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목소리와 함께 끌어올린 마나가 의지를 갖고 흘러나오고, 점차 구체적인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다.
소환의 전조 단계였다.
예전이었더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마나가 의지를 전달하고, 별이 응답해 푸르스름한 형체로 나타났겠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끌어올려도 이게 전부야.’
하지만 이래서는 폭격이 만들어 준 틈이 사라지기 전에 소환을 마무리할 수 없을 게 뻔했다.
이를 악문 티스베가 한층 더 강하게 마나를 끌어올리자, 옅은 안개처럼 보였던 형체가 빠르게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푸르스름한 금붕어 형체가 허공에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티스베가 피를 토했다.
“쿨럭, 쿨럭!”
“공녀님! 괜찮으세요?”
“괘, 괜찮아요.”
사실 괜찮지 않다.
내상을 입을 때면 누군가가 예리한 칼로 온 배 속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정말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기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
만들어진 금붕어 형체는 평소보다 옅게 빛나고 있었다.
그만큼 마나가 모자라다는 뜻이다.
[나 왔어! 인마궁(궁수자리)도 있네?]
“잡담할 시간 없어! 우리를, 콜록, 이 위로 데려다줘!”
[알겠어!]
금붕어가 쾌활하게 답하자, 온 장기를 그대로 뽑아가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마나가 빠르게 끌어올려지기 시작했다.
끌어올려진 마나 대부분은 그 속도 그대로 역류해 배 속을 난자하고, 일부만이 뽑혀 나가고 있었다.
그 탓에 모자란 마나를 충당하기 위해 마나를 더 끌어올리는 그야말로 악순환의 고리.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아찔한 통증 속에 티스베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볼 안쪽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곤 외쳤다.
“아직 멀었어?!”
[빨리 이동하지 않으면 위험해지겠습니다.]
[거의 다 됐어!]
“크윽!”
순간 어질어질한 통증이 머리를 강타하고, 티스베는 궁수자리의 등 위에 쓰러지듯 몸을 기댄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끔찍한 내상 때문에 똑바로 앉아 있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잠깐 흩어졌던 마물의 마나가 다시 짙게 주변을 메우며 티스베의 내상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은…….’
더 이상은 안 돼.
그렇게 정신을 잃으려는 순간.
주변의 기류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사위를 빼곡하게 메우고 있던 마물의 마나가 사라지고, 지하 감옥 특유의 습한 냄새 대신 젖은 흙 냄새가 코끝에 걸렸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의 등에 타고 있지 않았다.
축축한 흙이 티스베의 발밑에 짓이겨지고 있었다.
“……하! 각하! 이…… 로 와 보셔…… 것 같습…….”
“사라…… 들 입니…….”
먹먹한 귀에 울리는 낯선 이들의 목소리.
웅성대는 소음에 눈을 뜨면, 흐릿한 시야에 밤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처럼 어두운 밤. 익숙한 숲.
커다란 구덩이처럼 보이는 그 사이로 사람들을 제치고 다급히 달려오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소어.”
눈을 감자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티스베는 깨닫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
나 당신이 정말 보고 싶었구나.
눈꺼풀이 한 번 느리게 오르내릴 때마다 소어가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흐린 시야로도 그가 얼마나 대중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피를 쏟고 있는 것은 자신인데, 또 제가 다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겠지.
멍한 머릿속에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쳐 간다.
‘살아 있다는 건 확실하니까.’
자신과 에스텔이 돌아왔으니 소어가 정말로 곤경에 처했든 아니든 소어도 무사할 것이다.
그 사실 하나에 티스베는 온몸을 타고 퍼지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소어에게 의지해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 몸을 맡기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직은 티스베에게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바로, 시간을 다루는 마물에 대한 것.
이교도를 소탕하는 거야 소어가 할 수 있겠지만 이것만큼은 그녀가 해야 했다.
티스베가 이교도들과 만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피하려 하지 않은 까닭은 오직 한 가지였다.
‘이 마물에 대한 걸 해결하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이 굴레에 갇히게 될 거야.’
시간을 다룬다는 것은 엄청난 능력이다.
결국 그 능력 때문에 티스베는 두 번씩이나 이 굴레에 갇히고 말았다.
아직은 고작 두 번째지만, 이번에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그 다음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티스베는 종종 의문하곤 했다.
‘나를 이 운명으로 이끈 건 과연 누굴까?’
누군가가 조작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심지어 그 수법은 굉장히 교묘하여, 스스로를 드러내지도 않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면 휘말려 있기 십상이었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대체 누굴까.
황도 12궁의 성좌들? 아니면 시간을 엿보는 이교도들?
하지만 성좌들은 직접적으로 인간 세계에 관여할 수 없고, 이교도들은 그저 시간을 넘볼 수 있다는 사실에 취한 광신도들일 뿐.
‘진짜 주체는 따로 있겠지.’
이교도들에게 바람을 불어넣고 길을 터 줄 수는 있어도, 직접 나설 수는 없는.
아주 절대적인 권능을 가진 누군가.
‘왜 직접 나서지 않았을까?’
답은 오래 고민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서지 않은 게 아니라, 못 한 거다.
황도 12궁에 비견될 만큼 절대적인 권능-시간을 다루는 힘-을 가졌으며, 그럼에도 직접 나설 수 없도록 발이 묶여 있는 거다.
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뱀주인자리.’
한때 황도 12궁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추방당해 인간들에게 힘을 빌려줄 수 있는 성좌가 아닌 마물 따위로 전락해 버린 성좌.
그러나 그 권능은 지나치게 위험하니, 분명 봉인했겠지.
예를 들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북쪽의 차가운 얼음 호수 밑에 말이다.
티스베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 이 숲일 줄 알았지.’
에스텔이 티스베를 민 바로 그 호수.
티스베가 과거의 기억을 되찾고, 그녀의 환영을 마주한.
시간을 다루는 마물이 살고 있다는 호수.
‘그 마물은 호수 밑바닥에 살고 있는 게 아니야.’
호수 밑바닥에 봉인된 거지.
그리고 그 봉인에서 풀려나기 위해 티스베를 이용하려 한 것이다.
자신과 그녀를 한 몸으로 이어 감히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로 만들고, 세상에 복수하기 위해서.
티스베는 그제야 호수에 빠졌을 때 보았던 자신의 환영, ‘재앙’에게서 느껴지던 원망과 증오, 분노와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별이 죽으면 무엇이 되는지 알아?]
[너는 날 선택할 수밖에 없을 거야. 우리는 같은 증오를 공유하니까.]
‘재앙’은 티스베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말은 티스베의 말이 아니었다.
‘어쩐지 단순히 나 혼자만의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원망이 깊다고 생각했지.’
그건 봉인된 뱀주인자리였던 거다.
오랫동안 발이 묶여 지상의 모든 것을 증오하게 되어 버린 성좌.
만약 여기서 티스베가 여지를 남긴다면, 뱀주인자리는 또다시 시간을 비틀어 그녀를 재앙으로 만들려 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해결해야 해.’
고개를 돌리자, 사색이 된 소어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티스베를 부축하려 하는 것이 보였다.
마주한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었다.
“티스베, 티스베! 괜찮은 겁니까? 서둘러 의사를……!”
하지만 티스베는 그에 대답해 주는 대신 자신을 붙든 소어의 손을 잡고, 희미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그들 주위를 떠다니는 금붕어에게 손짓했다.
마나의 흐름이 원활하니 굳이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마나를 통해 의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그녀의 뜻을 알아들은 금붕어가 빙글 돌자, 티스베를 붙들고 있던 소어가 부드럽게 떨어져 나갔다.
소어뿐만이 아니었다.
“고, 공녀님!”
티스베와 함께 궁수자리의 등에 타고 있던 에스텔도, 그들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도.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얼음 호수의 바깥으로 옮겨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곳으로 달려오고 싶어 하는 것이 눈에 띄게 느껴졌지만, 물고기자리는 티스베의 의지에 따라 철저히 그들을 격리했다.
그러나 불안한 기분은 들었는지, 금붕어가 꼬리를 살랑이며 다가와 물었다.
[티스베, 대체 뭘 하려고 그래? 지금도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너희가 저지른 일을 해결해야지. 그걸 하라고 날 성녀로 만든 게 아니야?”
황도 12궁의 성좌들은 직접적으로 인간세계에 관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녀를 내려 보내 그들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대신 구르라고 만들었다는 거다.
[그, 그건…….]
정곡을 찔린 금붕어가 눈치를 보자, 티스베는 픽 웃었다.
“괜찮아. 덕분에 죽음보다도 날 선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거든.”
이 일이 끝나고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뭐, 봐야지. 안 보면 또 울 텐데…….”
그때 가서 못 놀리면 아쉬울 거 아냐.
티스베는 농담처럼 중얼거리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였으나 정신은 어느 때보다 또렷하다.
티스베의 입술에서 12궁의 별 이름들이 흘러나오고, 순식간에 나타난 열두 개의 푸르스름한 형체들이 텅 비었던 얼음 호수를 뒤덮었다.
몸도, 정신도 이제 한계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짓도 끝내자.”
지난하고도 길었던 운명의 종착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