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조금 전, 자카리가 이런 질문을 했을 때.
“결심을 내리신 겁니까?”
“……그래.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하고.”
티스베는 살짝 아득해지는 정신으로 결심을 내렸다.
어차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도박이라도 한 번 해 보고 죽어야지.’
안전하고 확실하게 인생을 말아먹겠다는 건 역시 티스베의 신조와는 영 맞지 않는 일이다.
단지, 그 도박이라는 것이 누구나 제정신이 아니라고 기함할 만한 일이었다는 게 문제지만.
‘여기서는 마나를 쓸 수 없어.’
그리고 티스베가 아무리 귀족의 소양으로서 체술과 검술을 어느 정도 배웠다고 한들 이 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장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자카리 같은 괴물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밖에 몇이나 포진해 있을 줄 알고?
그들에게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이란 그저 농락하기 좋은 먹잇감일 뿐이다.
‘무엇보다 에스텔도 구해야 하니까.’
물론 자카리는 에스텔이 그녀를 배신했다며 구할 가치가 없다고 지껄여 댔지만, 그건 그의 의견이고.
티스베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배신을 했다고 해서 그게 죽어도 싸다는 뜻이 되진 않으니까.
‘잘잘못은 나가서 가려야지…….’
티스베는 철저하게 외면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잘못을 저질렀다고 벼랑으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도.
그런데 티스베가 이곳에서 에스텔을 나 몰라라 하면 그녀를 죽게 만든 인간들과 다를 바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에스텔이 처음부터 이교도들과 한패였을 가능성도 완전히 무시할 순 없겠지만.
‘그건 직접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러니 지금 해야 할 건 자카리의 말들을 곱씹는 것이 아니라, 여길 나가는 거다.
하지만 마나도, 무기도 없이 어떻게?
방법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딱 하나 존재했다.
마도서에서도 소개하고는 있지만 워낙 얻는 것에 비해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 많아 정말 명목상으로만 소개하고 넘어간, 성좌의 힘을 빌리는 마지막 방법.
바로 시전자의 피로 소환진을 그려, 성좌를 직접 소환하는 것.
‘엄밀히 말하자면 꼭 피일 필요는 없지만.’
마나가 담긴 액체로 소환진을 그리는 게 중요했다.
문제는 어지간해서는 구할 수 있는 ‘마나가 담긴 액체’가, 시전자 본인의 마나가 흐르는 피밖에는 없다는 사실이고.
바로 그 점이 첫 번째 위험 요소이다.
피에 담긴 마나의 양은 그리 많지 않으니, 그게 전부 날아가기 전에 서둘러 소환진을 완성해야 하는데.
그 전에 시전자가 과다출혈로 죽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소환진은 복잡하고 빽빽한 식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전자가 소환진을 깜빡해서 자칫 한 번 잘못 그리기라도 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그러니 과다출혈이 오지 않는 게 용할 지경.
그러나 가장 큰 위험요소는 따로 있었다.
‘소환진을 전부 그리고 나서, 소환진에 시동을 걸 때.’
시동을 거는 순간 온몸의 마나가 소환진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만약 성좌를 소환하는 데 실패한다면…….
‘……치명적인 내상을 입지.’
그대로 즉사할 수도 있고, 겨우겨우 살아난다고 해도 다시는 마나를 다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과연 누가 고작 이런 일에 목숨을 걸겠는가?
‘나 정도의 상황이 아니고서야…….’
애초에 자카리는 티스베가 소환식을 외우고 있을 거라는 가정조차 못 하고 있을 터였다.
그 빼곡한 식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외우는 건 그야말로 불가능의 영역이니까.
하지만 티스베가 누구인가?
그 빌어먹을 성서도 반절이나 외웠던, 천재가 아닌가.
티스베는 언제 어디서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궁수자리 소환진 하나를 통째로 외우고 있었다.
‘물론 조금은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고작 이따위 가치를 충분하다고 해야 한다니 눈물이 날 지경이기는 하지만.
‘빌어먹을. 시도해 보지 않을 수가 없잖아!’
결국 그렇게 티스베는 이를 악물고 손가락을 찔렀다.
그리고 10분의 시간 동안 부지런히 소환진을 그렸다.
머뭇거릴 시간도 부족해,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쉼 없이 휘청이는 몸으로도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렇게 10분이 지난 현재.
“교, 교단장님! 칼릭스트 공녀를 가두어 두었던 방이 뚫렸습니다!”
“반인반마의 형체가 나타나서 교도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이곳까지 들어오는 것도…… 커헉!”
“빌어먹을!”
통신석을 타고 시시각각 들어오는 보고들에 자카리가 쾅 책상을 내리쳤다.
“그래 봐야 상대는 성좌 하나일 게 아니냐! 왜 이렇게까지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하는 거냐!”
“서, 성좌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저희가 알던 성좌의 모습이 아닙니다!”
“……뭐?”
자카리가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반문한 순간, 통신석을 조작하고 있던 교도 하나가 다급히 외쳤다.
“교단장님! 서쪽 구역 영상구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 앞에 검었던 벽면 위로, 마나로 이루어진 화면이 띄워졌다.
자카리의 낯에 경악의 빛이 떠오른 것도 그 순간이었다.
“……저게 무엇이냐.”
화면에는 중성적인 얼굴을 한 반인반마와, 그의 등에 탄 티스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화살을 더 쏘아야 합니까?]
-아, 아니, 그만하면…… 우욱. 토, 토할 것 같아…….
[필멸자의 신체는 유난히 약하군요.]
-너도 이만큼 피 흘려보고 말해…….
[저는 피를 흘리지 않습니다. 공격을 당하더라도 마나를 잃을 뿐이죠.]
-좋겠다, 이 자식아…….
티스베는 위기감과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파리한 낯으로 반인반마의 등 위에서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옷자락을 찢어 대충 감아 놓은 손과, 핏기라고는 조금도 없이 창백한 낯만이 그녀가 방 안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자카리가 경악한 부분은 그 지점이 아니었다.
남들은 소환에 응해 주는 것도 드물어 일평생 볼까 말까 한 성좌의 등에 티스베가 올라타고 있다는 점도 아니다.
그가 경악한 부분은 바로 궁수자리일 것이 분명한 반인반마의 형체가 선명하다는 점이었다.
“성좌가…… 어째서 저렇게 뚜렷하게…….”
일반적으로 소환된 성좌들은 모두 반투명하고 푸르스름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형태가 마나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성좌란 무릇 마나를 빌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었다.
그 탓에 이렇게 상성이 극악인 마나가 포진한 곳에서는 그만큼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기 마련이었고.
그것은 나름대로 자카리의 믿는 구석이기도 했다.
그렇게나 막강한 티스베조차 이곳에서는 감히 마나를 쓸 엄두조차 내지 못하지 않나.
그러나.
“……교단장님. 저건 육체가 아닙니까?”
“공격도 마법 공격이 아니라 지, 진짜 화살을 날리고 있습니다!”
“마나의 상성이 무의미합니다!”
화면 속의 반인반마는 마나를 쓰지 않았다.
그가 날리는 화살은 모두 진짜였고, 그가 가진 육체 또한 진짜였다.
자카리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소환진을 통해 소환된 성좌는 마나로 이루어진 형체 따위가 아니라 진짜 육신을 가지고 소환된다는 것을.
게다가 마나가 없이도 권능이 워낙 막강하여, 일당백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익숙한 힘들이 많이 보이는군요. 익숙한 것들이 익숙하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애석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반인반마는 제 말마따나 짐짓 애석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돌연 고개를 돌려 화면을 정확히 응시했다.
그리고 활에 시위를 올리더니.
“……꺼졌군.”
“통신구를 화살로 깨트린 모양입니다.”
“이, 이제 어떡해야 합니까? 동선으로 보자면 이제 북쪽 구역으로 진입했을 겁니다.”
멍청한 교도들의 질문에, 자카리가 으득 이를 갈았다.
“……온건한 선택지를 주었음에도 결국 이렇게 되는군.”
이렇게 될까 봐, 진작 죽이고 싶었다.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 그 여자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그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얼마나 참아 왔던가?
그 여자와 자카리가 사랑한 ‘재앙’은 별개의 인물이었다.
이교도들에게 티스베는 그저 그 씨앗, 혹은 과정에 불과할 뿐.
그럼에도 이교도들이 그녀를 죽이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신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알량한 마음 때문이었다.
과하게 내어 주었던 호의가 거절당하는 것은 생각보다 치욕스러운 일이다.
자카리가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까지 타살을 바란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어야지. 어차피 그 여자가 자력으로 이곳에서 나갈 방법은 없다.”
“그, 그렇다면-”
“북쪽 구역을 폐쇄해라. 그리고 실패작들을 풀어.”
“하지만 교단장님, 그 구역 안에 교도들이 있습니다!”
“순교를 두려워하지 말라. 전부 값지게 쓰일 테니.”
재앙은 이곳에서 탄생할 것이다.
그렇게 읊조리는 자카리의 낯에서 집착 어린 광기가 넘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