 도와주나 싶더니 제 아내를 찾아야 한다고 쌩하니 사라진 주제에 말이 많군.”

아스트릴라가 혀를 찼다.

“저, 그래서요? 그래서 아이들은 어떻게 됐죠?”

“그들은…….”

아스트릴라가 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그들은…… 모두 죽었다. 살릴 수 없다더군. 제대로 장례를 치러줄 생각이다.”

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같은 처지의, 내가 구하지 못했던 아이들이었다.

지금이라도 그 추운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그럼 신전은 완전히 사라지는 건가요?”

“완전히는 아니고, 뼈대만 남긴 뒤 다시 세울 작정이다.”

“네? 신전을요?”

“아니. 아이들을 위한 기관을 만들 생각이야. 부모 없이 버려지는 아이들을 위한 곳.”

“아…….”

“걱정하지 마. 제대로 돌봐 줄 생각이니까. 내가 직접 관리할 거고. 원한다면 에블린 네가 관리해도 좋겠군.”

“네?”

내가 아이들을?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하고 있는데 데반이 나를 휙 끌어당겼다.

“황족이 직접 나선다는 이미지를 보여줄 생각인가 본데, 그딴 건 에블린에게 시키지 말고 네가 직접 해.”

“아니, 아니에요. 괜찮다면 저도 도와드리고 싶은걸요.”

데반의 품 안에서 서둘러 벗어나 말하자 아스트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도와준다면 아주 힘이 될 거다. 아, 그러고 보니 네 오라비. 오라비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녀석이겠지만……. 그 녀석도 구했다.”

……킬리언? 갑자기 나오는 그 이름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구했…… 다고요?”

“그래, 신전이 배후로 그를 지목한 뒤 내내 황궁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네.”

“이제 모두가 신전의 실체를 알고 있으니까. 절로 누명이라는 게 밝혀졌다.”

감옥에서 나왔다고……. 그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가지고 있던 지위도, 재물도 모두…….

아스트릴라가 내 마음을 읽은 듯 대답했다.

“물론 제 아비를 죽인 벌은 다시 받아야 할 거다. 다만…… 네가 괜찮다면, 디에고 백작이 저지른 학대를 증언해 줬으면 좋겠는데.”

순간 몸이 잘게 떨렸다. 어느새 다시 옆에 다가온 데반이 내 어깨를 껴안았다.

“힘들면 안 해도 된다. 굳이 그딴 자식을 위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알다시피 킬리언은 아비를 죽였어. 처형을 면할 수 없는 범죄지. 하지만―”

“할게요.”

눈을 질끈 감았다.

킬리언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디에고 백작이 우리에게 저지른 끔찍한 짓 역시 세상에 알려져야만 했다.

그 후의 판단은 다른 자들의 몫이겠지.

“그래, 고맙네.”

아스트릴라가 내 어깨를 가볍게 쳤다. 혹시 그녀는 제 직속 부관이었던 킬리언을 동정하고 있는 걸까.

그녀가 가라앉은 낯빛으로 말했다.

“무고한 이, 무고하지 않은 이……. 모두의 피가 너무 많이 흘렀어.”

“전하…….”

“이 제국은 처음부터 다시 태어날 거다. 내가, 내 손으로 그렇게 만들 거야.”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단단한 힘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나 역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으리라.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래서.”

내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데반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건물이 사라졌는데 결혼식은 어디서 하지?”

“데반!”

그는 여전히 머릿속에 결혼식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결혼식이라니? 무슨…….”

나와 데반을 번갈아 바라본 아스트릴라가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잠깐 사이에 모든 일을 파악한 게 분명했다.

“황당하군. 마음을 확인하기라도 했나 보지?”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아 슬쩍 데반의 뒤로 숨었다.

“신전에서 다시 하려고 했더니.”

“결혼하는 데 장소가 뭐가 중요하지?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닌가? 아무 데서나 하지 그래?”

아무래도 빈정거리는 말 같았는데, 그 말을 들은 데반은 의외로 깊은 생각에 빠졌다.

“……데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의 얼굴에 불안한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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