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화
동물원 게이트 (2)
시큼한 체액 냄새가 코를 찌른다.
쇠창살을 꽉 쥔 손바닥에는 벌레의 체액이 찐득하게 붙어있다. 살짝 손가락을 쥐었다가 펴면, 손마디마다 붙어있는 끈적끈적한 점액이 쭉 늘어난다.
역겹지만, 세세하게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다.
나는 쇠창살을 힘주어 꾹 쥐었다.
저기, 벌레 한 마리가 또다시 이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흡!”
온힘을 다해 애벌레를 후려치자, 묵직한 타격감이 쇠창살을 타고 손바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애벌레는 쇠창살을 맞고도 몸을 약간 비틀 뿐이었다. 이럴 때면 내 허약한 몸으로 이 세계에 떨어진 게 참 답답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제 와서 우는 소리를 해봐야 소용없지.
사람은 누구나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쇠창살을 휘둘렀다.
열 번 휘둘러서 안 되면 스무 번을, 스무 번 해서 안 되면 서른 번을 휘두른다.
- 찍!
한참 두들겨 맞던 애벌레는 결국 못 버티고 체액을 내뿜으며 퍼졌다.
겨우 한 놈을 해치웠지만 한숨을 돌릴 겨를도 없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거미, 애벌레, 거미, 애벌레, 거미, 애벌레, 그리고 또 거미와 애벌레 뿐이었다.
소용돌이 게이트를 헤치고 나온 벌레들은 질릴 정도로 많았다.
울부짖던 원숭이 울음소리가 끊긴지도 한참이다.
동물의 왕이라던 사자와 호랑이도 모두 무참히 잡혀먹었다.
동물 우리에는 동물 대신 벌레들만 득실거렸다.
고개를 들어보면, 허공을 뒤덮은 거미집이 한층 더 짙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안개가 낀 것처럼 보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숫제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거미집에 대롱대롱 매달린 고치의 수도 늘어났다.
이 쪽 구역을 담당한 길드라면서 달려온 녀석들이 모조리 붙잡혔기 때문이다.
"그러게 같이 좀 싸우자니까..."
함께 싸웠다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는데.
그들은 자기네가 이 곳을 담당한다는 걸 앞세워서 나와 장비비를 통제하려 했다.
고집 센 장비비가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지시를 들을 리가 없고. 그네들도 내 중재를 들은 체 만 체 했다.
결국 두 집단은 서로 각기 싸웠다.
그러다가 저 쪽 집단은 붙잡혀서 고치뭉치가 되었지.
그들이 바로 잡아먹히지 않은 것은 다행이면서 불행이기도 했다.
그만큼 아라크네가 교활하다는 뜻이니까. 녀석은 인질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에 다시 애벌레들이 기어왔다.
“흐읍!”
얼른 녀석들을 후려쳐서 거리를 벌렸다.
애벌레는 거미에 비하면 속도도 느리고 위협적이지도 않다. 그나마 내가 대적해 싸울 수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애벌레의 위험성은 놈들이 진화한다는 데에 있다.
이미 저쪽 한편에는 단단한 번데기를 이룬 군집이 생겨나있다. 번데기를 깨고 나방이 태어나면 더는 버틸 수 없겠지.
“형님! 이러다가는 안 되겠어! 형님이라도 물러나!”
장비비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사실 나는 내 한 몸 간신히 지키고 있었을 뿐이니, 지금껏 장비비 혼자서 게이트 두 개 분의 몬스터를 모조리 상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보다 지쳤을 텐데도 장비비는 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
내가 물러나야 장비비도 물러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물러나는 게 맞는데.
아무래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건 게임이 아니니까.
게임이 아니니까, 리트라이 따위는 없는 것이다.
“형님! 서둘러야 해!”
“잠깐만... 잠깐만 시간을 줘.”
“알았어. 그치만 정말 잠깐이야!”
장비비는 쇠창살을 휘둘러 거미들을 견제했다.
저 허공 위의 거미집에 매달린 고치들 중 몇 개는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하지만 대다수의 고치들은 거의 미동이 없다. 기절한 건지, 숨을 쉴 수 없어서 죽어가는 건지는 모르겠다.
한 번 퇴각했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고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을 놔두고 도망치는 건 비겁한 짓이겠지.
그러나 나나 장비비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그들을 구해야 하는 건지 생각해보면, 역시 망설이게 된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한 게 아닐까.
아주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다른 헌터들을 모아서 다시 오겠다는 거잖아.
역시 일단은 물러서야 한다.
그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겠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했을까?
한 발자국 물러서기 전에, 나는 그렇게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쇠창살을 다시 한 번 꽉 쥐어본다.
여전히 힘이 들어간다.
그렇다면, 한 번만 더.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보자.
이건 게임이 아니니까.
저기 고치에 갇힌 사람들의 목숨은 데이터가 아니니까.
“비비야.”
이름을 부르기만 했는데, 장비비는 씩 웃었다.
“형님. 도망치지 않겠단 거지?”
“...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형님은 엄청 무모한데다가 엄청 끈질기니까.”
장비비가 생각하는 나는 게임플레이를 하는 게이머로서의 나일 텐데.
게임 속에서야 몇 번이고 리트라이가 가능하고 수틀리면 캐시 아이템을 쓰면 되니까 그랬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그치만 나는 형님이라서 형님을 따르는 거니까! 그리고 형님은 지금도 무모한 짓을 하고 있잖아? 난 그런 형님이라서 형님을 좋아하는 거야!”
장비비는 힘차게 소리치면서 쇠창살을 바닥에 두들겼다.
그 울림소리에 자극 받은 새끼 거미들이 앞다리를 세운 채로 밀려들어왔다.
장비비는 내 주변을 빙빙 돌면서 거미들을 닥치는 대로 쓸어버렸다.
“계책은 있는 거지?”
“일단은.”
“내가 해야 할 건?”
“최대한 주의를 끌어줘.”
“알았어!”
장비비는 한껏 숨을 들이마시고 우렁차게 포효했다.
“덤벼라!”
동족을 수도 없이 학살한 자의 도발이다.
거미와 애벌레들은 서로 몸을 부대끼며 격류처럼 쏟아져 내렸다.
“덤벼라! 덤벼! 덤벼라, 겁쟁이들아!”
장비비는 도발을 계속하며 더 많이 벌레들을 끌어들이며 서서히 물러났다.
가만히 보고만 있던 아라크네도 이어지는 도발에 견디지 못하고 장비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편, 나는 장비비와 반대로 달렸다.
대부분의 몬스터는 장비비에게로 향했지만, 내 쪽으로 주의를 향하는 녀석들도 드물게나마 있었다.
하나씩 다 상대해 줄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고.
속도가 느린 애벌레는 피해가고, 새끼 거미는 다리를 후려쳐서 쫓아오지 못하게 한다.
거미줄이 점점 더 엉켜오면서 몸이 무거워지지만, 간신히 거미집 앞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교활한 아라크네가 소중한 인질이 담긴 고치를 무방비로 방치해두었을 리 없다.
덩치가 커다란 거미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녀석의 주둥이를 향해 쇠창살을 휘둘렀다.
거미에게는 뻔히 보이는 공격이었을 터. 녀석은 앞다리를 들어 쇠창살을 잡으려 했다.
“영광을 위하여!”
《독려 Lv.1》
〈주변 동료들의 공격력과 공격속도를 증대시킨다.〉
휘둘러진 쇠창살이 급격히 빨라진다.
거미의 앞다리는 간발의 차로 쇠창살을 놓쳤다.
- 텅!
쇠창살이 거미의 주둥이를 두들겼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거미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녀석의 더듬이 다리를 때렸다.
거미는 여덟개 다리를 모두 허우적거리다가 벌러덩 뒤집어졌다.
동료가 당한 걸 본 다른 거미들은 신중하게 내게 접근했다.
이렇게 되면 곤란한데.
다시 쇠창살을 휘둘렀지만, 미리 경계하고 있던 거미는 쉽사리 쇠창살을 쳐내고는 내 어깨를 물어 뜯었다.
“으큭...”
아팠다. 욕이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두려워했던 것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심각한 부상을 입으면 엔돌핀이 분비되어서 통증이 완화된다던데 그런 걸까. 오히려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해서 당황스러웠다.
나는 웃음을 털어내며 외쳤다.
“물러서지 않으리!”
《독려 Lv.1》
〈주변 동료들의 공격력과 공격속도를 증대시킨다.〉
효과가 한 번 더 중첩된다.
주먹을 휘둘러 나를 문 거미 놈의 홑눈을 후려친다.
눈은 생각보다 딱딱했다. 있는 힘껏 쳤는데도 조금 파편이 튀었을 뿐이다.
거미는 화났는지 내 어깨를 더 강하게 문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 섬뜩하다.
지켜보고 있던 거미들이 다가와서 내 몸 근처에 거미실을 자아낸다.
나도 고치 안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몸부림쳐서 거미줄을 한 차례 흩어냈다.
휴식을 취하지 않는 이상 독려 스킬은 세 번까지밖에 쓸 수 없으니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이 마지막.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자.
“싸우라!”
《독려 Lv.1》
〈주변 동료들의 공격력과 공격속도를 증대시킨다.〉
그렇게 외쳤지만 나는 이미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거미줄에 묶여있었다.
주먹을 내지르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나를 칭칭 묶던 거미들이 낄낄 비웃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끝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이제 나의 외침이 고치 안에까지 잘 들렸기를 바라는 수밖에...
- 펑!
그 순간, 허공의 거미집에 매달려 있던 고치가 터졌다.
이어서 그 옆에 있는 고치와 그 옆에 있는 고치도 북 터뜨리는 소리와 함께 하나씩 터져나갔다.
“웩. 온 몸이 끈적끈적해.”
“다들 괜찮아?”
“승빈이가 좀 다쳤어.”
“빌어먹을 거미 새끼들...”
남자 둘, 여자 둘.
이 구역을 담당한답시고 왔다가 붙잡힌 헌터들이었다.
그들은 고치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린 후에도 서로 왁자지껄 떠들었다.
잠시 떠들던 여자는 드디어 내 쪽을 보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참. 그 쪽 남자 분, 버프 고맙습니다!”
“인사치레는 나중에 해주세요.”
“네. 그럼 일단은...”
여자는 손목을 빙빙 돌리더니,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거미들은 그녀를 향해 마주 달려갔지만, 여자가 한 번씩 걷어차자 맞은 부분의 몸뚱이가 푹 들어가서 빌빌거렸다.
"좋아! 다들, 마구 때리자!"
거미들을 향해 나머지 일행들도 각자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