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화
새로운 아지트
중개사 아저씨는 대답이 궁했는지 갑자기 괜히 벽지를 만지작거렸다.
“전에 있던 사람들이 퇴실 청소 다 하고 나갔는데 피 냄새가 나기는 어디가 난다 그래요. 봐봐, 이거. 벽지 도배 다 새로 하고 얼마나 깨끗하게 했는데.”
건물의 수준은 청결하다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불결하다고도 할 수 없는 정도였다.
여러모로 흠을 잡기에는 애매하다고 할까.
송서영은 피 냄새가 난다고 했지만, 나는 꽤 후각이 좋은 편인데도 피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말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송서영은 핸드백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서 팔랑팔랑 흔들었다.
“사실은 여기 오기 전에 미리 등기부등본 떼어봤거든요. 그런데 이 건물, 소유주가 주식회사 소울라이즈로 되어 있던데요.”
“주식회사? 응, 그래요, 주식회사로 되어 있을 거야. 그게 어째서요?”
“알아보니 그 주식회사가 중견 네크로맨서 길드의 모회사더라구요.”
송서영의 말에 중개사 아저씨는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나도 궁금하다. 그런 건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송서영은 입을 가리고 내게 속삭였다.
“사무원들에게는 사무원들의 커넥션이 있거든요. 사실 길드 내부 사정을 사무원보다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중개사 아저씨는 헛기침을 하면서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커험. 그... 내가 깜빡하긴 했는데, 그래. 네크로맨서 길드가 이 건물을 좀 쓰긴 했던가. 그런데 그게 뭐 문제 될 건 아니지 않아요?”
“문제 될 게 왜 없어요. 원혼들이 들락날락하는 건물에 누가 입주하고 싶어 하겠어요?”
“그건... 저어...”
“네크로맨서 길드가 이사하기 전에 위령제는 제대로 하고 나갔나요?”
“그럼! 다 하고 나갔지... 요.”
“확인해 봐도 될까요? 정말요?”
송서영이 차근차근 따져 묻자, 중개사 아저씨는 안 되겠다 싶겠는지 하소연을 시작했다.
“건물에 문제가 조금 있기는 있지요. 아니면 어떻게 이 건물을 계약금 100 코인, 월세 200 코인에 내놓겠어. 문제가 좀 있어도 다른 조건은 워낙 좋고, 또 싸니까 너른 마음으로 좀 널널하게 봐주시면은 안 되겠습니까...? 제가 건물주한테 연락을 해서 월세를 좀 깎아달라고 할 테니까는...”
송서영은 팔짱을 끼고 물었다.
“아저씨. 네크로맨서 길드가 여기 나가고 나서 이 건물, 얼마 동안 공실이었어요? 솔직하게요.”
“한... 일 년 반 정도...”
“이 조건에도 일 년 반 동안 건물이 공실이었다는 거네요? 아니면 다들 들어왔다가 원혼 때문에 놀라서 뛰쳐나가셨을까?”
송서영의 날카로운 질문에 중개사 아저씨는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 사무원이 깔끔하게 판정승을 거둔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휙 꺾더니 그만큼이나 계약 조건도 확 꺾어버렸다.
“계약금 50 코인. 월세 100 코인. 그렇게 하죠.”
“어떻게 반을 딱 깎습니까! 그렇게는 저 쪽도 계약을 안 하지요!”
중개사 아저씨는 펄쩍 뛰었지만, 송서영은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라도 계약 맺는 게 공실로 남겨두는 것보다는 나을 텐데요? 그리고 여기 있던 네크로맨서 길드의 모회사가 주식회사 소울라이즈라고 했나... 위령제를 제대로 하지 않은 걸 공론화하면 그 분들도 책임 소재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거 같은데...”
송서영이 말끝을 흐리자, 중개사 아저씨는 사색이 되어서 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건물주인 주식회사 소울라이즈의 대표는 근처에 있었는지 곧바로 왔다.
그는 꽤 깐깐해 보이는 인물이었지만 송서영의 상대는 아니었다.
송서영이 몇 마디를 쏟아 붙이고, 중개사 아저씨가 몇 마디를 거들자 계약이 성사되는 건 금방이었다.
우리 사무원은 심지어 자기가 제시한 조건에서 10%를 추가적으로 더 깎았다.
결과적으로는 계약금 45 코인, 월세 90 코인에 이 건물 5층을 통째로 빌리게 된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착한 조건이 어디 또 있을까.
【필수 퀘스트 : 길드 건물 마련 완료!】
[보상 :
1. 명성 +2
2. 영입칸 +1]
소소한 이득은 덤이었다.
송서영은 중개사 아저씨에게 중개료 5코인을 주고 돌려보냈다.
중개사 아저씨는 10 코인은 더 주셔야 한다는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했지만, 송서영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고는 두 말 않고 후다닥 도망쳤다.
"며칠만 더 시간을 끌었으면 10 퍼센트 정도는 더 깎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송서영은 그렇게 에누리를 받고서도 뭔가가 아쉬웠던 모양이다.
나는 이득도 이득이지만, 이 사람이 내 편이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 길드 마스터."
"왜요?"
"제가 알아보니까 이 건물에 있던 원혼들은 이미 거의 다 성불했대요. 위령제를 치르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나 봐요."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사무원 커넥션으로요. 하여튼, 원혼들이 거의 다 성불했으니 건물을 이용하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을 거라고 하네요. 가끔 유령견이 나오긴 하는데, 조금 시끄러울 뿐이고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하진 않을 거래요."
그래서 네크로맨서 길드가 썼다는 걸 알면서도 이 건물을 계약하자고 한 거였구나.
송서영이 열심히 길드 아지트를 조사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내 편일 때 든든한 사람이 있다.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때로는 악다구니를 쓰면서까지 대신 싸워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유난스럽다고 멀리하는 건 배은망덕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은근히 무시되기 쉬운 그 사람의 노고에 정중하게 감사를 표시하는 것도 길드 마스터의 책무가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에 송서영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길드 아지트를 생각지도 못한 조건에 구했네요. 고마워요.”
송서영은 의외로 부끄러워했다.
“사무원이 하는 일이 이런 일인 걸요. 너무 억척스럽다고 생각하지만 말아주시면 좋겠는데요...”
“억척스럽다뇨. 당당하고 끈기 있는 거죠. 그리고 뭐, 억척스러운 것도 좋잖아요?”
송서영은 어색한지 괜히 말을 돌렸다.
“길드원 분들에게도 새로운 길드 아지트를 보여드려야 할 텐데. 지금 연락할까요?”
“아, 그래야죠. 네. 그래주세요.”
자기 집에서 대기하고 있던 박정하와 이연채는 곧바로 달려왔다.
“여기가 길드 부활의 성지가 될 곳! 감개가 무량해지고!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저도 집에서 가까워서 편하게 다닐 수 있을 거 같아요.”
길드 빌딩에 비하면 상전벽해 수준이라 실망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그래도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길드 마스터. 그럼 어떤 시설부터 설치하실 건가요?”
“일단은 사무실부터 지어야죠.”
『소형 사무실』
「비용 : 100 코인」
「설명 : 길드 아지트의 가장 기본적인 시설로 사무원이 업무를 보는 장소입니다.」
「효과 : 사무원의 작업능률이 약간 증가합니다.」
일단은 사무실이 있어야 헌터를 채용하거나 각종 임무를 따올 수 있다.
있으면 신경도 안 쓰게 되지만 없으면 안 되는 본진 같은 느낌.
나는 계약금과 중개료를 지불하고 남은 250 코인 중 100 코인을 소모해서 복도 가장 안 쪽에 있는 방에 사무실을 설치했다.
방은 밝은 빛에 휩싸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깔끔한 사무실로 변했다.
그런데 갑자기 좀 궁금해졌다.
나야 길드 시설이 뚝딱 설치되는 것이 게임 시스템 덕분이란 걸 알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기적이 어떻게 비춰질까?
“그냥 원래 그런 거 아닌가요? 길드 마스터들의 고유 권한이죠.”
이연채는 왜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하긴. 몬스터가 돌아다니고 헌터들이 스킬을 쓰는 세상인데.
길드 아지트에 시설이 뚝딱뚝딱 지어지는 것 정도는 당연한 법칙 중 하나로 받아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일반적이지 않은 법칙도 알고 있지.
그것은 게이머이자 길드 마스터로 이 세계를 알고 있는 나이기에 가능한 꼼수.
길드 마스터로서 활약할 수 있는 순간은 이럴 때가 아니면 드무니까, 소소한 기회라도 놓칠 수는 없다.
나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송서영을 제지했다.
“길드 마스터? 왜 그러세요?”
“이 사무실, 바로 철거할 거거든요.”
“네...? 왜 그런 일을...?”
송서영이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길드 시설을 지었다가 철거하면 설치비용의 50%만을 돌려받는다.
그러니까 하나의 시설을 지었다가 바로 철거하면 손해를 보는 거지. 그래서 게임을 하다가 실수로 철거 버튼을 눌렀을 때는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곤 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실수가 아니다.
나쁘게 말하자면 꼼수, 좋게 말하면 히든 피스라고 할까.
"송서영 씨. 커피 자주 드시죠?"
"네? 네... 자주 마시는 편이죠."
"그럼 번거롭게 나가서 커피 사오고 그럴 필요 없어요. 사무실에 괜찮은 커피 머신 하나 들여놓겠습니다."
"그게... 길드 마스터가 지금 하시려는 일하고 무슨 관련이 있나요?"
"그럼요. 이제 시작합니다."
사무실을 짓고 남은 소지금은 150 코인이지만, 나는 바로 사무실을 철거해서 50 코인을 되돌려 받았다.
그럼 이제 내 손에 있는 것은 200 코인.
이 상태에서 다시 한 번 100 코인을 소모해서 사무실을 설치하고 곧바로 철거해서 50 코인을 돌려받는다.
이제 남은 것은 150 코인.
똑같은 행동을 한 번 더 반복.
이제 남은 것은 100 코인.
여기서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짓고 나면 드디어 소지금은 0 코인이 된다.
[소지금이 0 코인입니다.]
라는 홀로그램 창이 뜨고 나서, 바로 그 뒤에 또 하나의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특별 이벤트 : 사무실을 지었다가 부쉈다가 들었다가 놨다가】
[보상 :
1. 소형 사무실 업그레이드 (Lv. 3)
2. 초기 소지금 회복]
『소형 사무실 Lv. 3』
「설명 : 길드 아지트의 가장 기본적인 시설로 사무원이 업무를 보는 장소입니다. 커피머신과 가습기가 추가되었습니다.」
「효과 : 사무원의 작업능률이 상당히 증가합니다.」
[소지금이 1000 코인입니다.]
"좋아. 이제 끝났습니다."
사무실은 레벨 3까지 단번에 업그레이드 되었다. 안에 커피머신과 가습기가 추가되어서 사무원의 작업능률도 늘어났고.
소지금도 【헌터헌터 타이쿤】의 초기 소지금인 1000 코인으로 늘어났다.
“이게 대체 무슨...”
송서영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길드 마스터가 사무실을 부쉈다가 다시 지었다가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런 법칙이 있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거군요!”
물론 잘 알고 있다.
【헌터헌터 타이쿤】에서 내가 모르는 건 거의 없으니까.
이건 소형 사무실을 세 번 연속 철거한 다음, 다시 사무실을 지었을 때 소지금이 0 코인이 되면 발생하는 특별 이벤트다.
소지금이 적은 초반부에는 쏠쏠한 보상을 돌려주기 때문에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게임이기도 하면서 현실이기도 한 이 세계에서는 꼼수가 먹히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차근차근 고민해본 결과 꼼수가 여전히 먹혀들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판단했다.
다른 게임적 요소가 버젓이 현실화되었다면 꼼수만 현실화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어쨌거나 이렇게 꼼수가 먹힌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앞으로도 기억나는 대로 특별 이벤트 보상은 챙겨가야겠다.
정석과 꼼수 중에서 공략 방법을 가릴 여유는 없으니까.
그런 이유도 있지만, 사실 나는 여느 게이머들이 그렇듯 특별 이벤트 보상을 갈망하는 게이머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길드원 영입과 길드 아지트 마련은 이렇게 일단락 되었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헌터들을 육성할 때다.
나는 기대에 찬 눈빛을 한 박정하와 이연채를 사무실 안으로 끌어들였다.
일정부터 짜도록 할까.
참고로, 【헌터헌터 타이쿤】의 설정상 헌터 업계에는 아직까지 주5일제가 도입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