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처음 의식을 차리고, 모든 상황을 전해들은 티스베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야…….’
내 망명은 이제 물 건너갔구나.
고작 사흘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사이에 사방에서 아주 속이 시원하게 티스베의 계획을 날려 먹어 주었다.
“칼릭스트 공녀의 활약이 담긴 영상구를 복제하여 제국 전역으로 퍼트려라!”
킬리안은 제멋대로 편집한 영상구로 티스베가 숨겨 왔던 힘을 전부 공개했고.
“공녀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공녀님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죽은 목숨이었을 거예요. 그때 화살이 날아오는데, 공녀님이 손을 뻗으니까 흙으로 된 벽이……!”
에스텔은 사교계에서 활발하게 본인이 직접 겪은 무용담을 전파하며 티스베의 명성에 힘을 실어 주었으며.
“티스베에 대해 한 마디라도 나쁘게 말을 얹는 놈이 있다면 다시는 혀를 놀리지 못하게 해주겠다.”
알마스가 쏟아져 들어오는 물에 기가 막히게 노를 젓기 시작하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노베르 백작을 비롯해 티스베를 내쫓으라고 외치던 가신들은 전부 요직에서 밀려나 좌천당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가신들의 반대가 꺾이자 알마스는 본격적으로 칼릭스트의 이름을 무기로 써먹기 시작했다.
그간 신나게 티스베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려 대던 가십지들은 전부 때 아닌 날벼락으로 도산 위기에 처했고, 다른 신문사들은 칼릭스트의 알력을 받아 티스베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며칠이나 지났다고 수도에 내가 마나를 다룰 줄 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수도만 없게요? 지금쯤이면 제국 전역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마흘론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정보를 다루는 S급 길드장답게, 그의 말은 과장이 없었다.
실제로 지금 먼 눌란 산맥에 주둔한 기사들까지도 티스베의 무용담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조디악으로 흘러들어왔으니까.
덕분에 칼릭스트 공저에는 손님과 초대장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물론 예전에도 많이 오긴 했지만.’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쏟아진다.
“빌어먹을.”
게다가 신전에서도 꽁지에 불이 붙었다.
티스베를 팔아먹어서 책임을 피하려고 했는데, 도리어 티스베가 화려하게 급부상해 버리다니?
게다가 하필 사건이 일어난 곳이 성역인 데다 이교도들이 사제로 잡입해 들어온 탓에 신전은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신전이 꽁지에 불이 붙어서 티스베에게 제발 한 번만 만나자고 사정을 하게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
‘당분간은 만나 줄 생각도 없지만.’
단순히 신전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신전에서는 분명 내가 쓴 게 신성력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봤을 테니까.’
티스베는 다양한 성좌의 힘을 빌려 썼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자주 썼던 건 궁수자리의 권능이었다.
이유는 별거 없다.
‘내가 궁수자리에 태어났으니까.’
신성력과 마법을 떠나, 기본적으로 별자리는 본인이 타고난 것이 가장 다루기 쉬운 법이다.
게다가 시기상으로도 궁수자리가 인접한 시기이기 때문에 더더욱 써먹기 편했다.
‘문제는 궁수자리가 신성력이 아니라는 거지.’
궁수자리의 권능은 마법에 속했다.
그리고 신전에서 이걸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다.
‘신성력과 마법을 여러 개 다루는 것도 알아봤겠지.’
그에 대한 질문을 듣게 된다면 무슨 대답을 내어줘야 할지 모르겠다.
대충 성녀라서 가능했다고 얼버무리면, 왜 그걸 여태 숨겼느냐고 물을 테니 더더욱 문제다.
확실한 거 하나는.
‘신전에서 날 더 이상 놓아줄 리 없다는 거지.’
신전뿐만 아니라 황실에서도, 칼릭스트에서도 전부!
‘적당히 쫓겨나면 조용히 세이즈로 망명하는 게 계획이었는데.’
이제는 두 번쯤 죽었다 깨어나도 가망이 없어 보인다.
차라리 정신이 붙어 있었더라면 어떻게 미리 손이라도 썼을 텐데.
‘내가 기절해 있는 사이에 전부 일을 쳐 버려서 손 쓸 방법도 없고!’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야.
티스베가 머리를 부여잡자, 마흘론이 과도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런데, 저는 아가씨가 왜 이러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잘된 거 아닙니까? 이제 다들 아가씨를 좋아하는걸요. 아가씨가 망명할 이유가 요만큼도 없단 말입니다.”
“……그래, 그건 맞지.”
현실적으로 따지자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진범은 못 잡았지만, 나는 이제 성녀를 넘어 영웅이 됐고. 할아버지도 나한테 잘해 주시고, 에스텔도 세례를 받았다니까 내가 더 신경 쓸 것도 없지.”
“그래요! 그런데 뭐가 문제인 겁니까? 그냥 이 유명세로 잘살면 되잖아요!”
“난 원래 유명했어. 마흘론. 기억 안 나?”
그리고 한순간에 몰락했지.
티스베가 시니컬하게 덧붙였다.
허공을 응시하는 티스베의 금안은 염세와 회한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난 여전히 모르겠다, 마흘론. 난 이곳이 싫어.”
악녀라고 줄곧 매도해 놓고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성녀니 영웅이니 추앙하는 걸 보라.
저들이 정말 모두 기꺼운 마음으로 나를 보고 있을까?
“한순간에 뒤바뀐 평판이야. 또 바뀌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어. 혹시 알아? 이래 놓고 나중에는 또 그 사망 사고 얘기를 꺼내서 날 몰아갈지.”
사람들이 지긋지긋했다.
아니, 이 세계가 지긋지긋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만들어 놓고는, 이제 와서 웃는 낯으로 사탕을 내밀면 잡을 거라 생각한 걸까?
성녀라고 불리는 것도 악녀라고 불리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에스텔이 그러더라. 떠나서 행복할 준비가 됐냐고.”
“……아가씨.”
“우습지. 그제야 내가 도망칠 생각만 했다는 게 느껴지더라.”
티스베가 픽 웃으며 턱을 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늘 떠날 생각만 가지고 살았다.
이곳의 사람들이 자신을 금방 잊고 아무렇지 않게 지낼 거라고.
물론 그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내가 이곳을 잊을 수 있을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예전에는 굳이 물을 것도 없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목숨도 당신의 것보다 중하지 않습니다.
티스베는 무심코 소어를 떠올렸다.
사실, 꽤 많이 떠올렸었다.
그날 자신을 찾아왔던 소어의 흐트러진 표정을.
자신을 버리고 떠나라고 말하던 소어의 진심 어린 낯을.
그걸 마주했을 때의 감정을.
그러다 보면 문득 의문이 드는 것이다.
‘내가 정말.’
소어를 잊을 수 있을까?
“……이젠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쉽지 않은 결정이겠지만, 글쎄요. 저는 아가씨가 좋으면 다 좋습니다.”
“우연이네, 나도 그런데.”
티스베가 잘게 웃으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천정을 향해 떠오르는 해가 느리게 들이치는 일상의 풍경.
오늘은 티스베가 처음으로 외출을 허락받은 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동안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아마 몇 시간 후면 만날 수 있으리라.
티스베는 책상 한쪽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 위에는 단정하고 유려한 필체로 문장이 적혀 있었다.
간밤에 소복이 쌓인 눈처럼 오롯하고 포근한.
[아침 해가 점점 이르게 뜨는 것이 보여, 뵙기를 고대하는 마음이 저녁부터 깊었습니다.]
대중없이 움튼 버들강아지 같은 문장.
그를 내려다보는 티스베의 금안이 듬뿍 떠낸 꿀처럼 달콤한 빛을 띠고 있었다.
“마흘론. 나…… 떠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
소어와 함께라면 용기를 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소어도 분명 그녀의 결정을 반겨 주리라.
티스베는 소식지를 들고 활짝 웃었다.
어쩐지 앞으로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앞으로 좋은 일만 일어날 것 같다고?
그래, 그랬지.
분명 몇 시간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이런 빌어먹을!!!
티스베의 한이 서린 절규가 애달프게 울려퍼지는 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러니까, 얼마 전 티스베가 고대하던 소어와의 만남을 가졌던 순간으로.
* * *
“소어!”
티스베의 부름에, 서 있던 사내가 뒤를 돌았다.
상대를 확인하기도 전에 낯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 피어 있었다.
그를 그렇게 부를 만한 사람이 오직 한 명뿐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까.
“티스베.”
그렇게 그녀를 부르는 소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더 다정했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의 만남을 고대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환희로 연하게 올라온 홍조가 그의 얼굴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결 좋은 금발이 반쯤 흘러내려 이마를 덮은 낯은 티스베의 기억보다 조금 여위었고, 조금 더 날렵한 느낌이 났다.
어쩌면 서늘하다는 말이 어울릴 법한 낯이다.
그러나 조금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저 낯에서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에 온정이 가득 담겨 일렁이는 것이 선명하기 때문일까.
티스베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소어를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옷자락에 묻은 서늘한 공기와 뒤섞인 은은한 체향이 코끝을 간질여,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보고 싶었어요, 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