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화
소원의 탑을 지키는 수문장은 바로
“당신!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거죠?”
백호랑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했다.
저렇게 소리를 지르고 다니면 목청이 아프지 않을까.
“바로 며칠 전에 길드를 부활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이 백주대낮에 맛없는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면서 어슬렁거리는 건가요! 설마 벌써 포기한 건 아니겠죠!”
“사전답사 온 겁니다. 그리고 이거 맛있는데요.”
“거짓말! 어디 한 번 내가 먹어보겠어요!”
백호랑은 갑자기 내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는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맛있군요! 집사! 당장 이 아이스크림 회사를 인수하도록 하세요!”
“아가씨. 스마일 제과라면 이미 호랑 길드에서 최대 지분을 확보했습니다.”
“그럼 이 아이스크림을 개발한 사람들에게 금일봉을 주도록 하세요! 그리고 내 방 냉장고에 이걸로 한 박스 채워 넣도록 하고!”
백호랑은 노집사에게 다다다 쏘아붙이고는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아이스크림, 맛있었어요! 사전답사를 왔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군요! 좋아요! 계속 그렇게 정진하도록 하세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백호랑이 기분파라는 건 잘 알겠다.
“아니! 이 참에 잘 됐군요! 따라오도록 하세요! 호랑 길드가 소원의 탑을 등반하는 모습을 보여줄 테니!”
“갑자기요? 나랑 그 쪽은 경쟁하는 관계 아니었습니까? 경쟁자한테 전력을 보여줘도 되겠어요?”
“물론이죠! 나는 관대하니까!”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호랑 길드와 소원의 탑, 양쪽의 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지.
나는 기꺼이 백호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백호랑은 나를 호랑 길드의 대열 안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들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탓에 눈치가 좀 보이긴 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꿋꿋하게 걸었다.
"그런데 소원의 탑을 등반하려는 것 치고는 좀 수가 적은 거 아닙니까? 마흔 명 정도 되어 보이는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죠! 유서준zl존 길드가 몰락하면서 그 자리를 우리 호랑 길드에서 맡게 되었으니까! 던전 구역을 관리하고 게이트 출동에 나갈 인원들까지 데려올 수는 없잖아요? 소원의 탑을 등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랭크 1위 길드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럼..."
"그렇지만 소원의 탑 등반은 내 꿈이기도 해요! 그러니 차근차근 도전하면서 등반을 준비하려는 거죠! 계속 도전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정상에 닿을 수 있겠죠!"
백호랑은 생각보다 견실한 면이 있었다.
내심 감탄하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해주었더니 백호랑은 신나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다 좋은데,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걸 바로 옆에서 듣고 있자니 고막이 아플 지경이었다.
다행히 소원의 탑까지는 금방이었다.
소원의 탑에 다다르자 백호랑도 입을 다물었다.
바로 앞에서 본 소원의 탑은 웅장하고 거대했다.
고개를 목 뒤까지 젖혀도 구름 너머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탑이란.
그건 존재하는 것만으로 바닥에 붙어사는 우리들을 찍어 누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풍광이었다.
이런 곳을 정복하기 위해 오른단 말이지.
그건 참 오만하고, 철없고, 무모하고, 망상적이고, 또 낭만적인 발상이었다.
“당신! 웃고 있군요!”
백호랑이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런가. 웃고 있었을까.
“막상 소원의 탑을 보면 겁먹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이군요! 하긴! 나를 번번이 물 먹인 남자니, 그 정도 패기는 있는 게 당연하죠!”
백호랑은 빙긋 미소를 짓고는 내 등을 팡하고 때렸다.
손맛이 꽤나 매웠다.
“그럼! 가볼까요!”
탑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하나뿐이었는데, 거기에는 도개교가 내려져 있었다.
그리고 도개교 앞에 서 있는 하나의 형체.
“저건...”
“수문장이에요! 오늘은 기필코 뚫어내고 말겠어요!”
수문장이라니.
장팔사모를 어깨에 걸친 채 서 있는 소녀.
그것은 장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장비비.
내가 719번째로 영입한 길드원.
삼국지 게임과 콜라보하며 기간한정으로 출시한 캐릭터였지.
S급 영웅 영입권을 무려 열 장이나 뜯어서 겨우 얻은 헌터였다.
그것도 처음에 나온 건 장비비가 아니라 장비비 알이었는데.
장비비 알에서부터 키워서 장비비 병아리로 진화했을 때는 얼마나 기뻤던지.
장비비 병아리는 아침저녁으로 온도 조절을 세심하게 해주지 않으면 폐사할 위험이 있다고 해서, 알람을 맞춰놓고 여섯 시간마다 마이룸을 들락거리곤 했다.
여름에는 마이룸에 에어컨을 설치해줘도 덥다고 해서 아이스크림 선물을 잔뜩 해주었던가. 그럼 장비비는 그 아이스크림을 전부 먹고 나한테는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던지곤 했지.
참 귀여운 녀석이었다.
그렇게 애정으로 키운 내 장비비가 왜...
“왜 저기 있는 거지?”
“조종당하고 있는 거랍니다!”
백호랑은 손가락질로 장비비를 가리켰다.
“저기 머리 위에 끈이 붙어 있는 게 보이죠? 인형술사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거예요!”
실눈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장비비의 머리 위에 무언가 끈 같은 게 매달려 있는데, 그 끈은 도개교 안쪽 소원의 탑까지 이어져 있었다.
“…….”
나와 백호랑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장비비는 새까만 눈동자로 장팔사모를 쥐고 서 있을 뿐이었다.
나를 알아보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조금은 서운하고 아쉬웠다.
“앗! 이제 생각난 건데, 당신! 저 수문장이 당신의 길드원이라고 공격하지 말라거나 해도 소용없어요!”
“지금은 조종당하는 상태인 것 같고. 어쩔 수 없겠죠. 그래도 가능하면 치명상을 남기거나 하지는 않아줬으면 하는데요.”
“무력화만 시켜달라는 거죠? 그건 노력해보죠! 여하튼! 모두! 오늘은 반드시 수문장을 뚫고 탑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럼 바로 준비하도록 하세요!”
백호랑은 망토를 펄럭이며 외쳤다.
그녀의 명령에 따라 마법사와 원거리 암살자들이 각자의 무기를 장비비에게 겨누었다.
장비비는 장팔사모를 꽉 쥐기는 했지만 먼저 공격하지는 않았다.
비선공 상태인 걸까.
백호랑은 그걸 이용해 장비비에게 선공을 갈기며 최대한의 데미지를 줄 생각인 것 같다.
“일제공격!”
백호랑의 호령에 따라 다양한 이펙트가 발동하며 눈을 어지럽게 했다.
장비비는 금세 마법과 원거리 투사 무기에 뒤덮여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장비비는 S급 헌터답게 스킬은 물론이고 특성도 여러 개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인지적》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더욱 강해진다.〉
《강한 운명》
〈마법과 원거리 투사 무기로 인한 피해량이 감소한다.〉
그러니 지금 호랑 길드가 그렇게 하듯 다수의 원거리 공격을 쏟아붓는 것은 장비비에게 그다지 효과가 없는 공략 방법이다.
오히려 소수의 동급 헌터로 맞상대하는 게 훨씬 더 낫겠지.
하지만 백호랑에게 장비비의 약점을 말해줄 의리는 없다.
둘 중 한쪽 편을 들자면, 나는 역시 내 길드원인 장비비가 백호랑보다 더 소중하니까.
그건 장비비가 조종 당하고 있다고 해도 변함 없다.
여하튼 백호랑은 자신의 공략법에 확신이 있는지 계속 원거리 공격만을 지시했다.
“계속 밀어붙이도록 하세요!”
- 콰콰쾅!
- 슈우욱... 쾅! 쾅쾅!
백호랑의 지시에 따라 마법사와 원거리 암살자들은 아낌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굉음이 이어지기를 오 분 정도 되었을까.
일단의 공격이 끝나고 자욱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장비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연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아무도 말이 없지.
누군가는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기로 했다.
“해치웠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타타탁하고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검은 형체가 연기를 뚫고 질주했다.
“막아욧!”
전사들이 진형을 이뤄 방패를 내밀었다.
하지만 장비비는 가볍게 몸을 날려 전사들의 진형 안으로 들어와서 함성을 내질렀다.
“덤벼라! 죽여주마!”
《사자후 Lv.8》
〈주변의 적들을 겁에 질리게 한다.〉
강인한 전사들도 겁에 질렸다.
부정적인 너프 효과가 그들의 몸을 휘감았다.
지원가들이 급히 버프 스킬을 쏟아 부었지만, 그 사이 장비비는 전사들을 열 명이나 때려눕히고 있었다.
“밀리지 마라! 진형을 지켜!”
“지원이 필요합니다! 치유를!”
“멍청아! 앞을 봐! 아악!”
장비비는 결국 전사들을 뚫고 후위까지 다다랐다.
전사들이 모두 쓰러진 건 아니지만 그녀를 막을 이는 없었다.
장팔사모가 마력을 다 쓴 마법사들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 터억!
그녀의 공격을 막아선 것은 백호랑이었다.
커다란 호랑이 손바닥이 장팔사모를 꽉 쥐었다.
잠깐이었지만, 백호랑은 장비비와 팽팽하게 힘을 겨루었다.
어느새 그녀에게 호랑이 귀와 호랑이 꼬리가 나 있었다.
부분 수인화인가.
하지만 백호랑의 수인화로도 장비비의 근력을 오래 당해내지는 못했다.
애초에 장비비는 근력 수치로만 따지면 S급 헌터 중에서도 최상위 수준이다.
“끄으으... 이 무식하게 힘만 센 여자가...!”
“…….”
장비비는 바동거리는 백호랑을 밀쳐내고, 장팔사모를 휘둘렀다.
백호랑은 잽싸게 피하고 반격했지만 장비비는 쉽사리 공격을 파훼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장팔사모 연격.
한 번 공세를 잡은 장비비는 계속해서 장팔사모를 휘둘렀고, 백호랑은 피하기에 급급했다.
도중에 호랑 길드의 헌터들이 장비비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면 백호랑은 진작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일기토에 끼어든 헌터들은 그 값을 톡톡히 치렀고, 그들의 희생도 무익하게 백호랑은 점점 더 밀리고 있었다.
장비비는 이대로 백호랑을 끝내버릴 생각인지 가장 강력한 수를 꺼냈다.
《뱀가르기 Lv.10》
〈꿈틀거리는 장팔사모 창날로 적을 가릅니다.〉
- 부웅!
살벌하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백호랑은 공격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읏!”
노집사가 백호랑 앞으로 튀어나간 것과, 내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장비비에게 던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 탁.
장비비는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보고 멈칫했고, 그 덕분에 공격은 얕았다.
물론 장팔사모 자체의 공격력이 있었기에 노집사의 상처는 결코 얕지 않았지만.
노집사는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무덤덤하게 진언했다.
“아가씨. 이만 물러나셔야 합니다.”
백호랑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지만 곧바로 결단을 내렸다.
“후퇴! 후퇴하도록 하세요!”
그녀의 말에 호랑 길드는 질서 있게 대열을 꾸려 퇴각하기 시작했다.
지원가들은 대열 앞뒤를 오가며 상처 입은 길드원들을 치료했다. 노집사를 비롯해 상처가 심한 이들은 들것에 실려서 먼저 후송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다. 치유 스킬을 가진 지원가들이 많으니 다친 이들도 금방 회복할 수 있겠지.
장비비는 얼마간 호랑 길드를 쫓아갔지만 곧 멈추고 도개교로 돌아갔다.
소원의 탑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면 다시 돌아가도록 명령 받은 것 같다.
백호랑은 분한듯, 장비비에게 호랑이 손바닥을 겨누고 외쳤다.
“수문장!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반드시 당신을 때려눕히고 소원의 탑을 정복하고 말 테니까!”
“…….”
하지만 장비비는 멍한 눈으로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는 다시 장팔사모를 쥔 채 도개교 앞에 섰다.
백호랑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내게 눈인사를 하고 길드원들과 함께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등을 돌린 백호랑과 장팔사모를 쥔 장비비를 번갈아보다가, 장비비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발치에는 아까 내가 던진 아이스크림 막대기가 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