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화
환영회와 불청객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박정하는 와인 코르크 마개를 손으로 뜯는 묘기를 보여주면서 외쳤다.
퐁 하고 코르크 마개가 천장까지 튀어 오르는 장면은 꽤 볼만하긴 했다.
이게 그 술자리 개인기인가 뭔가 하는 그런 건가.
나도 길드 마스터로서 뭔가를 보여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드라군 성대모사는 자신 있는데. 질럿 성대모사도.
“저기요, 주문 받아주세요.”
막 일어서려는데, 송서영이 웨이트리스를 불렀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웨이트리스는 친절한 미소를 띠며 다가와서 그녀의 주문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괜히 뭔가 나서기 애매해져서, 나는 박정하가 따라주는 와인이나 얌전히 마시기로 했다.
비싼 와인이겠지만, 맛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 향기만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진한 향기를 입 안 가득 머금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부 인테리어는 고급스러운 목재 가구들로 꾸며져 있고, 조명은 약간 어두운 편이지만 그래서 더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우리는 신입 길드원의 환영회를 위해 길드 빌딩 내에 있는 편의시설 중 하나인 비스트로에 와있었다.
『비스트로 Lv.10』
「설명 : 유서준zl존 길드 빌딩 82층에 있는 와인하우스 겸 레스토랑입니다. 두툼한 대구살 스테이크와 진한 먹물 빠에야가 일품입니다.」
「효과 :
1. 소속 길드원들의 만족도와 관계도가 대단히 증가합니다.
2. 소속 길드원들의 활력 회복 속도가 대단히 증가합니다.」
길드시설은 종류별로 전부 설치하고 한계까지 풀 업그레이드했다.
게임 내 코인으로 살 수 없는 기간 한정 시설과 이벤트용 시설도 아낌없이 현질해서 몽땅 구비해놨지.
여기 비스트로 말고도 풀장 옆의 와인바, 지하의 맥주펍, 숨겨진 이자카야까지, 술집만 열 종류는 넘게 들여놨던가.
그런데 이걸 그대로 남한테 뺏겨야 한다니.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어디에선가 힘내 너구리 인형이 뽈뽈거리며 다가와서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힘내!”
“귀, 귀여워...”
그렇게 말하며 너구리 인형을 끌어당긴 것은 이연채였다.
하지만 힘내 너구리는 버둥거리다가 이연채의 품에서 도망쳐서 내 뒤에 숨었다.
“도와줘! 외간 여자가 괴롭혀!”
“그 분도 이제 우리 길드원이야. 외간 여자 아니야.”
“이 사람도 우리 길드원이야?”
“그래. 우리 길드원이야.”
너구리 인형은 내 말을 듣고서야 경계심을 풀었다.
나는 녀석을 집어 들어서 이연채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귀여워...!”
이연채는 느슨해진 얼굴로 너구리 인형을 꼭 껴안았다.
박정하와 이연채가 환영회에 자리를 함께한 것은, 내가 그 둘을 한꺼번에 영입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필수 퀘스트 : 스타팅 멤버(박정하) 선택 완료!】
[보상 :
1. 명성 +1
2. 영입칸 + 1]
【필수 퀘스트 : 스타팅 멤버(이연채) 선택 완료!!】
[보상 :
1. 명성 +1
2. 영입칸 + 1]
게임이었다면 스타팅 멤버를 한 명만 선택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 내가 소환된 세계는 게임이면서 동시에 현실이기도 하다.
그렇담 스타팅 멤버를 한 명만 골라야 한다는 법은 없는 거잖아.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음식 주문을 마친 송서영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속삭였다.
그녀가 뭘 걱정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다.
박정하의 급여가 250 코인, 이연채는 200 코인. 합계 450 코인.
현재 소지금이 300 코인이니까 한 달 후에 헌터들에게 줄 월급만 해도 소지금을 훨씬 뛰어넘는 금액이 되는 것이다.
헌터들의 급여와는 별개로 사무원인 송서영의 급여도 있다.
또 내 생활비도 있고, 여기 길드 빌딩에서 나가서 새로 길드 아지트를 구해야 하니 그 비용도 필요하겠지.
그러니 한 달 안에 코인을 왕창 벌어두지 않으면 길드는 파산하고 만다.
하지만 나는 【헌터헌터 타이쿤】의 컨텐츠를 끝까지 파고들었던 고인물 중의 고인물.
이 게임 속 세계를 누구보다 진지하게 즐겼다고 자부한다. 그러니 코인을 버는 것쯤이야 간단하지.
나는 그보다도 더 멀리, 다시 이 길드를 우뚝 세우고 길드원들을 되찾아 길드 빌딩을 북적거리게 하는 일을 생각하고 있다.
“길드 마스터가 그러시다면...”
송서영은 의외로 선선히 납득했다.
직접 회계를 담당하는 그녀로서는 좀 더 반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길드 마스터가 내린 결단인 걸요. 제가 함부로 반대하거나 할 수는 없죠. 그리고, 다른 길드원만큼은 아니더라도 저도 길드 마스터를 꽤나 신뢰하고 있어요.”
“그런가요?”
“길드 마스터가 작은 길드를 여기까지 성장시키는 걸 옆에서 쭉 지켜봐온 걸요.”
그렇게 말해준다면 좀 감동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송서영은 망해가는 길드에서 끝까지 남아서 뒤처리를 맡아주었지.
쌀쌀한 말투와는 달리 의리 있는 상여자였다.
나는 술기운을 빌려서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송서영은 쑥스러운지 고개를 돌리고 딴소리를 했다.
“고마우시면 나중에 월급 좀 올려주세요. 길드가 다시 우뚝 서고 난 다음에라도요.”
“당연하죠. 월급은 당장 못 올려주지만, 직위는 당장이라도 올려줄 수 있어요. 송서영 씨가 해준 게 얼만데 주임은 아니지. 과장도 아깝고, 차장, 아니다, 부장 어때요?”
“이사 시켜주시면 안 돼요?”
“이사... 이사 못 시켜 드릴 거 없죠, 예.”
“대표는요?”
“어... 죄송한데... 대표는 좀... 그래도 길드 마스터가 대표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농담이에요.”
송서영은 푸훗하고 웃었다.
나는 멋쩍게 컵을 만지작거렸지만 기분은 퍽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즐거울 지도.
곧, 주문한 대구 스테이크와 먹물 빠에야가 나왔다.
문어 샐러드, 가스파초, 오믈렛, 그리고 다양한 스페인 요리들.
내가 언제 이런 걸 먹어보겠어.
한계까지 풀 업그레이드한 비스트로의 요리는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것들 중에 제일 맛있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지 박정하와 이연채도 연신 감탄하면서 포크와 스푼을 달그락거렸다.
그래도 송서영은 여기에 꽤 자주 와봤는지 여유롭게 와인을 홀짝였다.
다들 배를 채우고 술잔도 돌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분위기 메이커는 단연 박정하였는데, 그는 미리 준비해온 건지 온갖 개인기를 펼쳤다.
“그럼, 다음으로는 드라군 성대모사를 해드리겠습니다! 리싸 쑤!”
그거 질럿 성대모사인데...하긴. 드라군이건 질럿이건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
“그거 질럿 성대모사잖아요!”
이연채는 깔깔 웃으며 테이블을 탁탁 쳤다.
중요한 거였구나.
어쨌거나 입사동기라고도 할 수 있는 둘은 나름 친해진 모양이다.
송서영은 의자를 약간 뒤로 젖힌 채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나도 즐거웠다.
송서영은 그렇다 쳐도 박정하와 이연채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이들과 함께 있으면 신기하게 소속감이라고 할까, 편안한 기분이 든다.
내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내 것을 갈망했다.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서 더 그랬는지도.
그래서 내 것을 키우는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에 몰입했던 걸지도 모른다.
송서영과 박정하, 이연채.
쇠락한 길드를 지켜온 이와, 찾아온 이들.
이들은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내 길드를 다시...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계시는군요!”
상념을 깬 것은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가 막 비스트로 안으로 들어온 참이었다.
흰색 모피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여자.
다리에 짝 달라붙는 스키니진에는 백호 무늬가 그려져 있다.
졸부 느낌이 나긴 하지만, 저렇게 자신감이 흘러넘치면 그것도 하나의 매력이 되고 품격이 된다.
그녀의 이름은 백호랑.
내 길드의 호적수인 호랑 길드의 길드 마스터였다.
게임 속에서는 내 길드원한테 계속 영입 제안을 보내서 귀찮게 하던 인물인데.
이렇게 실제로 만나보니까 감회가 새롭다.
하지만 송서영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신이 여기에 어떻게 들어온 거죠? 아니, 상관없어요. 부외자는 나가주세요.”
“부외자라니. 이제 이 길드 빌딩은 내 것, 호랑 길드의 것이랍니다? 오히려 나가야 할 것은 당신들 쪽이 아닌가 싶은데요?”
“빌딩 소유권은 아직까지 우리 길드에 있어요!”
“잘 모르시나 본데, 경매에서는 대금을 완납한 때에 소유권이 이전 된답니다! 그리고 지금...”
백호랑은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그 뒤에 서 있던 노집사는 고개를 숙이고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더니, 다시 백호랑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백호랑은 입가에 손등을 대고 소리 내어 호호 웃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나 백호랑이 대금을 다 치렀죠! 그러니 이 빌딩은 이제 내 거라는 말이에요! 내가 나가라고 하면 당신들이 나가야 한다는 거죠!”
백호랑은 한 번 자리를 훑어보고는 허리에 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여러분은 마지막 회식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 오늘만은 관대하게 봐드리도록 하겠어요!”
이미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는데.
백호랑은 그런 것 따위는 자기가 알바가 아니라는 듯 콧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나를 가리켰다.
“음? 거기 당신! 당신이 길드 마스터였군요! 장막 뒤의 존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는데, 의외로 평범한 얼굴이었어요! 이런 사람을 만나려고 봉인을 자처하다니. 당신네 길드원들도 참 바보 같군요?”
그 말에는 나도 울컥해서 받아쳤다.
“말조심하세요. 어쨌거나 내 길드원들은 소원의 탑을 공략했습니다. 호랑 길드는 꿈도 못 꿀 업적이죠. 그럼 당신네들은 뭡니까, 바보보다 모자란 머저리입니까?”
내 말에 백호랑은 잠시 움찔했다.
무어라 대꾸하고 싶은데 대꾸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그녀는 기죽은 표정으로 드문드문 말했다.
“나... 나는 그냥... 그쪽 길드원들이 갑자기 그렇게 된 게 아까워서... 안타까워서...”
“내 길드원들을 그렇게 생각해줬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내가 다시 그들을 되돌려놓을 테니 당신이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잠깐 벙찐 표정을 짓던 백호랑은 크게 호호홋 하고 웃었다.
“재미있네요! 역시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군요!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백호랑을 번번이 물 먹인 유서준zl존 길드의 마스터라면! 좋아요! 멀리서 유서준zl존 길드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오도록 하세요!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웅을 겨루도록 하죠!”
백호랑은 근처에서 뽈뽈거리던 힘내 너구리 인형을 낚아채며 덧붙였다.
“물론 올라온다고 해서 이 길드 빌딩을 돌려주진 않을 거지만! 그리고 이 귀여운 너구리 인형도 말이에요!”
“도와줘! 외간 여자가 괴롭혀!”
“이 멍청한 귀여운 너구리 같으니! 당신의 주인은 이제부터 나랍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 길드 빌딩에 속한 비품이고, 나는 이 길드 빌딩을 구매했기 때문이에요!”
너구리 인형은 버둥거리다가 축 늘어졌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나를 향했다.
동시에, 홀로그램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자유 퀘스트 : 길드 빌딩을 되찾자】
[설명 : 길드 빌딩에는 길드의 추억과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언젠가는 길드 빌딩을 되찾고 호랑 길드의 큰 코를 납작하게 해줍시다.]
[보상 :
1. SSS급 헌터 영입권
2. 명성 + 9,999
3. 영입칸 + 300]
그래.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굳히는 것으로 환영회 겸 회식 겸 마지막 만찬은 끝이 났다.
***
내가 이 세계로 소환되어 길드 빌딩에서 지낸 시간은 일주일도 안 된다.
하지만 그 사이 호화로운 시설에 너무 익숙해진 걸까.
새로 길드 아지트를 차릴 낡은 건물 앞에 서니 앞이 막막해진다.
『낡은 건물』
말 그대로 5층 짜리 낡은 건물이다.
지어진지 40년 정도 되었다는데, 건물 안에는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길드 들어오신다고? 여기 전에 있던 길드도 크게 돼서 나갔어요. 운수가 좋은 자리란 말이지.”
중개사 아저씨는 헉헉거리면서 계단을 올라가면서 말했다.
매물은 방 다섯 개가 있는 5층 전체.
【헌터헌터 타이쿤】에서도 길드 아지트를 구할 때는 한 층을 전체 임대하거나 구매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각 방마다 시설을 하나씩 설치할 수 있었지.
그 점은 게임과 그대로였다.
“방이 다섯 개나 되니까 초기 시설 들여놓기도 좋고. 옥상도 마음대로 써도 되고. 계약금 100 코인, 월세 200 코인. 어디 가서 이 조건에 이런 물건 안 나와요. 고민되면 일단 계약금만이라도 넣어놔요.”
확실히 괜찮은 조건이긴 한데.
그럼 이대로 계약을 맺을까 하는데, 나를 따라온 송서영이 바닥 타일을 발로 툭툭 두들겼다.
"아저씨. 여기 아래서 피 냄새가 심하게 나는데요. 우리 들어오기 전에 여기 있던 길드, 네크로맨서 길드였죠?"
그 말을 들은 중개사 아저씨는 삐질삐질 비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