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입 밖으로는 결코 내지 않을 말들.
때로 진실은 어떤 거짓보다도 확실하게 눈을 속이는 법이다.
상냥한 티스베는 아마 제 앞의 고해자가 채 뱉지 않은 말이 있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하겠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들키면 경멸을 받게 될까.’
티스베는 상냥한 사람이니 어쩌면 경멸보다는 제 손을 놓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분명 티스베가 행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처벌인 동시에 그가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이었다.
‘티스베.’
속으로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벅찬 이름.
가끔은 제 맹목에 목이 막힌다.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깊어서.
멋대로 시작해 버린 마음이었으니 보답을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당신이 자신을 원하길 바라는 것이.
그게 얼마나 무지하고 몽매한 바람인지 알면서도 그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 다만 괴로워서.
티스베를 사랑한 까닭에 소어는 무엇을 쥐어도 빈곤해지고, 무엇으로도 공허를 달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갈증에 시달리는 이가 물을 찾고, 허기에 시달린 자가 음식을 탐하듯.
소어가 티스베의 애정을 갈구하고 그녀를 유혹하는 것 역시도 그랬다.
하여 소어는 달콤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 애정 어린 눈동자로 호소했고, 다디단 말들로 꼬드겼다.
“제게 얼마든지 기대셔도 됩니다, 티스베.”
그리고 이 유혹은.
‘이거 좀 혹하는데……?’
아주 잘 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다른 때였더라면 웃고 말았을 티스베지만, 오늘은 상황이 소어에게 좋게 흘러갔다.
티스베는 오늘 유난히 고되고 지친, 그리고 혼란스러운 하루를 보냈다.
평소와 달리 소어의 집에 충동적으로 찾아올 만큼 경계가 허물어져 있었으며 동시에 판단력도 꽤 흐려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주어지는 온갖 사치품들과 다정한 말들은 그녀를 더욱 말랑하게 만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하여 티스베는 제게 모든 걸 주겠다고 말하며 무척 기쁜 듯이 미소 짓는 소어를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그래, 소어는 늘 이런 사람이지.’
단순히 티스베가 좋아할 것 같다는, 혹은 필요할 것 같다는 이유.
오직 그것만으로도 소어는 제 것을 아낌없이 내어 줄 수 있을 사람이니까.
이런 무조건적인 애정과 호의를 받고 있노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정말 그냥 모든 걸 내려놓고 소어에게 기대고 싶다고.
‘아마 책 속에서도 이랬겠지, 소어는.’
그러니 책 속의 티스베가 소어에게 빌붙었던 것이리라.
약혼녀라는 명분도 있겠다, 소어 본인도 거절하지 않았을 테고.
그러니 만약 티스베가 <괴물꽃>의 내용을 몰랐더라면 정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사람에게 너무 지쳐 있었고, 동시에 사무치게 외로웠으므로.
이런 달콤한 유혹을 받으면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망명같이 어렵고 외로운 길을 꼭 가야 할까?’
그냥 소어가 말하는 것처럼 소어에게 기대서 편하게 살면 안 될까?
‘소어를 선택하면 적어도 외롭지는 않을 텐데…….’
저 새파란 눈동자에는 자신을 향한 호의와 애정이 가득했다.
너무 가득한 나머지 그걸 보고 있노라면 이기적인 마음이 불쑥 들 정도다.
소어는 다정하고, 상냥하고, 또 유약하니까.
아마 이용하려 든다 해도 기꺼이 이용당해 주겠지.
‘지금도…….’
내가 조금만 당겨도 이렇게나 쉽게 다가오는걸.
티스베와 소어의 거리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
거리를 좁힌 티스베는 고작 제 손길이 눈앞의 남자를 이토록 쉽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밭은 날숨을 뱉었다.
그것이 어떤 신호가 되고 만 걸까.
혹은 제가 사내를 당긴 것이 어떤 긍정의 신호처럼 느껴졌을까?
소파를 짚은 티스베의 손 위로 마디 하나는 더 큰 손이 얽혀들었다.
소어의 유약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검을 오래 쥐었을 손은 상당히 거칠었다.
굳은살이 박힌 손은 약간의 마찰로도 제법 난폭한 느낌을 쉽게 자아냈다.
한 마디 말도 없었지만, 고작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소어.’
눈앞의 사내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원초적인 갈구였다.
티스베가 손을 한 번 뻗기만 하면 소어는 기꺼이 그녀의 가장 내밀한 숨을 가져갈 것이다.
불쑥 충동이 들었다.
총을 든 사람이 한 번쯤 방아쇠를 당겨보고 싶어 하듯.
제게 모든 것을 내어 주겠노라 말하는, 고작 손끝 흔들림에도 쉽게 허물어지는 이 아름다운 청년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것은 처음 사내를 당겨 왔던 것보다 손쉬울 게 분명했다.
그때는 손을 움직여야 했지만, 지금은 눈꺼풀만 내리감아도 충분할 터였으므로.
그러나.
“……그럴 순 없어요.”
티스베는 소어를 밀어냈다.
손짓 하나에 그를 허물 수 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빠져나가는 손.
고작 그 하나에도 그는 허물어졌으므로.
* * *
더 깊어질 수도 없는 검은 밤이 깊게 내려앉은 시각.
집무실이라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워진 공간에 소어는 홀로 앉아 있었다.
켜 두었던 불이 전부 닳아 이제는 어둠이 방 안을 물들였는데도 앉은 자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단지 머릿속으로 조금 전의 대화를 몇 번이고 곱씹을 뿐.
그럴 수는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소어는 불쑥 든 의문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가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입니까?”
분명 고지가 코앞이었다. 소어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나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당신의 것이 될 수가 없나.
“제가…… 모자란 까닭입니까?”
그러나 그의 약혼녀는 거부조차도 상냥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예요, 소어.”
“반대라니.”
“당신이 너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소어는 제 약혼녀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티스베가 그를 세상에 다시없는 천사처럼 여긴다는 것도.
그녀의 눈에 소어는 원치 않은 약혼을 했음에도 상대에게 헌신적이고 책임감이 넘치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도.
사실 굳이 말하자면 소어는 약혼에 대해 별 유감이 없었으며, 동시에 약혼 상대가 티스베가 아니었더라면 정확히 제 몫의 예의만을 다했을 테지만.
어차피 소어의 약혼녀는 티스베였고, 저것은 굳이 가정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티스베가 멋대로 오해하게 내버려 두었다.
어느 정도는 소어가 일부러 가장한 내용이기도 했고.
그런데 그것이 왜?
“난 당신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그냥…… 원치 않았는데도 내 약혼자가 되었을 뿐이잖아요. 당신이 날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죠.”
“그렇지만, 티스베. 첫 시작은 중요치 않습니다. 저는 당신을 마음 깊이…… 아끼고 있습니다.”
아끼다 못해 제 속이 곯아 터지도록 사랑하고 있으나, 지나친 솔직함은 거짓보다 못하다는 것을 소어는 이미 학습했다.
“그러니 티스베가 제게 기댄다고 해서 결코 그 사실을 짐으로 여기지는 않을 겁니다.”
“알아요. 그게 정말 고맙고.”
티스베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조금은 씁쓸하고, 또 조금은 기쁜 듯이.
그녀는 손을 뻗어 제 발치에 무릎 꿇은 이의 뺨을 감싸 쓰다듬었다.
“나를 당신만큼 아껴 준 사람은 또 없을 거예요. 앞으로도 없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왜-”
“지금은 내가 상황이 나쁘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내가 당신에게 기대 버리면, 당신을 도피처로 이용한 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말문이 막혔다. 소어가 노렸던 것이 바로 정확히 그것이었으므로.
“……절, 이용하셔도 됩니다. 당신이라면.”
“아니, 그 누구도 당신을 이용할 수는 없어요. 그렇게 둘 수는 없어요.”
“어째서입니까?”
“나는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니까요.”
정말 아이러니였다.
소어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을 손에 쥔 상대가, 소어의 행복을 위해 그를 밀어내다니.
“내가 당신에게 기대지 않아도 괜찮을 때 우리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소어.”
상냥하고도 잔인한 말.
티스베는 진심으로 저렇게 믿는 모양이었지만 소어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제게 기대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라면, 그녀는 결코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빌어먹게도 공교롭군.’
궁지에 몰려야만 이런 유혹이 먹혀드는 그녀인데.
궁지에 몰렸기 때문에 유혹을 받아 줄 수 없다니.
‘이젠 정말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절망적인 기분이다.
그러나 아직은 좌절할 때가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부수어 가는 게 소어의 방식이니까.
‘조디악도 끼어들었고. 위험 부담도 있으니 더는 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소어가 몸을 일으켜 종을 울렸다.
“라스. 저번에 말했던 자를 데려와라. 배교자 놈들을 만나 봐야겠다.”
잠시 멈추었던 톱니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