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55화 (55/152)

■ 제 55절 :

"아미타불, 시주님이 해동신룡 이대협이신지요?"

일곱명의 승려들중 제일 앞에 위치한 유난히 눈썹이 시커멓고 굵은 승려가 반장의 예를 갖추며 은성에게 물었 다.

"예, 제가 이은성입니다."

은성은 이들 젊은 승려들이 호승지심을 가지고 찾아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도 속으로는 쓴 웃음을 지었다. 권마황과의 대결이후 졸지에 대협이 되고 무림에 이름을 드높일수 있었지만 큰 나무는 바람을 많이 타듯이 원치않는 관심과 시달림까지도 함께 받게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은성이 해동신룡임을 시인한 직후 이들 일곱 승려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가 더욱 더 강대해졌다. 참선과 수행으로 그 어떤 상황에 닥쳐도 고요하고 변치않는 마음을 지켜야 하는 승려들이 헛된 호기심과 불필요한 명예욕 때문에 호승지심을 가 한층 높이고 있는 것이다.

"저희들은 소림의 칠대 금강입니다. 목가장에서 놀랄만한 신위로 마교의 권마황을 물리치셨다는 소식을 들었 습니다. 그런 이대협께서 이렇듯 저희 소림사를 방문하셨다고 하여 안면을 익히고 조그마한 배움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하여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찾아온 승려들이 칠대 금강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하자 은성이는 이들이 왜 이렇듯 호승지심이 많은지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소림사를 방문하면서 검후에게 소림사에 대하여 많은 것을 들었었는데 그중에 금강승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소림의 개세적인 무공들을 실전시키지 않고 연구 발전시키기 위하여 조직하였으며 소림의 진정한 힘이 집약되어 있다는 금강원(金剛院)에서도 무공에 가장 특출난 인재들만을 선발하여 집중 수 련을 받는 승려들을 금강승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들의 재능과 무위는 소림의 자존심이랄 수도 있을 정도였는데 자신들보다 십여살이나 어린 은성이 권마황을 물리쳤다는 말을 듣자 호승지심이 불타 오른 것 같았다. 하지만 은성은 이곳에서 괜한 혼란을 야기하고 싶지 는 않았다. 금강승이라는 소개를 듣고 이들의 기세를 살펴 본 결과 이들 개개인이 몸 밖으로 흘러 나오는 진 기까지도 조절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른 고수들이라는 판단이 들었지만 이들과 무공을 겨룰시 질 것이라는 생 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은성이었다. 그렇지만 손님의 자격으로 방문한 소림사에서 주인격인 소림사의 자존 심을 무너트리는 행동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소림사는 금강승이 있어 영원하다'는 말이 강호에 널리 펴져 있는데 직접 만나뵐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스님들의 비범한 신태를 뵈오니 오히려 제가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은성이 금강승들에게 겸손의 말을 하며 발길을 지객원의 정자쪽으로 돌리자 금강승들이 뒤따라 왔다. 방문 앞 에서 이야기를 주고 받기에는 왠지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자에 이르러 하늘을 보니 시각이 신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 대협,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권마황을 물리치셨다는 이대협의 무위를 잠시나마 견식하고 싶은데...무리한 부탁인지요?"

금강승중 눈썹이 굵은 승려가 이들의 수좌인 것 같았다. 눈썹이 굵은 승려의 눈빛을 일별한 은성은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이들이 지객원을 순순이 떠나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들과 무공 을 겨룰 수도 없었다. 무공을 겨룬다면 필연적으로 승패가 판가름나기 때문이었다.

"스님, 제가 어찌 감히 불도를 닦으시는 스님들과 무공을 겨룰 수 있겠습니까? 손과 발에는 눈이 없어 잘못하 면 몸이 상할 우려가 있으니 신성한 사찰에서 무공을 겨룰 수는 없습니다. 다만 스님들께서 높은 재주를 보여 주시면 저도 부족하나마 작은 재주를 시연하여 보이겠습니다."

은성의 대답에 눈썹이 굵은 승려가 다른 금강승들을 바라 보았다. 모두들 한결같이 괜찮다는 표정이었는지 눈 썹이 굵은 승려는 만족한 안색으로 은성에게 반장의 예를 표하며 감사의 말을 하였다.

"이대협, 저희들의 안목을 높여 주시겠다니 감사 드립니다. 이곳 정자위에서는 무공을 시연하기에 불편하니 밑으로 내려 가시지오."

은성이 알겠다는 눈빛을 하자 금강승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은성을 바라본 채 지객원 앞 공터를 등지고 서 있던 금강승들의 몸이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등진 자세 그대로 칠장여나 떨어진 공터로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 금강승들의 내력과 신법이 훌륭하다는 것은 처음에 정자에 서있던 자세 그대로를 유지한 채 한치의 흐트 러짐도 없이 칠장여나 이동하고 있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칠장여나 되는 거리를 이동하려면 정자의 바닥에 어느정도 충격이 가해져야 하건만 정자 바닥에는 미세한 진동조차 없었다. 벌써부터 금강승들과 은성 의 재주겨룸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소림의 절세적인 신법인 불영선하보(佛影仙霞步)를 펼치면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정자안의 은성을 살피 던 금강승들의 안색에 어리둥절함과 놀람이 가득 피어났다. 분명히 몸을 날리는 순간부터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는데 은성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금강승들의 표정이 당황함으로 이어지자 눈썹이 짙은 승려가 급히 외쳤다.

"관불(觀佛)!"

그러자 일곱명의 금강승들의 자세가 일순간 바뀌어졌다.

금강승들이 허공중에서 몸을 이동하여 순식간에 팔방을 수비하는 자세로 돌변하여 버린 것이다. 이들은 허공 중에서 몸의 자세나 위치를 이동하는 수련을 많이 받았었는지 자신에게 힘을 보태주는 승려의 힘을 빌어 몸을 이동하면서도 다른 승려에게 힘을 빌려 주어 눈 깜짝할 순간에 허공중에서 진세를 형성시켜 버린 것이다.

그런데 몸을 돌려 자신들이 착지할 공터를 바라보던 굵은 눈썹의 승려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 을 깜박이었다. 후발선착(後發先捉)이라고 자신들보다 뒤늦게 정자에서 사라진 은성이 어느새 공터에 내려서 있었던 것이다.

불영선하보는 소림 칠십이절기 중의 하나였다. 여유로우면서도 안개속에 쌓인 선인의 행보처럼 예측 불허하기 때문에 익히기가 매우 어려운 반면 대성하면 어떠한 무공도 십분이상으로 발휘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정도 가지고 소림 칠십이절기에 들 수는 없었다. 불영선하보의 또 다른 특징은 빠르기에 있었다.

'부처님은 어디가고 그림자만 남았누나' 는 표현처럼 여유롭고 현묘하면서도 쾌속한 신법이 바로 불영선하보 였다. 그런데 해동신룡이라는 나이어린 대협이 칠대 금강승들의 법안을 속이는 것도 모자라서 어느새 불영선 하보를 제치고 공터에 먼저 도착해 있는 것이다.

"아미타불, 소승 정백(正白)이 오늘 개안(開眼)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터에 내려선 정백이라는 굵은 눈썹의 승려가 진정으로 감복하였다는 표정으로 은성을 향해 불호를 외웠다.

마교 십대 장로중의 한명인 권마황의 무공 경지를 모를 리가 없는 금강승 정백이었다.

그런데 이름도 없던 해동신룡이라는 애송이가 권마황을 물리쳤었다는 말을 듣고는 권마황이 이미 내상을 입고 있었던지 아니면 소문이 과장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서 금강승들을 이끌고 지객원에 찾아와서 처음으로 은성을 바라봤을 때만 해도 그 추측 은 확신이었었다. 무공을 전혀 익힌 것 같지 않은 곱상한 부잣집 자재같은 은성은 권마황은 말할 것도 없고 금강원의 일개 무승조차도 쉽게 상대할 수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 이대협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펼친 신법은 금강승의 수좌인 자신은 물론이고 금강원주께서 친히 불영선하보를 펼친다고 하여도 그보다 더 빠를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은성이 펼친 이형환위의 위력은 이제는 소림의 금강승의 눈에도 잡히지 않을 정도로 진척되어 있는 것이다.

"정녹(正綠) 네가 먼저 가르침을 받아 보아라!"

정백이라는 금강승이 한명을 지적하자 일행중 가장 어려 보이는 이십대 초반의 승려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는 은성에게 반장의 예를 표하고는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차한잔 마실 시간이나 되었을까? 정녹이라는 승려가 앉은 자리를 중심으로 먼지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흙더 미가 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이내 공기중에서 산산히 부서지며 정녹이라는 스님의 주변을 휘돌기 시작하였다. 흙먼지가 심하게 일자 은성과 다른 금강승들이 잠시 자리를 뒤쪽으로 물러섰는데 어느새 정녹의 몸은 흙먼지에 가려 형체를 볼 수 조차 없었다. 땅속에서 용암이 분출돼 올라오듯 끊임없이 흙더미가 솟아 오 르며 먼지로 화해 정녹스님의 주변을 에워 싸는가 싶더니 서서히 흙먼지가 옅어져 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흙먼지 속에 마땅히 있어야 할 정녹스님이 보이지가 않고 있었다.

"아미타불!..."

처음의 위치에서 오장여나 떨어진 은성의 뒤쪽에서 갑자기 나타난 정녹은 은성이 흙먼지 방향이 아닌 뒤돌아 서서 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자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한치 앞도 볼수 없는 흙먼지가 사납게 울부 짓으며 휘돌기 때문에 시력은 물론 청각 조차도 완전히 제 기능을 발휘할수 없을 터인데도 은성이 용케도 자신의 행적을 알아차린 것이다. 은성의 심안이 불가에서 말하는 천안 통(天眼通)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는 정녹이 침통한 표정으로 다른 금강승들에게로 돌아갔 다. 불영선하보를 펼치면서 잃었던 선기를 만회하고자 하였는데 통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저도 작은 재주를 한 번 펼쳐 보이겠습니다."

금강승들의 앞으로 나선 은성이 한 손가락을 들어 죽림쪽을 가리키며 말을 하였다.

은성이 손가락으로 검을 대신하여 조사지공인 인일삼(人一三)을 펼치자 죽림속에 떨어져 있던 대나무 잎들이 폭풍우에 날리우듯 은성이 있는 방향으로 몰아쳐 왔다. 몇백만 아니 몇천만개나 되는 대잎들은 은성이 앞에서 하나로 뭉치더니 하늘위로 끝없이 솟구쳐 올라갔다. 하늘위로 사십여장이나 솟구쳐 오른 대잎들이 갑자기 뿔 뿔이 흩어지더니 허공중에 글을 수놓았다.

'인자무적(仁者無敵)'

눈 몇번 깜빡일 정도까지 인자무적이란 글자를 형성하고 있던 대잎들이 '인(仁)'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적(敵)'자까지 땅쪽으로 곤두박질쳐 내려왔다.

그런데 땅위에서 십오장여까지 내려오는 동안에 인자무적이란 글자가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렇게 내려 오던 대잎들은 십오장여 위에 결계라도 쳐 있는 듯 차곡차곡 쌓이더니 구름이 떠 가듯 죽림위로 두둥실 흘러 가서는 죽림속으로 죽엽의 비를 뿌리는 것이었다.

대나무 잎새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죽림속에 흩뿌려진후 주변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금강승들의 수좌인 정백 도 흔들리는 눈빛을 추스리지 못하고 멍하니 죽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던 정백이 시선을 돌려 은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빈승이 오늘 새로운 무의 경지를 보게 된 것 같습니다. 여기에 오기 전까지만 하여도 이대협님께 서 권마황을 물리쳤음을 조금 의심하였는데 이대협님의 무위를 직접 보니 권마황이 어떻게 도망갈 수 있었는 지가 의아할 지경입니다. 정녕 해동신룡이라는 별호가 무색한 무위이십니다."

정백을 포함한 금강승들은 너무나도 엄청난 은성의 무위를 보고는 호승지심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은성이의 무공수위는 자신들이 도달한 경지와는 천양지차의 격차가 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도 살리겠다는 오기인지 금강승중의 둘째인 정주(正 朱) 스님이 은성의 앞으로 나섰다.

"이대협님의 천신같은 무위는 감히 흉내낼 수도 없을 경지이십니다. 제가 익힌 것은 도법이온데 부족하다고 흉보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정주 스님이 손에 들고온 계도를 뽑아들더니 말없이 도무(刀舞)를 추기 시작하였다. 도세에는 정중 동의 묘미는 물론이고 동중정의 묘미까지도 깃들여 있었다. 불가의 도법 치고는 날카롭고 변화 막측함까지 가 미된 도법으로 팔방을 제압하던 정주스님의 계도가 일순 커지기 시작하더니 종래에는 정주 스님의 모습은 사 라지고 일장은 될듯해 보이는 계도만이 혼자서 도무를 추고 있었다.

계도 주변에는 바람 한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도세가 층층히 쌓여져 가고 있었으며 십여장이나 떨어진 죽림 속의 죽엽들이 부르르 떨더니 끝내 견디지 못하고 가지에서 떨어져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완벽한 신도합일의 경지에 이르른 듯 이제는 눈에 거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종횡무진하던 계도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땅쪽으로 향하더니 손잡이 부근까지 깊숙이 땅속에 박혀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땅속에 박힌 계도의 손잡이를 잡은채 물구나무를 서 있는 정주대사를 중심으로 땅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울리더니 은성이 위치한 방향으로 삼장 정도나 갈라져 버린 것이다. 사람 한 명은 충분히 빠져들 정도로 갈라진 틈새는 깊이가 이장은 될 것 같았다. 다행히 정주 스님이 도무를 펼친 장소는 은성과 삼장이상 떨어져 있었기에 은성은 땅을 갈라 버리는 무지막지한 도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정녹 스님에 의해 파헤쳐지고 정주 스님에 의해 갈라져 버려 흉측하게 변해버린 지객원의 공터를 바라보던 은 성이 무심한 시선으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손을 뻗자 십여장이나 떨어진 죽림속에서 대나무 한그루가 칼 에 베인 듯 날카롭게 베어지더니 은성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왔다.

그런데 날아오는 도중에도 대나무는 계속 형체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잘라진 밑둥에서부터 위쪽으로 세자정도 의 길이로 잘라지더니 그 위쪽은 다시 죽림속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를 바라보던 금강승들의 눈에 경악의 빛이 띄어졌다. 내공이 높으면 수련을 통해 접인 신공을 발휘할 수가 있었는데 자신들도 모두 접인신공은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접인 신공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흡자결로 내공을 일으켜야 하는데 은성처럼 흡자결을 펼치면서 동시에 출자결을 펼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내공이 천인 지경에 다다르지 않는 한 절대로 불가능한 경지였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흡자결과 출자결을 동시에 펼치면서도 은성 쪽으로 날아오는 세자 정도의 대나무가 세로로 잘게 잘라졌는데 그 중에 하나는 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대나무는 쪼개지는 성질만을 가지고 있는데도 손잡이는 물론 검끝이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는 것을 보니 내공을 이용하여 대나무를 원하는 형상으로 잘라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 다. 눈깜빡할 사이에 십장밖에 떨어져 있던 멀쩡한 대나무가 대나무검으로 변화되어 은성의 손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대나무검을 손에 든 은성이 펼쳐 보이는 것은 동방파의 유운검법이었다.

그동안 은성이 깨달음을 얻어 이를 접목시킨 유운검법은 변화막측하지도 그렇다고 날카롭지도 않았지만 검의 가 자연의 성상을 닮아가고 있었다. 초식조차도 정형화를 탈피해 가고 있었으며 그날의 정황과 주변 분위기는 물론 펼치는 은성의 기분에 따라서도 조금씩 변화되어 바뀌어졌다.

하지만 한치의 어색함도 없었으며 물이 흐르듯 바람이 날리우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었다. 은성이 유운검법을 펼치는 동안에 금강승들은 가슴속에 남아있던 한조각 호승지심 조차도 모두 떨쳐내 버릴 수 있었 다. 호승지심은 견줄 상대가 있어야만 생기는데 이미 자연인에 가까워진 은성에게서는 한조각 공명심 조차 발 견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운검법을 끝마친 은성이 죽검을 땅속에 꽂고 조사지공인 지일이(地一二)의 신공을 펼쳐 내었다.

그러자 은성의 주변 땅꺼풀이 들썩이더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흡사 해일이 일 듯 땅꺼풀이 일렁이며 갈라진 틈새를 메우고 파헤쳐진 지면을 말끔하게 채우자 공터는 어느새 평탄하게 복원되었다.

처음보다도 더욱 평탄해진 공터에 박혀 있던 죽검이 돌연 허공으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죽 림 속으로 날아가 지객원의 뒤쪽 방향으로 사라져 갔다. 쌍골죽이 많이 자라있는 죽림 방향이었다.

시범을 보인 은성이 금강승들의 앞으로 조용히 걸어오자 정백이 더 이상 재주를 겨룸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 였던지 은성에게 반장의 예를 표하였다.

"이대협, 저희들이 작은 재주를 믿고 감히 무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소림의 무공만이 천하 제일이라 고 속좁게 생각하던 저희들의 안목을 높여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불도(佛道)와 신공(神功)은 절내 에 있지 아니하고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부처님의 광명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미타불'

정백과 함께 금강승들이 일제히 은성에게 반장의 예와 함께 불호를 외우자 은성도 금강승들을 향해 반장의 예 를 하여 주었다.

지객원을 떠나가는 금강승들을 바라보면서 은성은 소림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소림의 저력은 나서는데 있 지 아니하고 참고 자중하는 곳에 있는 것이다. 정녹이라고 불리운 승려와 신도합일의 경지를 펼쳐보인 승려를 보건데 이들 일곱명의 금강승들은 각자가 무시할 수 없는 무공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일곱명은 처음에 불영선하보를 펼쳐 보이면서 언뜻 보여주었던 특별한 진세를 수련한 것 같았다.

한사람 한사람이 가공할 고수인 이들 일곱명의 금강승들이 연합하여 진세를 펼친다면 그 위력이 어떨지는 불 문가지였다. 그렇게 때문에 은성은 그처럼 막강한 진세를 펼쳐 보지도 않은채 자중하며 떠나가는 금강승들의 등뒤에서 천년 소림의 숨은 저력을 느꼈던 것이다.

한편 지객원주를 따라나선 검후는 소실봉의 봉우리를 계속해서 올라가야만 했다. 올라가면서 공지대사가 소림 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지객원주의 설명을 듣다보니 주변 경관을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지객원에서 반 리정도나 올라온 지객원주는 송림이 우거진 능선 부근에 작은 공터를 끼고 초라하게 지어진 별각 앞에 와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사백님, 보타문의 검후를 모시고 왔습니다."

지객원주가 별각을 바라보며 공손한 목소리로 검후를 데리고 왔음을 알리자 별각안에서 조용하면서도 위엄에 넘치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들어 오시라 하라!"

지객원주가 검후에게 별각 안으로 들어가라는 눈빛을 발하자 검후가 지객원주에게 여기까지 안내하여 고맙다 는 눈빛으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별각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흰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진 노승 한명이 포단위에 정좌해 있었다.

"고명하신 공지대사님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노승을 향해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마친 검후는 노승 앞에 한 개의 포단이 놓여져 있자 망설임도 없이 포단위 에 자리를 잡았다. 포단위에 앉은 검후는 공지대사가 왜 자기를 불렀는지 설명해 주지는 않고 계속해서 자신 을 바라보고만 있자 다소 민망했던지 눈빛을 내리깔고 먼저 침묵을 깼다.

"대사님, 저희 태사조님의 서신은 확인하셨는지요?"

자신이 공지대사에게 서신을 전하라고 지객원주에게 건네준후 공지대사가 자신을 보기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 는 이미 서신의 내용을 확인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공지대사에게 마땅히 물어볼 말이 없기에 그냥 운 을 떼본 검후였다.

"확인하였소이다. 그래, 검후는 태사조님의 얼굴을 본적이 있는지요?"

노승과 검후는 나이 차이가 현저하였지만 검후가 보타문의 장문 신분인지라 노승은 검후에게 존칭을 하여 주 었다.

"제자가 보타문에 입문하기 전에 입적하셨기 때문에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부님에게서 그분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음..,그렇습니까? 서신에 어떤 내용이 씌여 있는지 짐작하시는 것이라도 있는지요?"

봉인된지 몇십년이 지난 서신을 우연히 발견하였을뿐 서신에 쓰여진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수 없는 검 후는 공지대사의 질문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닙니다. 저도 그 서신을 처음 발견한 것이 몇 달 되지 않았습니다. 태사조님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는데 인과를 풀어 드리기 위해 소림사를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인과를 푼다..."

검후의 말을 듣고 인과라는 단어를 되뇌어 보던 노승이 다시 한참을 침묵하더니 나직히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인과의 법칙이 이처럼 삼엄한데 그 어찌 피해갈 수 있으리오..."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노승이 검후의 두 눈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검후는 보타문의 무공이 어떻다고 생각하오?"

노승의 뜻밖의 질문에 검후는 내심 당황해 하였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공지같은 고승이 괜한 것을 물 어 본다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사부님이 질문하다고 생각하고는 심사숙고한 후 자신의 생 각을 차분히 대답하기 시작하였다.

"저희 사부님께서 역대 검후님들의 무공 수위와 무림에서 행하신 업적들을 설명하시면서 보타문의 독문 내공 심법과 독문무공에 대해 평하신 것이 있습니다. '팔성을 익히면 뜻한 바대로 행동할 수가 있고 십성을 익히면 무림에서 이름을 높일수 있으며 십이성을 익힌다면 무림밖에서까지 이름을 드높일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조사님 이후로 보타문의 역대 검후들중 태사조님만이 십일성의 경지까지 무공을 연마하셨다 하셨습니 다."

'흠, 십일성의 경지까지 보타문의 무공을 익혔었다니 대단하군.'

검후의 대답을 듣던 공지대사가 혼자말로 중얼거리더니 다시 검후에게 물었다.

"검후는 보타문의 무공을 몇성이나 익혔습니까?"

"이제 겨우 팔성의 수준에 올라와 있습니다."

검후는 자신이 이룬 경지가 낮다고 생각한 듯 부끄러워하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역대 검후들중 검후의 나이에 팔성의 경지를 이룬 검후는 한명도 없었다.

검후의 무공 경지는 은연중 가늠해본 공지대사도 깜짝 놀랄만한 경지에 올라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검후는 은성과 동행하면서 은성의 가공절후한 무공을 접하고는 상대적으로 자신의 무공경지가 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은성에게 패퇴한 권마황과 결전을 벌이면서 최선을 다했으나 밀렸음을 생각하면 다시금 보 타문에 되돌아가 몇 년동안 폐관수련이라도 하고 싶은 검후였다.

그러나 은성과 사랑에 빠진 이후로는 은성과 한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설사 보타문에 되돌아가 이삼년 폐관 수련을 하면 무공이 구성의 경지에 달할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더라도 이를 포기하고 은성과의 소중한 시 간을 선택하고픈 검후였다.

"노납이...휴, 검후! 노납이 그대의 태사조와의 인연을 굳이 밝히지는 못하겠지만 검후께서 입적하신 태사조 의 인과를 풀기위해 가져온 서신속에는 또 다른 인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연의 끈은 질기고도 견고하여 한낱 중생이 어찌할 수 없는가 봅니다. 내 그대 태사조의 유명에 따라 검후에게 앞으로 삼개월 정도 무공을 가르치고자 하는데 검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돌아가신 태사조께서 남기신 서신속에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치라는 구절이 있다는 너무나도 믿기 어려운 말 에 검후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공지대사를 바라보았다.

지객원주가 말한대로 소림 삼신승이라 불리우는 절세 고수인 공지대사가 자신에게 친히 가르침을 내려준다는 것은 절실하게 무공 경지를 높이고자 원하는 검후에게 더할 나위없는 바램이었지만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대사님, 제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신 태사조님께서 저를 어떻게 아시고 대사님에게 무공지도를 부탁하셨 는지... 그리고 대사님! 소림사의 무공은 원래 외인에게는 가르침이 불허되지는 않는지요?"

약간은 얼떨떨해하면서 검후가 공지대사를 바라보며 의문점을 묻자 공지대사가 허허! 하면서 자애로운 웃음을 짓고는 의문점을 해소해 주었다.

"검후! 그대의 태사조가 그대를 어찌 알고서 무공지도를 부탁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서신중에는 보타문의 제자를 보낼테니 우리가...허허, 검후는 모르고 있겠지만 보타문의 무공중 옥녀산화라는 무공은 나와 그대의 태사조가 창안한 것이라오. 어쨋든 그 무공에 대한 심득이 있다면 보타문의 제자에게 전수해 주기를 바란다는 그대의 태사조의 유명이 있는데 내 어찌 검후를 그냥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내 검후에게 가르치고자 하 는 무공중에는 소림의 무공이 없으니 심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공지대사의 자상한 설명에 검후는 마음이 급속도로 기울어졌다

보타문의 무공중 검후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무공이 옥녀산화였기 때문이다. 아직은 팔성에 머물러 있지만 옥 녀 산화의 가공함을 익히 알고 있는 검후는 옥녀산화라는 무공이 조금 더 경지를 높인다면 그녀의 전력이 몇 배나 상승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노승은 자신의 태사조와 함께 그 무공을 창 안하였으며 그 진수를 가르쳐 주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대사님, 제가 어찌 태사조님의 금언(金言)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의 절친한 친구가 지객원에 머 물고 있으니 그에게 양해를 구한 후 내일 아침에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검후 좋을데로 하시지요, 그리고 무공을 가르치는 동안 검후가 불편해 할 것 같으니 내 숙소는 사제인 공수 의 거처에서 하겠습니다."

작은 것까지 세세히 신경 써 주는 공지대사에게 내심 감사해 하면서 검후가 공지대사의 별각을 나서자 멀리에 서 지객원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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