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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5화 (15/121)

15화

티스베를 보고 비명을 지르는 건 참지 못했어도, 손을 잡아도 되는지 묻는 무례한 짓은 겨우겨우 참아 넘겼던 그녀였으니.

에스텔은 제게 내밀어진 손을 보고는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제가 손을…… 잡아도 되는 건가요?”

“그럼 손도 잡지 않고 어떻게 마차에서 내려오려고요?”

구두에, 드레스를 입고 폴짝 뛰어서 내릴 수는 없잖아요. 하고 티스베가 웃자, 에스텔은 저도 모르게 재깍 대답하고 말았다.

“옳으신 말씀이세요.”

아주 옳으신 말씀이었다.

게다가 두 번이나 머뭇거린다면 티스베가 손을 치워 버릴 것만 같아서, 에스텔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곤 티스베의 손을 잡았다.

마차가 한 번 크게 출렁이고, 에스텔이 지상에 내려오자 그녀와 티스베는 다시 한번 같은 땅 위에 섰다.

에스텔의 손을 놓아 준 티스베가 가볍게 치마를 들어 보였다. 예법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고 절도 있는 몸짓.

“정식으로 다시 인사할게요. 칼릭스트 공저에 어서 와요, 에스텔.”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느라, 에스텔은 대답을 한 박자 늦게 하고 말았다. 하지만 티스베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 당신의 외숙을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내가 갑자기 와서 조금 놀랐을 수도 있겠어요.”

“아, 그렇잖아도 많이 늦으셔서…… 혹시 외숙부께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하던 중이었어요.”

“확실히,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티스베는 잠깐 말끝을 흐리더니, 금세 미소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마차 안은 답답하지 않았나요?”

“아, 그 수도에 올 때 마차를 아주 오래 타서 이 정도는 괜찮아요.”

“움직이는 마차 안에 있는 것과 멈춘 마차 안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건 또 다르니까요.”

확실히 그러했다.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는 창밖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는데, 이곳에서는 살짝 답답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아마 티스베를 본다는 두근거림이 없었더라면 더 했겠지.

‘하지만 공녀님께 약한 소리를 하고 싶지도 않아.’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어 에스텔이 머뭇거리자, 티스베가 알 만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에스텔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에스텔. 자, 이제 어서 저택으로 가요. 가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줄게요.”

그녀는 에스텔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걸음을 뗐다. 그리 빠르지 않은 보폭에 이끌려 에스텔은 티스베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티스베에게 잡힌 손도, 엉거주춤한 걸음도 모두 비현실적이라, 에스텔은 흔들리는 티스베의 은발을 보며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이게 정말 꿈은 아닐까?’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서나 듣던 아름다운 공녀님의 손에 이끌리는 자신. 그리고 아름다운 저택과 아름다운 정원.

때마침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티스베의 머리칼에 부서지는 햇살까지.

만약 꿈이라면 깨지 않아도 좋을 것만 같았다.

때문에 당시의 에스텔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채였다.

자신이 단순히 이곳에 티스베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칼릭스트에 입적하기 위함이었으며, 그로 인해 칼릭스트 공작과 외숙부 질레트 백작이 옥신각신하는 중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중재하기 위해 티스베가 에스텔을 데리러 왔다는 것을.

에스텔이 알게 되는 것은, 그녀의 시야에 저택의 정문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이었으므로.

* * *

칼릭스트 공작, 알마스 엘람 칼릭스트는 근래 들어 생에 몇 없는 난관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유는 이것.

“제발, 가주님! 일레르 영애를 입적 시키셔야 합니다!”

가문의 장로들과 가신들이 모두 입을 모아 에스텔 일레르라는 새로운 성녀에게 칼릭스트의 이름을 주어야 한다고 주창하는 것 때문이다.

티스베는 눈치 채지 못한 사실이었지만, 이들이 알마스를 괴롭힌 것은 약 한 달 전부터였다.

그러니까 에스텔이 진짜 성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그들은 알마스에게 편지와 사람을 보내 에스텔을 입적시키자며 입을 모았던 것이다.

다만 그동안은 신전의 공표도 없었고, 특별히 공식적으로 에스텔이 참가해야 하는 사교 모임도 없었으니 가신들의 탄원 역시 거세지 않았다.

‘아니, 아마 내가 당연히 에스텔을 입적시킬 거라 믿어서 그랬다는 게 더 설득력 있겠군.’

하고 알마스는 생각했다.

알마스 역시 무엇이 최선인지 알고 있으니 자신들이 이렇게 요구하지 않아도 어련히 알마스가 에스텔을 입적시키겠다고 나설 거라 믿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도록 알마스가 아무런 말이 없고, 외부에서는 자꾸만 에스텔을 탐내는 데다, 이제 신전에서 공표한 정식 성녀로 인정받아 황실의 파티에 참석해야 하는 상황이 와 버렸다.

그러니 그들은 아침을 맞은 닭이 되어 시끄럽게 울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해하는 것이다.

하루빨리 에스텔에게 칼릭스트의 이름을 달아야 할 텐데, 왜 가주님이 갑자기 고집을 피우시는 걸까.

무엇이 최선인지 모르는 분도 아닌데.

질레트 백작은 다시 알마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물었다.

“가주님. 정말로, 겨우 공녀님 한 분을 위해 이 기회를 놓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그러나 알마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레르 영애를 입적시킨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안 되네. 지금 들이면 공녀의 지위를 영애에게 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티스베에게 그런 짓은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가신들의 저 귀 따가운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의 입장은 강경했다.

사실, 그는 이렇게까지 강경할 생각이 없었다.

가문의 득실을 그 누구보다도 신중히 따지는 것은 오히려 알마스 쪽이었다. 그랬기에 가신들이 더욱 이렇게 이해할 수가 없다며 펄펄 뛰는 것이었고.

만약 그가 그 기사를 보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에스텔을 입적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고려했을 것이다.

“티스베에게 살인 혐의가 있는 지금은…… 그 애에게 가문이라는 울타리가 필요해. 그러니 지금만은…… 지금만은 안 되네.”

연쇄적인 죽음에 대한 티스베의 혐의를 따지는 신문 기사.

그 기사를 봤을 때, 알마스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평생 다정히 대해 준 적 없는 손녀딸이었다. 애초에 그런 낯간지러운 단어와 그는 거리가 멀기도 했고, 손녀딸을 볼 때마다 죽은 아들이 떠올라 일부러 피한 것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그저 아이가 어디 가서 성녀라는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만한 사람으로 키워 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공녀님과 이야기 나눠 보실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분명 공녀님께서도 좋아하실 텐데…….

-아이들이 내 얼굴만 보면 울음을 터트리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던가? 됐으니 이거나 가져가게, 집사. 내가 추려 본 가정 교사 명단일세.

-각하, 외람되오나…… 이 명단에 있는 분들을 정말 초빙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대다수가 제자를 두지 않기로 유명한 분들이신데…….

-이미 해 두었으니 적은 거지. 칼릭스트의 공녀를 가르칠 영예를 마다하는 천치는 나도 필요 없다.

그 선생들을 초빙하기 위해 알마스 본인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건 제 품위를 깎아 먹는 짓이니까.

그렇게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교사들을 붙여 주고,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 속에 살게 해주면 모든 게 괜찮을 줄 알았다.

‘아이에게 나 같은 건 필요 없겠지.’

할 줄 아는 거라곤 군대식 어투로 명령하는 것뿐인 험상궂은 할아버지를 좋아할 아이가 어디 있을까?

그런 것보다는 양질의 교육과 풍족한 환경이 아이에게 더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어느 날 연무장을 지나다, 이런 대화를 듣지 못했더라면.

아마 평생 그렇게 살았으리라.

모퉁이 너머에서, 하녀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고 있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무릎에서 피가 많이 나는데!

-으…… 아파. 이거 흉터는 안 남으려나?

-잘 치료하면 흉터는 남지 않을 거예요. 제가 주치의님께 가서 약을 얻어 올게요. 주인님께도 말씀을,

-아니야, 할아버지께는 말씀드리지 마. 할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많이 있으시잖아. 관심 없는 손녀딸 무릎 까졌다는 얘기나 듣고 싶어 하진 않으실 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하녀로 추정되는 목소리는 그 이상 말을 뱉지 못했다.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그 다음에 올 말은 무엇이었을까.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얼마나 생각하시는지?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그렇게 쌀쌀맞게 대할 리 없다고?

뭐가 됐든 하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하녀 역시 알고 있었던 거다. 말을 더 해 봤자, 그건 제 살을 깎아 먹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겨우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조그만 아이가 저렇게 확신 어린 말투로 할아버지는 제게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 앞에서 할아버지가 사실 네게 관심이 많이 있다는 걸 말하는 게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말을 믿을 수나 있을까.

-할아버지는 늘 웃으시다가도 나만 보면 웃음을 멈추시니까.

저 작은 아이가 저런 말을 하기까지…… 도대체 어떤 생각들을 거쳐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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