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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56화 (56/121)

56화

둥근 길목을 따라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한 여자가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색은 세간에 잘 알려진 성녀의 것과 같은 분홍색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녀를 붙잡으러 간 이교도들의 머리칼은 더더욱 아니었다.

푸른 빛무리가 도는 은사 같은 머리칼.

맹금류의 것처럼 흉흉히 빛나는 샛노란 금안.

그녀를 알아본 사이벨의 낯이 희게 질렸다.

“카, 칼릭스트 공녀?”

[이젠 개나 소나 다 알아보는군. 이래서 유명한 것도 피곤해.]

뇌리에 새겨지듯이 들려오는 음성.

그리고 이마에 새겨진 성좌의 기호까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사이벨이 아니다.

‘성녀가 아니라 칼릭스트 공녀가 여기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 강림까지?’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질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티스베의 등장에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사이벨 뿐이 아니었다.

“주, 주교님. 저 여자가 칼릭스트 공녀라는 겁니까?”

“분명 인상착의는 맞습니다만, 칼릭스트 공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저 모습은……!”

우왕좌왕하는 사제들 사이, 상급 사제가 엄포를 놓았다.

“거기 멈춰라! 멈추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공격? 그거 좋네. 한번 해 봐.]

칼릭스트 공녀로 추정되는 여자가 가볍게 손을 튕겼다.

그러자 그녀를 중심으로 허공에 푸른빛의 마나 화살들이 원을 그리며 나타났다.

마치 신전 벽화에 그려진 성녀의 머리 뒤를 장식한 후광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것 같은 모습.

[난 지금부터 너희를 하나씩 죽일 거다. 그러니 죽고 싶지 않다면.]

너희가 누구한테 지원을 받았는지 얘기해.

* * *

사이벨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칼릭스트 공녀, 저 여자는 존재부터 모든 것이 변수였다.

“주, 주교님. 어떻게 합니까? 서둘러 퇴각해야-”

“아니!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다. 저 여자가 죽으면 우리도 전부 죽은 목숨이란 말이다!”

그들이 잡은 돈줄은 분명 호구가 맞았다.

그러나 저 여자는 그 호구가 말한 마지막 일선.

다른 사제들은 어떨지 몰라도, 사이벨은 그 호구와 협상한 그 테이블에 앉아 본 사람이었다.

‘그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사이벨은 신전에서도, 이교도가 된 이후에도 주교로 지내며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나 보았다.

그러나 그가 만났던 그 어떤 이도 그처럼 행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네놈들의 하찮은 교단이 얼마나 빠르게 지워질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보여 주도록 하지.

흔히 살육을 스스럼없이 말하는 자는 제 강함에 취해 있거나, 혹은 잔혹함을 즐기는 부류다.

타인의 공포를 즐기고 지배하는 감각에 도취된 자들.

그러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그저 고루함뿐이었다.

이 모든 행위가 그저 지루하다는 것 같은 허무.

‘그는 살육을 즐기는 자가 아니었다.’

단지 그 죽음이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할 뿐인 것이다.

쓰레기를 내버리는 데 죄책감을 가지는 이가 없듯이, 그 역시도 그랬다.

그런 그가 달라지는 건 딱 하나.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에 대해 언급할 때뿐이었다.

“절대로 저 여자가 여기에 휘말리게 해서는 안 된다!”

“그, 그럼 어떻게 합니까?”

“방벽을 쳐라! 저 여자는 내가 제압해서 함께 자리를 피한다.”

사이벨의 말이 끝나자 사제들이 모여 일제히 방벽을 쌓아 올렸다.

물과 땅으로 이루어진 방벽들이 그들 앞에 속속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사이벨 역시 빠르게 마나를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그에게서도 푸른 빛무리가 감돌기 시작하더니, 이마에 물고기자리의 기호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 점을 제외하면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이는 티스베와 달리 사이벨의 주변은 그 기운에 이끌려 마나가 함께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인간의 몸으로 해일을 끌어올리는 것 같은 대단한 위용.

‘칼릭스트 공녀가 어떻게 강림을 성공했는지는 몰라도, 내게 비할 바는 못 된다.’

온몸에 넘쳐흐르는 이 힘!

고작 푸른빛이 일렁이는 수준에 불과한 저 초라한 모습과는 힘의 크기부터가 다르다.

‘칼릭스트 공녀가 마나 친화력은 좋다고 했으니 어떻게 아등바등 성공했을지도 모르지.’

간혹 어린 나이에 두각을 드러내며 강림을 성공하는 자도 있기는 하니까.

하지만 오랜 시간 수련해 온 사이벨과 티스베가 같을 수는 없는 법.

[힘의 격차를 보여 주지. 지금이라도 순순히 따라오면 다칠 일은 없을 거요, 공녀.]

[기대할게. 난 조절이 좀 서툴러서.]

티스베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를 둥글게 에워쌌던 화살이 쐐액 소리를 내며 빠르게 공중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티스베의 위에서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바위들이 가공할 만한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화살이 방벽을 뚫기 시작하자 사제들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크윽!”

“방벽이 깨집니다, 주교님!”

“화, 화살이 너무 깊게 파고들어옵니다!”

[버텨라! 조금만 더 버티면 저쪽에서도 마나가 떨어질 것이다! 수는 우리가 더 많다!]

빠르게 떨어지는 사기에 사이벨이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그 역시도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렇게나 공격을 퍼부을 수 있다고?’

화살은 생성되는 속도와 쏘아지는 속도가 거의 비슷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무한으로 쏘아지는 화살을 막아 내야 하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그뿐이 아니다.’

사이벨이 공격하는 속도는 티스베가 공격하는 속도와 거의 비슷했다.

물고기자리의 권능은 전투에 특화된 것은 아니었으나, 사물을 마음대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하면 얼마든지 전투용으로도 활용도가 좋은 권능이었다.

그래서 사이벨은 티스베 위로 바위 비를 내리고 있었는데, 문제는 티스베가 조금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니, 이 와중에 또 다른 권능까지도 빌어 오고 있다.

화살로 모든 바위를 뚫어 가루로 만들고, 얇은 방벽을 둘러 가루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가공할 만한 힘을 실은 공격까지.

[말 해! 말 안 해? 누군지만 말하면 살려 준다니까!]

쾅! 쾅! 쾅!

화살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큰 폭격이 연달아 방벽을 때렸다.

그렇잖아도 마나를 거의 소진한 사제들이 대부분이었던 탓에, 방벽을 유지하는 사제들의 낯빛 역시 파랗게 질려 갔다.

사이벨의 낯빛 역시도.

‘말도 안 돼! 이런 게 가능한 사람은 신전에서도 본 적이 없다!’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위험하다.’

사이벨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 많은 인원을 전부 순간이동 시키려면 더 이상 마나를 쓰는 건 위험했다.

[점화! 점화해라! 성녀를 데려가는 건 포기한다! 서둘러 점화하고 자리를 피한다!]

“예, 주교님!”

사제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폭탄의 기폭장치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머잖아 기폭장치에 달린 시계가 째깍,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 됐습니다!”

[미리 연습했던 대형으로 모여라!]

사이벨의 지시에 사제들이 재깍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티스베 역시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이런 미친……!]

처음으로 그녀의 낯에 낭패감이 비쳤다.

엑스라트의 말대로 에스텔을 데려가는 게 목적이라면 아직 폭탄을 터트리지 않았을 거라는 계산이 있었는데, 사이벨이 그걸 무시하고 도망치겠다는 결단을 내려 버린 것이다.

‘방벽도 거의 다 깼는데!’

이교도 사제들은 이제 탈진 직전이었다.

물론 티스베 역시 상태가 그렇게까지 좋은 건 아니었지만, 방벽만 내려가면 하나씩 잡아 조지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런데 이대로 이교도들이 도망쳐 버리면 정보는 얻지도 못하고, 점화된 폭탄만 남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티스베가 저도 모르게 주춤하자 기세 좋게 끌어올려지던 마나가 역류하며 강림이 해제되었다.

“쿨럭!”

뱃속이 난자당하는 감각과 함께 선혈이 한 움큼 티스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이벨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동한다!]

대형을 갖춘 이교도들의 외곽선을 따라 일제히 빛이 차오르기 시작하고, 반대로 사이벨 주변에서 광활하게 넘실대던 푸른 빛이 점차 줄어들어갔다.

마나가 쑥쑥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크윽!]

생명체를 순간이동하는 것은 발동부터가 고된 일이다.

하지만 사이벨은 마지막으로 챙겨야 할 것을 잊지 않았다.

‘칼릭스트 공녀도 챙겨 간다.’

저 여자가 죽으면 분명 그 제정신 아닌 자가 그들의 교단을 도륙 낼 것이다.

하여 빛이 9할 정도 차올랐을 즈음, 사이벨은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티스베에게로 빠르게 이동했다.

‘어차피 강림도 풀렸고.’

이대로 낚아채서 저 대형에 끼워 같이 이동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럼 이건 제가 이긴 판이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사이벨이 티스베를 덥석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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