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5장 :
비록 제갈인이 청무대의 일개 청무대원의 신분이었지만 누구도 그의 재능을 의심하거나 그의 말을 얕잡아 보 는 사람은 없었다. 싸움터에서는 앞자리를 내줄 수도 있는 제갈인이었지만 작전과 협상 등에서는 항상 선두에 서는 제갈인이었고 그것은 그와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기도 하였다. 막상 막하의 전세가 갑자 기 불리해지고 목검 문도들과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내담 안으로 후퇴하자 전각 밖의 상황을 눈 한 번 깜박이 지 않고 바라보던 제 갈인이 돌연 눈살을 찌푸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왜 갑자기 힘을 못 쓰는 거지?'
"독에 당한 것 같습니다."
그의 옆에서 역시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은성이가 입을 열었다. 독이라는 말을 듣고 급히 공력을 운기하여 보던 전내의 인물들이 한결같이 침음성을 흘렸다. 모두가 중독 증상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대전 밖의 무림 인들이 중독된 것을 알아 차린 후 숨 몇번 쉴 정도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전내까지도 순식간에 중독되 어 버린 것이다.
"음.. 이제야 육합문과 양가보가 전멸한 이유를 알 것 같군!"
적의 하독에 대한 충분한 대비책을 세우지 못한데 대한 자책으로 제갈인은 침음성을 발했다.
"정소저, 무슨 독인 것 같습니까?"
제갈인이 한쪽에 서서 중독 증상을 파악하고 있는 선약문의 정씨 자매중 큰 언니인 정은선에게 물었다.
선약문(仙藥門)은 모든 것이 신비에 가려진 전설적인 의가이었다. 그 유명한 화타와 편작도 모두 선약문 출신 이라는 소문까지 암암리에 떠돌고 있었으며 죽은 사람도 죽은지 한시진만 지나지 않았다면 숨을 돌려 놓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동안 선약문은 강호 활동을 하지 않았었는데 삼년전 선약문주가 그의 쌍둥이 딸들을 갑자기 무림맹에 보내 어 주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요청대로 청무대에 소속되어 졌다. 이를 두고 무림맹의 핵심 인물이 선약문에 큰 은혜를 입혀서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선녀같은 자매를 보내어 무림맹을 한시적으로 돕도록 하였다는 소문도 만 발하였지만 확인되지 않은 사실일 뿐이었다.
"글쎄요, 독이 살포되는 속도와 반경을 보면 운무독 종류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운무독 중에서도 냄새도 없 고 색도 없으며 이처럼 공력을 급속도로 감소시킬수 있는 마교의 독은 독중지마의 앙천지독 뿐입니다."
"앙천지독! 그럼 권마황 말고 독중지마까지 여기 왔다는 말입니까?"
성질이 급한 호견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급히 말을 받았다. 마교 십대장로중의 두명이 왔다면 아무리 절세재 지한 제갈인이 있고 절세 고수인 검후가 있다고는 하지만 목 검문측의 전세가 열세라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호소협! 꼭 그렇지만도 않네. 독중지마 말고도 앙천지독을 하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제갈인이 한층 더 핼쓱해진 얼굴로 호견아에게 말을 하였다.
독중지마까지 왔다면 오늘의 정세는 백전 백패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독중지마가 이곳 안휘성에 나타 났다는 보고도 없었고 앙천지독은 독중지만의 몇 명 제자들도 하독시킬 수 있다고 알고 있었다. 괜히 섣부른 판단으로 일행들의 사기가 저하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불안한 심정을 누르면서 제갈인은 호견아의 말을 막았다.
독중지마의 제자들이라고 하여서 만만한 상대는 절대 아니었다. 그들이 마교의 칠대 절독중 한가지라도 가지 고 왔다면 독중지마의 분신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독마지체에 근접하였다는 독중지마 보다는 한결 상대하기가 쉬운 것은 사실이었다. 독중지마가 왔다면 필패가 기정 사실이나 그들의 제자들이 왔다면 그 래도 승리할 일만의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독중지마의 제자들이 앙천하독을 하독하였다는 말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많네 , 독중지마가 왔다면 몸을 숨기면서 까지 하독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음..."
맞는 말이었다. 독중지마가 직접 왔다면 구태여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그 절세 무비한 독술로 혼자서도 목검문을 개미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초토화 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정소저, 혹시 앙천지독을 해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요?"
제갈인이 마지막 희망이라는 듯이 처연한 눈빛으로 정은선을 바라보며 말을 하였다.
그러자 머뭇머뭇 하는가 싶던 정은선이 품에서 작은 금갑을 한 개 꺼내었다. 정은선이 금갑을 꺼내자 옆에 있 던 정미진도 역시 품에서 동일한 모양의 금갑을 꺼내었다. 금갑을 꺼내 손바닥 위에 얹은 정은선이 주변을 한 번 둘러 본후 다시 제갈인에게 시선을 모으고는 말을 하였다.
"앙천 지독이 비록 마교 칠대 극독중의 하나지만 저희 선약문의 선약인 금령환을 복용하면 곧바로 해독이 가 능합니다. 하지만 금령환은 저희 선약문의 일대 보물로서 저와 동생도 각기 한 알씩 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 다."
긴 생머리를 어깨위에 까지 덮고서 머리 위에 보옥으로 된 관을 쓴 정은선이 말을 마친 후 보석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녀 조차도 두알의 선약만으로는 오늘의 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에게 선약을 주어야 할지 매우 난감한 상태였다.
"정소저, 금령환은 한 사람이 한 알씩 복용해야 약효가 있는지요?"
오늘의 난국을 타개할 방법이 두 알의 금령환밖에 없는지라 말을 하는 제갈인의 어조에는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었다.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제 생각에는 한 사람이 반만 먹어도 충분히 앙천지독을 해독시킬 수는 있을 것 같 아요. 하지만 한 알을 네 사람이 나누어 먹는다면 해독이야 되겠지만 해독을 하려면 한시진 정도는 지나야 할 것이예요."
한시진 동안 해독을 할 수 없다면 먹으나 마나한 일이었다. 금령환 두알로 네명만이 해독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금령환을 주어야 한다는 말인가?
제갈인의 명석한 두뇌가 재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이때였다. 은성이의 옆에 붙어 서 있던 검후가 갑자 기 정은선에게 말을 걸었다.
"선매, 앙천 지독에 중독되면 어떤 증상이 생기나요?"
내공이 심후하면 독에 중독되고도 중독된 독의 독성이 늦게 발휘되도록 한다거나 내공을 통해 몸 밖으로 배출 해 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검후의 무공 수위를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앙천지독의 지독성만은 자세히 알고 있는 정은선은 검후를 바라보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검후님, 앙천지독은 마교 칠대 극독중의 하나이지만 그 지독함은 무형지독을 제외하고는 일이위를 다투고 있 습니다. 일단 중독되면 일각안에 내공의 이삼할이 소모되고 한시진 안으로는 칠팔할이 사라집니다. 호신 강기 를 펼쳐 독기의 침투를 방비하지 않고서는 중독을 피할 수 없고 일단 중독되면 독중지체이거나 천인이 아닌 이상 내기로써 독성을 조절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앙천지독이 내기로써 쉽게 몰아낼 수 없는 독이라서 전각내의 고수들도 속수무책 일수 밖에 없다는 정은선의 설명이었다.
"그래요..., 그렇게 지독한 독이라면 왜 나는 중독이 안 되었을까요?"
중독되지 않았다는 검후의 말에 검후의 얼굴을 관찰하던 정은선이 깜짝 놀랐다. 정말로 검후의 얼굴에는 중독 된 증상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비록 명성은 부족하지만 검후에 비해 크게 내력이 뒤지지 않는 목 검문주나 남궁세가의 천뢰검 남궁력조차도 미간에 검은색이 감돌고 있어 중독됐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 다. 그런데 검후의 미간에는 중독된 증상이 전혀 없었으며 안색 또한 정상이었다.
설마 검후의 내공이 전설적인 경지에 들어섰다는 말인가?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하여도 검후의 스승이며 전대 검후조차도 오르지 못한 경지를 이제 십육살밖에 안된 현 검후가 이루었다고는 절대 믿을 수 없었다."
그러면 무엇으로 설명한다는 말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에 다시 한 번 검후의 안색을 살피려던 정은선이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검후 뿐만이 아니라 검후 옆에 있는 검후의 오라버니라고 소개받은 사람도 중독된 증상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검후가 이은성이라고 소개하였다는 것을 간신히 떠올린 정은선이 은성이에게 얼굴을 돌리며 다 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이소협, 실례지만 이 소협께서도 중독된 현상을 느낄 수가 없는지요?"
정은선의 질문에 은성이가 다소 난처해 하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예, 실은 저도 중독된 증상을 보이지 않고 있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은성이는 전각 밖의 무림인들이 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발견한 직후 태극진기를 운행하여 보았었다.
하지만 중독된 증상이 하나도 없는지라 독이 전각 외부에서만 하독된 것으로 판단 하였다. 그러나 전각내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중독당했다는 말을 듣고 제일 먼저 시선을 검후에게 돌리었다. 그런데 검후의 안색을 살 핀 결과 검후가 중독된 증상이 없자 내심 안도하면서도 그 이유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 말고도 은성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또 하나 있었다. 검후를 따라 목검문에 왔고 마교와는 좋지 않은 기억만이 남아 있었지만 마교도라고 하여서 모두 죽여야 할 정도로 마교를 미워하거나 증오할만한 일이 있었 던 것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 그가 아끼고 보호해 주고자 하는 검후와 원수의 관계이기 때문에 은성이 자신도 알게 모르게 조금 씩 마교도들을 적대시하고는 있었지만 죽일 이유까지는 없었다. 마교도들이건 정파인들이건 똑 같이 귀중한 생명들이었다. 상대방이 자기를 또는 검후를 공격하지만 않는다면 되도록 살생은 피하고자 하는 은성이였다. 검후만 위험하지 않다면 정파가 밀린다고 마교도들을 죽이는 일은 삼가고 싶었다.
"이소협, 전에 독공을 익히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며 정은선이 말을 하였다.
"아닙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역시나 은성이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그렇다면 검후와 이 소년의 내공이 천인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말인가?
그것은 더더욱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무림사 누천년에 수많은 기인 이사들이 명멸해 갔지만 그중 내공이 천 인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사람은 단 세명만이 손 꼽히고 있었다. 소림의 달마대사와 무당의 장삼봉 진인 그리 고 마교의 초대 교주였다는 천마 뿐이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소년은 풍기는 기세나 눈빛으로 보아 절세 고수 는 커녕 일반 고수 정도의 수준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피독주? ...피식'
이 긴박한 상황에서 자신이 쓸데없는 상상만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정은선이 실소를 지었다.
피독주라니?
온갖 독을 중화시킬수 있는 구슬로써 전설으로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이름이었다. 천년전 출현한 적이 있느 니 없느니 전설처럼 흘러 내려오는 말들은 많았지만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정은선이었다. 그 렇지만 그것 말고는 더 이상 검후와 검후의 오라버니라고 하는 소년이 중독되지 않은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앙천하독의 해약을 미리 먹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이소협, 혹시 몸에 피독주 같은 것을 가지고 계시나요."
읔!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정작 말을 해 놓고서도 정은선은 무안함에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런 황당한 생각은 생각만으로 그쳐야 하는데 민망하게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그런데 정은선의 말을 듣고서 당장에 아니요! 라는 대답을 하여야 할 검후의 오라버니라는 소년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옷 안주 머니에서 작은 목갑을 꺼내며 말을 하였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이 피독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심이 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목갑을 열자 목갑 안에서 휘황 찬란한 보광이 피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보광은 삽시간에 주변으로 번져 나가 전각안을 영롱한 빛 무리로 채워 버렸다.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진 가운데 기이한 일들이 발생되기 시작하였다. 전각안에서 기이한 공기의 소용돌이가 생기며 목갑안으로 무엇인가가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정은선이 은성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목갑안에 손을 데었다. 그러자 보광이 아름다운 소녀의 몸을 감싸고 휘돌았다. 보광은 소녀의 몸속 까지도 파고 들어가는 듯 순식간에 소녀의 몸이 보광속에서 훤히 빛나더니 이윽고 소녀의 몸에서 멤돌던 보광 이 걷히면서 처음과 같이 주변으로만 번져가고 있었다.
은성이에게서 몇 발자국 물러서서 숨을 몇 번 들이쉰 정은성은 경악에 찬 목소리를 내었다.
"피.. 피독주예요, 저 구슬이 전..전설의 피독중입니다. 여러분! 모두 피독주 주변으로 모여서 피독주에 손가 락을 대시기 바랍니다."
정은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룡문 장로와 남궁력 그리고 목검문주가 다가와 해독을 하였다. 해독은 순식 간에 되고 있었다. 이들이 해독되자 마자 제갈인이 다가와 그들에게 급한 어조로 말을 하였다.
"전각 외부의 상황이 매우 위급하오니 먼저 내려 가셔서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도 해독이 되는데로 바로 내려 가셔서 도와 주십시요."
모두들 밖의 상황이 위급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라 지룡문 장로와 남궁력, 그리고 목검문주가 신법을 발 휘해 전각을 빠져 나갔다. 검후도 피독주가 든 목갑을 든 은성이를 바라본 후 막 전각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 다.
"하매, 잠깐만! 같이 가지."
하면서 은성이는 손에든 목갑을 옆에 있던 정은성에게 맡기었다.
"정소저, 소저께서 잠시 이 피독주를 가지고 해독하는 일 좀 해 주시지요. 밖에 있는 무림인들도 해독해야 될 것 같은데 수고 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은선이 감격하면서도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목갑을 건네 받았다. 이와같이 가치조차 헤아릴 수 없는 천 고의 기보를 자기를 믿고 맡긴데에 따른 감격의 눈빛과 은성이가 이미 검후와 마음을 주고 받고 있다는 데에 따른 묘한 안타까움이 복합된 눈빛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소협님 중독된 사람들의 해독이 끝나면 바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정소저."
은성이가 검후와 함께 전각 밖으로 나갈 즈음하여 피독주에 의해서 해독을 마친 남궁혼과 제갈인 그리고 호견 아까지도 전각 밖으로 몰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