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던져진 물음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고요를 깨트린 건 티스베 쪽이었다.
“……설마 지금 진심으로 묻는 말이야?”
“내가 빈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유감스럽네. 난 네 약혼자가 무척 수상해 보여서 말이지. 말마따나, 네가 이런 곤란한 상황에 처했는데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잖아.”
“난 단지 정략혼 상대일 뿐이야. 소어가 굳이 뭔가 해 주어야 할 의무는 없지.”
“네 말이 맞지. 단순한 정략혼 상대라면.”
보통 정략혼 사이는 그렇게 좋지 않은 편이다.
굳이 모날 것도 없지만, 굳이 눈에 띄게 좋은 편도 아닌.
비유하자면 동업자 정도의 관계랄까.
“하지만 너희들은 사이가 좋잖아? 척 보기에도 살바토르 공작이 널 무척 아끼던데.”
“그렇겠지. 소어는 상냥하니까.”
“그 상냥함이 왜 이럴 땐 발휘되지 않는 거지?”
티스베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렇게 따지면 칼릭스트도 두드러지게 뭔가 한 건 없어. 섣불리 움직이면 여론이 더 나빠질 수도 있으니 동태를 살피는 건 기본 아닌가?”
“아니, 아니지. 칼릭스트는 네 결백을 신뢰하지 않으니까 그러는 거고. 네 약혼자는 네 결백을 신뢰한다며? 그럼 좀 더 나서서 진실을 밝히려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킬리안의 말은 완벽히 정곡이었다.
사실, 티스베라고 해서 소어를 의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몸싸움을 하던 중 단도를 한 번 뺏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놈의 손바닥을 칼로 그었어요.
마흘론의 증언.
그걸 듣자마자 떠오른 게 있었던 것이다.
-소어의…… 수행원이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어. 생각해 보면 네가 말했던 체형하고 비슷하고.
-그, 그게 진짜입니까?! 아니, 제가 그걸 봤어야 했는데!
봤더라면 분명 분위기나 느낌으로 직감이 왔을 거라며 마흘론이 아쉬움을 터트렸다.
하지만 티스베는 다른 데 생각이 팔려 있었다.
-……마흘론. 만약 그 사람이 너를 습격한 사람이라면…… 그럼 소어가 진범이 되는 건가?
-어……. 아마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요?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지, 마흘론이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아주 긴 침묵이 흘렀다.
-……소어가?
-…….
-그 소어가? 진범? 진심으로?
-그러게요…… 이게 진짜…… 말이 안 되는 소리이긴 한데…….
마흘론이 고개를 갸웃했다.
티스베와 마흘론은 같은 정보와 같은 의견을 공유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소어가 정말로 선하고 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실 무리도 아닌 이야기였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소어는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더없이 신실한, 바르고 정직한 인품의 소유자였으니까.
-……그렇지만 살바토르 공작님은 전장을 오래 다녀오신 분이 아닙니까? 조사해 본 바로는 전장에서 살인귀라고 불리기도 했다잖습니까.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면모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건 나도 동의해. 우리가 소어를 전부 알 수는 없겠지. 하지만 소어는 내 약혼자잖아.
그것도 그냥 약혼자가 아니다.
-나를 아주 아주 좋아하는 내 약혼자.
-그으렇지요…….
-그런데 뭐하러 그런 짓을 하겠어? 내가 욕 먹어서 본인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정치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엄밀히 말해 지금 티스베의 살인 혐의로 가장 애꿎은 피해를 입은 건 소어가 아닌가?
-어딜 가나 소어를 불쌍해할 걸. 이런 악녀를 떠안게 생겼으니.
-그럼 혹시 파혼이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그래서 일부러 악명을 드높이려 했다거나.
-아니, 소어는 파혼을 바라지 않아. 이건 확실해.
파혼을 바란다면 버리느니 뭐니,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으니까.
사실 오히려 그래서 더 곤란한 상황이었다.
최근 소어는 티스베에게 더욱 호의를 표하곤 했으니까.
물론 적은 말수는 여전했지만,
중요한 건 양이 아니라 질이었다.
-당신의 곁에 서도록 허락받은 것이 제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당신은 상상도 하지 못하실 겁니다.
한 번씩 내뱉는 말에 담긴 호의와 애정이 얼마나 커다란지.
소어의 이런 행동에 제법 익숙하다 자부하는 티스베도 종종 놀랄 지경이었다.
-네가 정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다음에 소어를 만날 때 네가 몰래 지켜보면 어때? 최근에는 줄곧 그 수행원을 데리고 다녔으니까. 보면 알 거라며?
-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네요. 그래야겠습니다.
마흘론은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라스를 다시 보는 일은 없었다.
그날 이후로 소어가 데리고 다니는 수행원을 바꾼 것이다.
결국 그 수행원이 마흘론을 습격한 범인이었는지는 다시 미궁에 빠졌다.
하지만 굳이 그 일이 아니더라도 티스베는 소어를 용의선상에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소어가 이런 일을 저지를 이유가 없기도 했고, 그녀의 눈에 소어가 정말 선하고 순한 사람으로 보였던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알아보면 나올 일이겠지. 그러려고 네 도움을 빌리는 거 아냐?”
어차피 티스베가 지금 계획하는 일은, 용의선상에서 진지하게 고려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모두 도마에 오르게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소어를 덮어 놓고 의심하고 싶지 않아.”
“그거 덮어 놓고 의심당한 사람으로서는 꽤 서운한 말인걸.”
“억울하면 네가 소어처럼 착하게 살았어야지.”
티스베의 말에, 킬리안이 동의한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물론 그 속내까지 부드럽지는 못했지만.
‘아직 이 정도로는 둘 사이를 갈라놓기에는 역부족인가?’
이 기회를 이용해서 티스베에게 그 자식의 진짜 성격을 알려 줄 수 있을까 했는데.
‘뭐, 앞으로도 시도할 기회는 많으니까.’
원래 이런 일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해야 했다.
애초에 티스베를 돕는 목표가 소어와 티스베를 갈라놓는 것에 있기도 했고.
‘거슬린단 말이지, 소어 아르망 살바토르.’
티스베의 짝으로 소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던 것은 진심이었다.
어쭙잖은 머저리들보다 반반한 얼굴에 괜찮은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 봐야 뭐하나?
뇌까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을 텐데.
티스베에게는 학자보다는 기사가, 기사보다는 권력자가 어울렸다.
그녀의 야망을 함께할 수 있을 만한 실력 있는 젊은 권력자.
‘교양도 학식도 나 정도는 돼야겠지.’
아니, 엄밀히 말해 자신 말고는 어울릴 만한 사람이 없다.
어릴 때부터 천재라고 불렸던 그녀의 수준을 만족시킬 만한 사람이 과연 그 말고 또 누가 있을까?
킬리안은 언제나 티스베가 장차 자신의 정치적인 파트너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들은 오랜 기간 아주 합이 잘 맞는 파트너로 지내 왔다.
일례로 몇 해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티스베, 빌헬름 백작을 회유하려는데 좋은 생각이 있나?
-빌헬름? 군권을 가져오려고? 좀 늦지 않았나? 빌헬름이 차기 군사령관이 될 거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아니, 황실 군권은 아무래도 좋아. 내가 원하는 건 무기 유통망이야.
-귀족들 사병을 제한하고 싶은 거구나? 무기가 없으면 사병도 늘리지 못할 테니. 그럼 굳이 빌헬름을 포섭할 필요도 없지.
티스베는 그렇게 말하더니, 소파에 앉은 채 꼬고 있던 다리에서 구두를 벗어 툭 던졌다.
구두는 당연하지만 방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닥에 그려져 있던 제국의 지도 중, 눌렌 산맥 위로.
-눌렌 위로는 제국 최대의 철 생산지가 있지. 이 산맥에 퍼져 있는 야만인들을 들쑤셔.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살짝 불을 질러 주면 알아서 뛰쳐나오겠지. 그럼 자연스레 군사가 이리로 몰릴 테고, 철이 오가는 기로는 막히겠지?
철이 없다면 무기를 만들 수 없다.
무기가 없다면 귀족들이 사병을 키울 수도 없다.
무엇보다 야만인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축출해야 하니 자연히 사병을 키울 여력도 사라질 터.
-그리고 이 기회에 네가 빌헬름에게 사병과 군비를 지원해 주면 어련히 널 좋아하지 않겠어?
어려운 말이 오가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의 뜻을 이해하고, 모자란 부분들을 보충해 주는 관계.
그야말로 이상적인 관계다.
‘내가 황위에 오를 때면 티스베는 칼릭스트 공작이 되겠지.’
그리고 킬리안은 그녀의 정치적 반려자를 자청하고자 했다.
긴 역사에 서로의 배우자보다도 가깝게 지낸 군신 관계는 셀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약혼자? 배우자?
그런 건 그냥 대를 잇기 위해 존재하는 거고.
‘진짜는 바깥에 있는 거지.’
티스베의 야망을 채워 줄 수 있는 자신이야말로 그녀의 파트너로 적합한 사람이었다.
킬리안은 이 사실이 위협받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3년 전.
자신의 황태자 책봉식 이후, 소어가 티스베의 곁으로 오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