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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89화 (89/121)

89화

그 순간은 무언가 통하기라도 한 듯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어의 호흡이 가늘게 떨려 나왔다.

“제가, 싫지 않으십니까?”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어요.”

“그때도?”

“그때도.”

그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소어가 티스베를 감쪽같이 속여 왔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던 그 순간을 의미함이다.

“많이 울긴 했어요. 당신마저도 날…… 정말 배신한 거라면, 다시 누군가를 믿을 자신이 없을 것 같았거든요.”

티스베의 눈꺼풀이 느리게 오르내렸다.

그 금빛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질 때마다 소어는 조급함을 느꼈다.

언젠가는 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을 것 같아서.

눈꺼풀 오르내리는 그 찰나마저도 숨이 막혔다.

그것을 조금도 모르는 티스베는 그저 소어를 반쯤 끌어안고서, 혹은 반쯤 흘러내리고서 말을 이을 뿐이다.

“당신이 날 속인 건 맞지만, 그래도 당신이 날 배신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괜찮아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분명 날 싫어했을 겁니다. 기만자라고 했겠죠.”

“난 좋은데 뭐 어때요.”

칭얼거리는 듯한 티스베의 말에 소어가 느른하게 웃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상냥할 수 있고, 동시에 한없이 매정해질 수 있는 티스베가 제게만 이토록 관대해지는 순간을 사랑했다.

그때는 정말이지, 온 세상이 오직 저 하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토록 괴롭고 또 가슴 벅찬 순간이 있을 수 있을까.

“티스베.”

그러나 이런 순간에조차 그가 뱉을 수 있는 것은 고작 티스베의 이름 하나뿐이었다.

그 이상의 말을 꺼내려고 하면 둑이 무너지듯 와르르 쏟아질 것 같아서.

호명에 티스베가 눈꺼풀을 들어올려, 자신을 지탱하고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 앞에서는 언제나 여유를 잃는 그 얼굴을.

이유 없이도 괴로워 보이는 듯한 그 표정을.

그 굴곡을 따라 손끝을 움직여 본 티스베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젠 나도 당신이 말한 걸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무엇 말입니까?”

“누군가를 원한다는 감정 말이에요.”

소어의 것처럼 열렬하진 않아도, 제 안에서 명확히 박동하는 감정이 존재했다.

그리고 지금 그 맥박은 더욱 선명해져 있었다.

티스베의 시선이 짙어지자 소어가 인상을 썼다.

“당신이 그런 눈으로 볼 때마다…….”

“볼 때마다?”

“……제 인내가 얼마나 하잘것없는지 깨닫는 기분입니다.”

티스베가 픽 느슨하게 웃었다.

“소어, 너무 많이 참는 것도 병이래요.”

티스베의 말이 끝나고, 시선이 맞닿았다.

그보다 더 확실한 신호가 있을까.

그 다음 순간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회상하기로, 첫 키스는 귀부 와인 맛이 났다.

* * *

취기를 빌어 한 입맞춤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티스베에게 어떤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나, 소어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것도 연애 감정으로.’

혹자는 확신하기까지 오래도 걸렸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티스베에게는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소어를 인간으로, 그리고 지인으로 많이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얼마든지 그릴 수 있다.

하지만 티스베의 도화지는 이미 노란색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였다.

그 위에 분홍색을 아무리 칠해 봐야 노란색처럼 보이기 마련인 셈이다.

무엇보다 티스베가 가지고 있는 방어 기제가 그런 자각을 더욱 늦게 만들었다.

‘아마 연회의 일이 아니었더라면 자각하기까지 조금 더 오래 걸렸을지도 모르지.’

연회에서 소어가 다른 사람을 파트너로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았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사실 티스베는 그 순간 강한 질투를 느꼈다.

그걸 느낀 이상, 티스베도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이제 명확해졌으니까, 소어에게도 말할 수 있겠다.’

소어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다 말해줄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티스베는 남은 일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기로 했다.

해결해야 하는 일들을 다 털어내고, 홀가분한 상태로 소어에게 제 감정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환영회로부터 이틀이 지난 오늘.

티스베는 신전에 와 있었다. 물론 베일을 쓴 채로.

“이쪽이 성물들이 모여 있는 방입니다, 로즈릴 영애.”

약속대로 안내역을 맡은 칼뱅이 그녀에게 신전을 안내해 주고 있었다.

“영애께서는 성물을 사용하시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셨던가요?”

“네. 황실의 일이라 자세한 걸 밝힐 수는 없지만, 명령은 명령이라서요.”

테레지아를 연기하는 티스베가 조금 난처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 그녀가 연기하고 있는 테레지아의 설정은 대충 이러했다.

‘겉으로 밝힐 수는 없는 무언가의 중대한 임무를 맡은 황태자 직속 부하.’

황태자 직속 부하라는 것만 빼면 얼추 맞으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만약 뭔가 문제가 생기면 킬리안이 수습할 수 있는 선의 거짓말이기도 하고.

성물, 다른 말로는 마도구를 일반인이 쓰게 해달라고 하면 의심을 사기 십상이라 거짓말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도 그럴 게, 누가 대뜸 와서 “이 근방 마나의 분포를 파악할 수 있는 성물을 쓰게 해주십쇼.”라고 하면 과연 그 누가 내어준단 말인가?

심지어 현재까지 밝혀진 게 마물이 곳곳에서 사라졌다는 것밖에는 없는 상황인데.

물론 성녀라는 걸 밝히면 성물을 사용하는 일은 좀 더 쉬워지겠지만, 대신 그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이 배는 어려워질 테니 안 된다.

다행히 칼뱅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 만큼이나 호락호락한 사람인 듯 싶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한쪽에서 일지로 보이는 것을 가져와 펜과 함께 내밀며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사용자 기록을 남겨야 하니 생년월일과 별자리만 여기에 적어주시겠습니까?”

생년월일과 별자리.

티스베는 잠시 멈칫했지만, 어색하지 않게 칼뱅이 내민 것들을 받아들었다.

‘성물에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지 모르니 거짓으로 생년월일을 적었다가 들통나면 곤란해진다.’

사용자가 적어 낸 기록과 실제 사용자가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절차라도 있으면 상황이 난감해질 것이다.

그래서 티스베는 정직하게 본인의 생년월일과 별자리를 적어냈다.

얼굴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생년월일을 설마 기억할까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그런데, 일지를 받아든 칼뱅의 표정이 묘해졌다.

“영애. 궁수자리라고 적어내셨는데, 이 생년월일에 해당하는 건 궁수자리가 아닙니다.”

“네? 거짓으로 적은 건 아닌데요.”

“아, 제가 말을 오해하게끔 했군요. 거짓으로 적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이 생년월일에 해당하는 별자리가 잘못 알려져 있다며, 칼뱅이 허허 웃었다.

“영애, 황도 12궁을 아시죠?”

“물론 알고 있죠.”

“사실 정석대로라면 거기에는 별자리가 12개가 아니라, 13개가 있습니다.”

단지 요즘에 와서는 세지 않을 뿐 숨겨진 별자리가 하나 있다고 칼뱅은 설명했다.

“바로 뱀주인자리입니다. 대부분 궁수자리로 알고 지내지만, 실상은 다르지요.”

“제가…… 뱀주인자리라고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티스베의 낯이 굳었다.

그녀는 지난 몇 년 간 신성력과 마법에 대한 모든 정보를 긁어 모아 왔다.

그런 그녀가 알지 못하는 내용을, 저 주교는 아무렇지 않게 읊고 있다니?

낯선 긴장감이 티스베의 뒷목을 타고 쭉 퍼졌다.

그 탓에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걸까.

“그런 표정하실 것 없습니다. 뱀주인자리라고 해서 대단한 결함이 있다거나 하진 않으니까요. 단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황도 12궁인 탓에, 이 별자리를 타고나면 기본적으로 마나 친화도가 바닥을 찍을 뿐입니다.”

“……그럼 더더욱 저는 아닌 것 같은데요. 저는,”

“그렇기 때문에 영애가 특별하신 거죠. 영애는 남다른 마나 친화도를 가지고 계실 테니.”

“그게, 무슨-”

칼뱅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 안에 중압감이 가득 들어찼다.

“커헉,”

짓누르는 무게에 저도 모르게 밭은 기침이 튀어나오고, 몸이 휘청였다.

조금 전까지 허허실실 웃기만 했던 주교에게서 어떻게 이런 힘이?

‘아니, 단순한 주교면 이런 힘이 나올 리 없지.’

티스베는 이교도의 주교와도 맞붙어 본 사람이었다.

이교도들은 기본적으로 신전에 소속되어 있다가 파문을 당한 사람.

그러니 약간의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이교도들의 수준과 신전의 수준은 얼추 비슷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티스베는 당시 주교를 어려움 한 번 없이 압도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마나를 끌어올린다고 한들 이 마나를 버티는 게 고작.

마치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도 마주한 것 같은 감각이다.

티스베는 몇 번 더 잔기침을 하고는, 안간힘을 써 겨우 허리를 폈다.

이런 중압감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칼뱅의 모습이 보였다.

덕분에, 그의 정체를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오직 한 명.

“칼뱅, 당신……. 교황이군.”

모든 사제의 위에 군림하는 사람.

그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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