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티스베가 그런 결심을 하기까지는 일주일가량이 걸렸다.
그녀는 외부와의 단절을 모두 끊고 식음을 전폐해 가며 방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방 안에서 그녀는 많이 울었고, 많이 혼란스러워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처음으로 방향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열병 같았던 일주일이 지나.
거품처럼 잔뜩 일었던 감정이 한차례 꺼지고 나자 명확해졌다.
‘여전히 나는 답을 얻지 못했어.’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왜 나를 속였는지.
그래 놓고 왜 파혼장을 내밀고, 또 왜 법정으로 뛰어 들어와 자백한 건지.
당신과 보낸 시간 중…….
‘정말로 내게 진실한 적이 있었던 건지.’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이런 걸 묻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티스베는 분명 사람을 좋아했지만, 한 번 등을 돌린 상대에게는 다시는 같은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아마 정체를 알게 된 순간 실망하고, 속상해하고, 이번에는 정말로 떠나려 했겠지.
더 이상 그 누구와도 교류하고 싶지 않아 아무도 쉽게 발 들이지 못할 곳을 찾아 처박혀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소어였다.
티스베가 가장 울고 싶었던 순간에 옆에 자리해 준 사람.
죽음의 순간에서조차, 제 목숨보다 티스베를 더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
-어느 목숨도 당신의 것보다 중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정말 거짓이었을까.
티스베는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내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소어뿐이었다.
결심이 서자 방 밖으로 나갈 마음이 들었다.
티스베는 일주일 만에 방문을 열었다.
“먹을 걸 좀 갖다줘. 식사하고 나갈 테니까 준비도 해주고.”
그러나 돌아온 목소리는 하녀의 것이 아니었다.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어딜 가려고 그러는 게냐?”
“……할아버지.”
티스베는 알마스를 올려다 보았다.
노회하였어도 언제나 강건한 느낌이었던 알마스는 고작 그 일주일 사이에 퍽 쇠약해진 느낌이었다.
그는 주름이 몇 개는 더 는 것 같은 얼굴로 손녀에게 다가왔다.
“잠시 얘기 좀 하자꾸나.”
간만에 식사도 같이 하고.
* * *
“더 먹겠느냐?”
“이제 괜찮아요. 더 먹으면 탈이 날 거예요.”
티스베가 식기를 내려놓으며 말하자, 냅킨으로 가볍게 입을 눌러 닦은 알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놓이는구나. 네 아버지도 예전엔 자주 그랬지. 심란한 일이 있으면 음식이 입에 들어가질 않는다고 며칠을 방 안에서 보냈다.”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아버지였건만, 알마스는 종종 그와 티스베가 많이 닮았다는 말을 하곤 했다.
“네 할머니는 그런 네 아버지에게 늘 어떻게든 식사를 시키려 했었지. 하지만 나는 내버려 두곤 했다. 먹지도 못해 어떻게든 게워낼 음식이라면, 굳이 내가 식사를 권해 더 짜증스럽게 만들 필요도 없지 않겠느냐.”
그때는 오히려 먹지 못하는 아들에게 자꾸만 음식을 권하는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알마스는 말했다.
어차피 먹지도 못하는 거 뭐하러 권하는 걸까? 그냥 내버려 두면 어련히 잘 지낼 것을.
저러다 배가 고프면. 속이 나아지면 알아서 먹겠지.
괜히 더 성가시게 굴지 말고 내버려 두자,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네 아버지가 죽고…… 시간이 지나니 아내가 이해가 가더구나. 아내라고 아들이 음식을 먹지 못하는 걸 정말 몰라서 그렇게 음식을 권했겠느냐? 그냥, 그걸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마음인 거지.”
아들이 속앓이를 하느라 배를 곯고 있는 걸 도저히 볼 수 없는 마음.
그러니 어떻게든 뭐라도 먹여 보려 과일을 갈아 보거나, 어죽이니 스튜니 하는 것들을 끓여 한 숟갈만 먹어 보라며 그렇게 방문을 두드려 댔던 것이리라.
그걸 아들이 죽은 이후에야 이해했다.
아들이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볼 때마다, 혹은 아들 생각이 날 때마다.
그때 한 번이라도 더 식사를 챙길 것을.
그때 조금만 더 신경 써 줄 것을.
“죽은 아이를 두고 후회하면 무엇하겠느냐마는, 나이를 먹으면 느는 것이 후회 뿐이다.”
그제야 알마스는 자신이 위한다는 말로 무신경함을 포장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를 정녕 위하는 길이 어느 쪽인지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네 할머니가 그랬듯 하나하나 챙기다 보면 분명 아이 입장에서는 답답해 하겠지. 하지만 내 방법이 옳지 않았던 것도 이미 충분히 알았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네가 산 증인이 아니냐.”
“……저는.”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목이 막혀 말을 하지 못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된다. 네게 뭔가를 기대하고 하는 말이 아니니까. 단지 나는…… 오늘까지도 네가 나오지 않았다면 네 방문을 두드렸을 거다. 그리고 식사를 하고 싶지는 않은지 물었겠지.”
더는 티스베를 두고 무신경하게 굴 수 없다는 말을, 알마스는 퍽 돌려서 말했다.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조심스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알마스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너도 방 밖으로 나온 이상 생각이 정리되었을 테니 묻겠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예전이라면 알아서 하겠거니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죽은 아내라면 이렇게 하자며 권했겠지.
알마스는 둘 모두 하고 싶지 않았다.
하여 그는 어렵게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앞으로의 네 생각이 궁금하구나.”
그렇게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물음에,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망명을 할 생각이었어요, 할아버지.”
알마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훗날 회상하자면, 그날은 그가 여태껏 한 선택 중 두 번째로 훌륭했던 선택을 내린 날이었다.
* * *
티스베는 알마스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모든 걸 털어놓았다.
조디악의 숨겨진 주인이라는 것부터 마도서를 구해 신성력과 마법을 익혔고, 이를 기반으로 마법국 세이즈로 가려고 했다는 것까지 모두.
물론 망명에 대한 이야기 역시 빠지지 않았다.
“저는…… 모든 게 지긋지긋했어요. 그래서 떠나려고 했고요.”
말 한 마디 없이 떠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속이 상해 인상을 쓸 법한도, 알마스는 표정 한 번 바꾸지 않고 묵묵히 티스베의 말을 들었다.
그러다 소어와 얽힌 이야기가 나오자 한 번 눈썹을 꿈틀한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소어에 대한 걸 확인해보고 싶었어요. 확인할 수 없다면…… 그냥 망명할 생각이었고요. 소어가 그런 걸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요.”
이야기가 끝나자 알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조금은 망설이는 투로.
“이야기해줘서 고맙다.”
“……죄송해요.”
“아니, 내가 미안하지. 그보다, 이젠 뭘 할 생각이냐?”
“소어를 만나서 대화해볼까 싶어요.”
어쨌든 결국 인간관계는 대화로 해결이 가능하다.
티스베가 알마스를 한때 남처럼 여겼지만, 이제는 모든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았나.
전부 알마스가 행동으로 보여주고, 말로 진심을 드러낸 덕분이었다.
“소어의 진심을 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로 이 나라를 떠나든, 혹은 이곳에서 또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시작을 하든.
후자의 경우는 굉장히 두려운 일이 될 것이다.
‘할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어.’
차라리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고 산다면 편할 텐데.
티스베는 제 성격 상 그게 어려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무리를 제대로 맺고 싶은 것이다.
“어쨌든 얘기를 해 보면 그땐 또 길이 생기겠죠.”
그러나 그 얘기를 들은 알마스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네 뜻은 알겠다만, 나는 반대다.”
“……왜죠?”
티스베의 얼굴 역시 얕게 굳어들었다.
알마스에게 겨우 조금 열어 보인 마음이 다시 굳어 들려는 순간.
“살바토르 공작은 현재 아무도 만날 수 없으니까.”
이어진 말에 티스베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예?”
“설마 몰랐던 게냐? 그날 이후 증거가 진짜라는 게 확인되자마자 살바토르 공작은 전장으로 추방당했다. 아마 나흘 쯤 지났을 텐데.”
“그, 그렇게나요?”
“하녀가 알려 주지 않더냐?”
“그, 그게…….”
얘기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가씨, 그, 약혼자 분의 일로…….
-약혼자 분의 일로 심란한 거 맞으니까 말 걸지 마. 또 열면 여기서 창문 열고 뛰어 내릴 거야.
아마 이때쯤……?
“그럼 추방은, 언제까지……?”
“10년. 혹은 분쟁이 해결될 때까지.”
“하하, 10년이 지나는 게 빠르겠네요.”
이런 빌어먹을.
어떻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