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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11화 (111/121)

111화

왜 처음부터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티스베가 사라진다면 현 상황에서 가장 곤란해질 것은 소어였다.

귀빈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그 지역의 영주가 가장 먼저 그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으니까.

‘게다가 소어는 추방당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어.’

문제를 일으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성녀가 둘씩이나 사라지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분명 여론이 적잖이 위태로울 것이다.

티스베는 귀족이라는 작자들이, 그리고 악의적인 기사들이 한 사람을 어떻게 궁지로 몰아가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별 의도 없었던 언행에서 꼬투리를 잡아 내 혐의를 뒤집어씌우면 군중이 개떼처럼 몰려들어 물어뜯어 댄다는 것도.

그녀는 보지도 않은 기사의 헤드라인들을 몇 개고 떠올릴 수 있었다.

이교도를 후원했던 소어의 과거와 성녀 실종 사건을 연관 짓고 있을 수많은 기사들.

그리고 아무 연관이 없는 과거 행적들까지도 끄집어내 의혹을 낳고 있을 것까지도.

‘……숨이 막혀.’

티스베는 그제야 자신이 생각보다 그 사건에 충격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태 애써 무시하며 살아왔던 까닭에 눈치 채지 못했을 뿐, 자신을 향하던 악의적인 기사를 마주할 때마다 희미하게 느껴왔던 메스꺼움과 답답함이 도로 되살아난 것이다.

아니, 그 역겨운 적의가 소어를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더 배 속이 뜨거운 기분이다.

티스베가 저도 모르게 입가를 가리자, 자카리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다들 살바토르 공작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견이더군요. 개중에는 어쩌면 뒤로 무슨 짓을 더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르니 당장 구금해야 한다는 의견도 왕왕 있는 것 같았습니다. 원한다면 기사라도 보여 드릴까요? 헤드라인이 아주 인상적이던데요.”

“……됐어, 필요 없으니까.”

“정말 보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추방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일까지 만들었으니 책임을 물어 목을 매달아야 한다는 얘기도 있던데-”

“필요 없다고 하잖아!”

결국 티스베가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지금 그 역겨운 기사를 보면 정말로 구역질을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치미는 분노로 배 속이 홧홧했다. 눈물이 날 것처럼 눈시울이 뜨끈했다.

어떻게 사람들은 매번 이러는 걸까? 보이는 것에 쉽게 열광하고, 쉽게 매도하고.

자카리는 정말 지독히도 완벽하게 티스베가 가진 염증을 짚고 있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티스베는 환영이 보여 준 ‘재앙’의 기억에서, 죽어나가는 것들에게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물론 연민은 존재했다. 그들의 죽음은 무고했으니까.

하지만 그 연민은 티스베에게 어떤 무게도 될 수 없었다.

그 사실에 오히려 스스로에게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는데.

“이번에도…… 이번에도 소어가 죽을지도 모른다니.”

그 사실이 뇌리에 박히자마자 사고가 정지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염증이 차올라, 증오심으로 변모하는 것이 시시각각 느껴졌다.

그를 매도하는 인간들을 전부 죽이고 싶었다. 감히 함부로 삿대질을 한 손가락을 꺾고, 가볍게 놀린 혀를 뽑고 싶었다.

소어에게 혐의가 씌워지도록 조장한 이교도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전부 절망 속에 죽어 가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뇌리를 태우는 화마는 돌고 돌아 결국 스스로를 향했다.

‘나 때문에.’

소어는 매번 나 때문에 죽을 위기에 놓이는구나.

어쩌면 제 약혼자의 앞길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소어가 아니라 나였던 건 아닐까.

‘정말이지…….’

스스로가 끔찍하게 싫어지는 순간이다.

머리를 후려치는 자기혐오가 낯설었다. 티스베는 살면서 스스로의 처지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싫다고 생각해 본 적이 굉장히 드물었으므로.

비극적인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악녀로 살아가는 와중에도 티스베는 기죽어 본 일이 없었다.

아무려면 어떠랴. 나는 잘살 수 있는데!

-아무도 곁에 없어도 괜찮아. 내 잘못이 아니잖아? 나는 혼자서도 잘살 수 있다고.

무슨 일을 겪어도 티스베가 떳떳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아꼈고, 늘 자신이 넘쳤다.

자신이 과거와 현재 어느 곳에서든 사랑하는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이 순간만을 제외하고서.

‘……소어가 날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소어는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어쩐지 코끝이 찡하고 눈시울이 시큰거려서, 티스베는 제 눈가를 공연히 한 번 훔쳤다.

그러자 자카리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런, 우시는 겁니까? 이렇게 마음이 여린 분이신 줄 몰랐는데요.”

“입 닥쳐.”

“혹시라도 절망하시는 건가 해서 말입니다.”

“절망스러울 필요가 있나.”

소어가 정말로 죽었다면 절망스러웠을 테지만, 아직 죽은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아직은 좌절할 필요가 없다.

티스베는 이제야 환영이 보여 준 ‘재앙’의 기억 속에서 느껴졌던 허무를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과거의 나는 아무도 믿고 싶지 않아 했지.’

모두에게 버림받아 무참히 죽게 되었으니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게 소어를 잃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때로는 자신보다 중요한 게 있기도 하다는 것을.

티스베가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이 된 데에는 그런 감정이 실려 있었다.

소어와 자신을 죽인 인간들에 대한 분노와, 그 원인을 제공한 스스로에 대한 혐오.

짙은 허무와 후회, 증오까지.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같은 실수는 반복할 생각이 없다.

티스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소어가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성역에서부터 그랬던 걸지도 모르지.’

그때는 단순히 소어가 죽으면 그 죄책감을 감당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 한 말일 뿐.

죄책감을 감당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소어의 죽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았다.

소어의 죽음을 견딜 바에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길을 택할 만큼 말이다.

‘결국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군.’

선택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마른세수를 한 티스베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이렇게 소어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는 건 이유가 있는 거겠지, 자카리.”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자카리의 입매가 호선으로 길게 휘어졌다.

“맞습니다. 눈치가 나쁘지 않으시군요.”

“눈치까지 따질 거 있나. 뻔한 이야기잖아? 나를 단순히 재앙으로 만들고 싶었던 거라면 내가 깨어나지 못하는 그사이에 날 죽여서 부활시켰겠지. 혹은 불구로 만들거나.”

이렇게 멀쩡하게 눈을 떴다면 답은 두 가지다.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었거나, 혹은 티스베에게서 무언가 얻어낼 게 있다거나.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르지.’

일전 에스텔이 호수에 빠진 티스베를 발견했을 때, 티스베는 얼음덩이에 갇힌 상태였다고 했으니까.

이번에도 그런 비슷한 일이 일어나서, 차마 죽이지 못하게 될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더라면 내가 깨어난 걸 알게 되었을 때 죽이려고 했겠지.’

티스베가 이곳에서 마나를 쓸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자카리의 능력으로 보자면 티스베를 죽이는 것은 손쉬운 일일 것이 분명한데도 그는 티스베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쾌하다.

“너희는…… 내게 미움을 살 게 두려운 거겠지. 아닌가?”

정확히 말하자면, 재앙으로 부활한 티스베에게 몰살을 당할 것이 두려울 거라고 해야 할까.

티스베의 물음에 자카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저희가 당신을 이곳으로 이끌어 오기는 했으나, 저희는 당신의 편이라는 걸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이지요. 신께 미움을 받고 싶은 신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 나를 내버려 뒀어야지!”

“불가합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한 것이 저희가 해온 모든 순교의 목적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신으로서 부활하는 것. 그것만이 저희의 오랜 숙원입니다.

“이런 미친…….”

티스베가 경멸어린 눈동자로 자카리를 쏘아보았으나, 자카리는 익숙하다는 듯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애초에 세상에 이해받지 못해 이곳으로 모여든 이들이었으니 경멸 어린 시선 한둘이 더해진다 한들 달라질 게 있을까.

“좋게 생각하세요. 어차피 당신에게는 살바토르 공작만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에스텔 일레르는 배신했고, 다른 이들은 당신에게 무의미하죠.”

그러니 거래를 하는 겁니다.

자카리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 티스베에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저희의 신이 되어 준다면, 당신의 약혼자를 살려 드리겠습니다. 살바토르의 이름에는 흠집조차 가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되는 방법은?”

“순교.”

짧은 대답에, 티스베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말은 좋지.

“자살하라는 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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