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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92화 (92/121)

92화

티스베는 숲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감지했다.

'숲이 너무 고요해.'

인기척이 나서 숲 짐승들이 전부 숨어 버린 걸까?

간간이 티스베가 땅을 밟을 때 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꼭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그녀 혼자만 남은 것처럼.

주변을 빼곡하게 둘러싼 높다란 나무들만이 여전할 뿐, 숲에서는 어떠한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숨을 죽이고 몸을 숨긴 짐승들처럼 침묵하는 공기만이 티스베의 주위를 맴돌고 있을 따름.

어찌 보자면 단순히 사냥꾼들을 보아 온 짐승들이 인기척을 느끼고 도망을 간 게 아닐까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마나는 처음이야.'

마나에는 수많은 사념들이 섞여 있다.

에스텔은 특히나 그런 사념을 잘 잡아내는 편이었고,

티스베는 그 사념을 느끼는 기감이 특별히 발달한 편은 아니었다.

단지 공기 중에 섞인 향기를 코로 느끼듯,

주변의 마나에 어렴풋한 감정들이 섞여 있음을 느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지독하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알아채는 것이 늦었다.

사실 숲에 들어온 직후에는 에스텔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숲 어디를 둘러보아도 에스텔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제주변을 둘러싼 기류마저도 조금 이상하다는 것이 와닿은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분명 에스텔은 숲속으로 오면 눈에 보이지 않게

녹아들어 있는 마물들의 사념들과 짐승들의 사념이

잔뜩 뒤섞인 게 느껴진다고 했는데.

기감이 발달하지 않은 제게도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느껴질 정도라면 결코 정상적인 상태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나마 이유로 짐작할 만한 건.'

나 정도인가.

티스베는 나무 틈으로 비치는 햇살을 따라 걸으며 생각했다.

숲에 맹수가 나타나면 다른 동물들은 으레 숨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그러니 지금 이 상황도 티스베가 두려워 다들 도망을 친 거라고 하면 얼추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난 딱히 뭔가를 한 게 없는데?'

숲 짐승이야 대충 인기척이 났으니 사냥꾼 피하듯 도망을 갔다고 하더라도, 마물들까지도 도망을 갈 이유가 있나?

의문하던 차에 티스베의 걸음이 호숫가에 멈추었다.

늘어지는 오후의 햇살이 호수면에 반짝이며 부서지고 있었다.

그 위로 은발 여자의 모습이 비쳤다.

시니컬하고 오만해 보이는 은발 여자의 모습.

이제는 너무 당연해진 이 세계에서의..

“.....?"

무기질적인 시선으로 호수면을 내려다보고 있던 티스베의 미간이 돌연 찌푸려졌다.

분명 호수면에 비친 것은 익숙한 '티스베'의 얼굴이었는데, 뭔가 이상한 점이 느껴졌던 까닭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호수 속 금빛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마치 눈을 뜨고 잠을 자는 것처럼, 혹은 정말 의식을 잃은 것처럼.

척 보기에도 그건 '자신'의 표정이 아니었다.

티스베가 의아함에 수면으로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갔을 찰나.

수면에 비친 티스베의 모습이 흐려지나 싶더니,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 탓에, 수면으로 기울어져 있던 티스베의 몸이 일순 균형을 잃었다.

"........! 알레-"

알레샤, 하고 티스베가 반사적으로 물고기자리를 소환하려는 순간.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이 죽으면 무엇이 되는지 알아?]

그 순간.

티스베는 입을 틀어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첨벙 소리와 함께 멀어져가는 수면만이 티스베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 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가라앉는 몸과, 나란히 가라앉는 의식 속.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 희망은 필히 절망을 낳는 법이지.]

어떻게 몰라볼 수가 있을까.

그건 티스베, 그녀 본인의 목소리였다.

* * *

"저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성하."

그 말에 창가에 서 있던 인자한 인상의 노인, 칼뱅이 몸을 돌렸다.

그의 앞에는 그보다 스물은 덜 먹었음직한 중년 남성이 불만 어린 얼굴로 서 있었다.

그 남자는 살바토르 신전의 수장격 주교 헤레이쇼로, 본인이 타고난 양자리답게 성격이 상당히 불같은 면모가 있었다.

교황에게 이렇게 직접 불만을 말하러 올 정도였으니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칼뱅은 허허 웃으며 모르는 척 입을 뗐다.

"헤레이쇼,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군."

"저뿐만 아니라 신전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성하. 정말 신탁에 대한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글쎄, 상황에 따라 어떻게 될지는 또 모를 일이지. 모든 것은 주신께서 인도하는 대로 이루어질 일."

"하지만 성하. 이번 신탁은 분명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별로 만들어진 마지막 오류라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녀가 성녀로 추앙받아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차 말하지만 신탁은 그 의미가 분명하게 밝혀지는 시기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섣불리 해석해서는 안 된다네. 벌써 성녀의 일로선례를 겪어 놓고도 이러는 겐가?"

'칼릭스트의 성녀'가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라고 스무 해가 넘게 믿어 왔다가, 그 사실을 번복하면서 신전의 평판이 땅으로 곤두박질 쳤던 것이 언급되자 헤레이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제 의견은 다릅니다, 성하. 그러다 정말로 큰 위험이 도래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신탁이 내려온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지금이야말로 칼릭스트 공녀를 죽여-흡!"

"헤레이쇼."

부드러운 호명에, 헤레이쇼가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의라기보다는 누군가가 억지로 입을 닫게 만든 꼴에 가까웠다.

"내 자네의 신심을 의심하지 않으나, 그 말은 꼭 주신께서 큰 위험을 안배하고 계시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죄, 죄송, 큭, 죄송합니다. 실언.… 했습니다."

"하하, 뭘 그렇게까지.”

그제야 틀어막혔던 헤레이쇼의 호흡이 누그러졌다.

헤레이쇼는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서 인자하게 웃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젠장. 힘의 차이가 존재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다니.

지금은 저렇게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어도 그 실체는 역시 교황이라는 건가.

사실 헤레이쇼는 지금의 교황을 썩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신탁을 들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교황의 자리가 결정되기 때문에, 교황의 실력에 대해서는 늘 의견이 분분했다.

특히나 이번 칼릭스트 공녀와 관련한 신탁에 대해 칼뱅이 다수의 의견과 반대되는 행보를 결정지으며 그에 대한 여론은 더욱 나빠졌다.

'뒷방 늙은이인 줄만 알았는데.'

그가 숨 쉬듯 사람을 깔아뭉갤 수 있는 실력자라고는 그 누구도 말해 준 적이 없었다.

분을 삭이며 겨우 호흡을 추스르는 헤레이쇼의 어깨를 토닥이며, 칼뱅이 인자하게 입을 열었다.

"헤레이쇼. 자네는 본 교단의 존재의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주신의 뜻을 세상에 전파해 세상을 더 윤택하기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우리는 주신의 손이자 발. 가장 낮은 곳에서 임하는 그분의 종이지. 그렇다면 우리만으로도 주신의 의지를 행하는 것은 이미 충분할 텐데, 어째서 주신께서는 성녀라는 존재를 내려 주시는것이겠나?"

"그건."

이번에는 헤레이쇼도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신탁이 성녀라고 부르니 성녀라고 따랐을 뿐.

신의 의중을 파악해 보려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해답을 묻듯 칼뱅을 바라보았지만, 교황은 늘 그렇듯 의중 모를 얼굴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헤레이쇼. 인간들은 어리석다네. 어리석은 양들은 늘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지. 이따금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말이야."

세상은 언제나 주신의 뜻대로 돌아가지만은 않고, 그들은 이따금 재앙을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그러한 돌이킬 수 없는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성녀일세."

종말 없는 구원이 존재하지 않듯, 재앙이 없다면 성녀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닭과 달걀 같은 관계.

성녀가 재앙을 불러오는 것은 어쩌면 또한 지극히 당연한 일일 터다.

"그러니 기다리게, 헤레이쇼."

우리에게 닥칠 것이 종말일지, 구원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일테니.

* * *

아득한 의식 속.

"......님, 공녀님! 정신이 드세요?"

티스베는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희미한 불빛조차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수준의 어둠.

그리고 그 사이에 서 있는 에스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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