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화
장비비와 약속
끈이 떨어지자마자 장비비는 배터리가 나간 기계인형처럼 앞으로 털썩 쓰러졌다.
나는 그녀가 얼굴을 땅에 박기 전에 겨우 안아들었다.
장비비의 내구력이라면 시멘트 도로에 얼굴을 박아도 오히려 시멘트 도로가 부서지겠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가 않으니까.
“이긴 거죠? 우리가 이긴 거 맞죠?”
이연채는 저 멀리에서부터 깡총깡총 뛰어오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박정하도 쿵쿵 소리를 내며 합류하고, 마음 졸이고 서 있던 송서영도 달려왔다.
“비비야!”
그런데, 방금까지만 해도 펄펄 뛰어다니던 장비비는 눈을 꼭 감은 채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글쎄요... 응? 웰시야. 방금 뭐라고 했어?”
“알! 아르르르!”
그녀 정수리 끝에는 아직도 영체 끈쪼가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웰시가 도개교 쪽에서부터 끈을 물어뜯었기에 이 쪽에는 여전히 끈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웰시는 장비비의 머리에 앞발을 얹고 영체 끈을 물더니, 그대로 주둥이를 흔들어 끈을 아예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장비비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래도 바로 눈을 뜨지는 못했지만.
이연채가 슬쩍 장비비의 볼을 찔러보면서 말했다.
“물이라도 먹여줘야 하는 거 아닐까요?”
“누구 물 가져온 사람 있어요?”
“아뇨.”
잠깐 고민하던 내 눈에 근처 널부러진 아이스크림들이 들어왔다.
다 녹아서 액체가 되어버린 아이스크림.
그 중에서 그나마 상태가 좋은 걸 하나 집어서 조심조심 포장지를 뜯었다.
안에는 찰랑찰랑 아이스크림 녹은 물이 들어있었다.
음. 생각해보면 옛날에는 설탕물을 약 대신 썼다고도 하지.
“길마, 그거 새벽햇살인데요? 괜찮은 거예요?”
“네. 원래 음료수였던 걸 아이스크림으로 만든 거니까, 이거 녹은 건 그냥 음료수 맛 아니겠어요?”
“으음... 뭐... 그렇겠죠?”
이연채는 뭔가 꺼림칙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장비비에게 새벽햇살 녹인 물을 먹였다.
장비비는 내가 조금씩 넘겨주는 대로 꼴깍꼴깍 새벽햇살을 마시다가, 번쩍 눈을 떴다.
“삐약삐약!”
갑자기 튀어나온 병아리 소리.
다들 혼란스러운 침묵에 빠졌다.
송서영이 그나마 변호에 나섰다.
“아마...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유아퇴행한 게 아닐까요?”
“꼭꼭! 꼬꼬댁!”
“…….”
송서영도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면 장비비가 알이랑 병아리일 적에는 마이룸에서만 키웠으니까. 송서영도 그 때의 장비비는 모르는 거겠지.
장비비는 몇 번 더 이상한 소리를 내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형님!”
“... 아직도 정신이 오락가락한 걸까요?”
“아뇨.”
나는 장비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원래 비비는 저를 형님이라고 불렀어요.”
***
이래저래 하는 사이에 날짜가 바뀌어 토요일이 되어버렸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일단 다들 퇴근하기로 하고, 장비비만 내 옆에 남았다.
“제 집에서 재워도 되는데요.”
송서영은 그렇게 말했지만, 장비비 본인이 나를 따라오고 싶어했다.
“형님! 배고파!”
그녀는 조종당한 일 따위는 없다는 듯 명랑하게 외쳤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문 여는 식당은 24시간 순대국밥집 밖에 없었다.
순대국밥 괜찮으려나.
장비비한테 순대국을 선물로 줘본 적은 없었는데. 애초에 선물 목록에 국밥 같은 건 없었고.
괜찮겠느냐고 물어보자, 장비비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장비비는 곧장 메뉴를 짚어가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나는 컵에 물을 채우면서 바로 주문했다.
“아주머니. 순대국 십인 분에 수육 대 자로 하나 주세요.”
“수육은 지금 안 되는디요.”
“그럼 모듬순대 대 자로요.”
식사는 바로 나왔다.
미리 만들어놓은 국과 순대를 데우기만 한 것 같다.
그래도 장비비는 맛있다고 허겁지겁 먹었다.
“천천히 먹어. 체할라.”
“배고팠어!”
장비비는 공기밥을 순대국에 풍덩풍덩 말면서 투덜거렸다.
“계속 밥도 못 먹었단 말이야. 그런데 소원의 탑을 지켜라, 가까이 오는 자들을 물리쳐라, 하는 목소리가 머릿 속에서 들려서 엄청 짜증났다구.”
“기억은 하는 거야?”
“음... 사실 잘 기억은 안 나. 꿈꾸는 줄 알았거든. 안 좋은 꿈.”
장비비 자신이 수문장으로 서 있었던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마지막 기억은 소원의 탑을 등반하던 중 낙오되었을 때였다.
장비비는 혼자서 몽달가면을 쓴 인형술사와 싸우다가 붙잡혔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기억이 애매하다고.
“그치만 분명히 형님이 구해줄 거라고 믿고 있었어.”
“내가?”
“동료들은 분명히 소원의 탑을 정복할 거고, 그럼 형님이 올 테니까. 그리고 형님은 나를 구해주러 올 거니까.”
당연히 믿었다는 그 말에 무어라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나는 그냥 묵묵히 깍두기를 덜어주었다.
장비비는 갑자기 내 손을 잡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웃었다.
“이게 형님 손이었구나. 생각보다 엄청 크진 않네! 병아리였을 때는 엄청 커보였는데!”
“그냥 평범한 손이야.”
“그치만 따뜻해! 형님! 쓰담쓰담 해줘!”
장비비는 자기 머리를 들이밀면서 내 손바닥에 문질러댔다.
아이처럼 투정부리는 건 내가 장비비를 알에서부터 키웠기 때문일까.
각인 효과라고 하던가. 오리 새끼나 병아리는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본 대상을 어미라고 생각한다고 하던데.
장비비한테는 내가 엄마나 아빠처럼 보이는 걸 수도 있겠다.
형님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장비비의 기원은 삼국지의 장비인만큼 그녀에게 있어 형제가 가지는 의미는 부모보다도 더 큰 것이겠지.
어쨌든.
장비비를 구해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식당 아줌마한테 꼬리를 치던 웰시가 알! 하고 울었다.
장비비를 구한 일등공신은 역시 웰시였지.
나는 식당 아줌마한테 부탁드려서 돼지 뼈를 조금 샀다.
“먹지는 못해도 흠향(歆饗)할 수는 있지?”
돼지 뼈를 받은 웰시는 킁킁하고 냄새를 맡으며 좋아했다.
***
장비비는 순대국을 다섯 그릇이나 더 시켜 먹고서야 겨우 허기가 가셨다고 했다.
더 먹으려면 더 먹을 수도 있다지만, 밤중에 너무 많이 먹어도 좋은 건 아니겠지.
해가 뜨면 더 맛있는 걸 먹여주겠다고 약속하고 우리는 길드 아지트인 낡은 건물로 돌아갔다.
5층에 있는 길드 시설은 사무실, 수면실, 샤워실, 훈련실이 다다.
아. 그리고 공실도 하나 있지. 여기에는 대장간이나 연구소를 지을까 하는데, 아직은 먼 일이다.
어쨌든 길드 아지트 소개는 금방 끝났다.
“뭐야. 건물 엄청 낡았잖아. 좁고. 시설도 별로야. 힘내 너구리는 어디 갔어? 카페테리아는?”
장비비는 길드 아지트를 둘러보고는 툴툴거렸다.
스타팅 멤버와는 달리 장비비는 이미 길드가 한참 큰 후에 S급 헌터 영입권을 열 장이나 뜯어서 영입해온 귀한 몸인지라. 이런 열악한 상황은 처음 겪어보는 거다.
나는 솔직하게 길드가 어렵다는 사정을 이야기해주었다.
“... 그럼 어쩔 수 없지.”
장비비는 어깨를 으쓱하고 물었다.
“그런데 누님들은?”
장비비가 누님으로 섬기는 사람이라면 유비비와 관유유다.
그녀들도 마찬가지로 소원의 탑 어딘가에 있을 터.
“그러니까 당장은 못 만나.”
그런 대답을 들으면 시무룩해 할 줄 알았는데.
장비비는 씨익 하고 웃었다.
“그럼 형님을 나 혼자만 차지하는 거네?”
“어감이 좀 이상하다?”
“나 혼자 SSS급 형님 독식.”
“그런 말 하면 못 써.”
장비비는 키득키득 웃다가 하품을 했다.
“졸려!”
“잘 시간이 한참 넘었긴 했지. 이제 자자.”
수면실에는 이층 침대가 네 개나 있다.
남녀가 같이 쓴다는 게 뭐하긴 하지만 나한테 장비비는 여동생 같이 보이고 장비비도 나를 형님으로만 볼 테니까.
그래도 나중에는 가벽이라도 구해서 세워 놔야겠다.
아니면 수면실 업그레이드를 해서 구획을 나누든지. 수면실 레벨을 10까지 올리고 나면 기숙사를 올릴 수 있었지, 아마?
어쨌든 당장은 피곤하니까 오늘은 이대로 자기로 했다.
마음에 드는 침대에 가서 자라고 했는데, 장비비는 대뜸 내 침대로 뛰어들었다.
“형님! 쓰담쓰담해줘!”
“재밌는 이야기 해줘!”
“아이스크림 먹여줘!”
바라는 것도 많다.
못해줄 것도 없기는 하지만.
“아이스크림은 안 돼. 아까 양치했잖아.”
“아이스크림 먹고 형님이 또 양치 시켜주면 되잖아.”
아이스크림은 먹여줬다.
양치는 스스로 하게 했지만.
시간을 보니 새벽 세 시.
이제 슬슬 피곤해서 기절할 것 같다.
“이제 잘 시간 됐으니까 가서 자.”
“여기서 같이 자면 안 돼?”
“좁은데 같이 자고 싶니?”
“응!”
“응. 안 돼.”
장비비는 입술을 투르르 불고는 이층침대 위로 올라갔다.
간다는 게 거기냐.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건지 진동이 침대 프레임을 타고 전해진다.
그래도 조금 있다가는 조용해졌다.
나도 자려고 눈을 딱 감았는데, 위에서 장비비가 말을 걸어왔다.
“형님.”
“응?”
“구해줘서 고마워.”
어쩐지 멋쩍다.
나 혼자 한 일도 아니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인데.
무어라 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장비비는 작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형님. 있잖아... 언젠가는 누님들도 꼭 구해줘.”
그 말에 무어라 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한참 전에, 이 세계에 소환된 순간에 정해놓았으니까.
“언젠가 네 언니들이랑, 다른 길드원들이랑 다 구해서. 다시 돌아가자. 우리 길드 건물로.”
힘내 너구리와 카페테리아가 있는 우리의 길드 아지트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장비비는 이층침대 위에서 아래로 손을 내렸다.
나는 거기에 새끼손가락을 꼭 걸고 약속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