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화
지나친 음주는 사고의 원인이 됩니다
길드 아지트 옥상은 은근히 넓다.
파견 다녀온 박정하, 훈련을 마친 이연채, 오늘도 낮잠을 잔 장비비, 언제나 혼자서 열일하는 송서영, 마지막으로 나까지 총 다섯 명이 모여앉아도 옥상은 넉넉했다.
“알!”
맞아. 웰시도 있었지.
웰시는 초저녁부터 나와서 꼬리를 흔들고 있다.
누가 개코 아니랄까봐 고기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
- 치이익
나란히 놓인 가스버너 네 개가 동시에 한우를 구워내고 있었다.
한우도 넉넉하게 준비했지만 삼겹살과 소세지도 두둑하게 사두었고, 그걸로 부족할까봐 족발과 보쌈도 따로 시켰다.
“그런데 정말 이걸로 괜찮겠어요?”
나름 준비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회식인데 옥상에서 고기 구워먹는 건 좀 그렇지.
기자들이 졸졸 쫓아다니지만 않았어도 근사한 곳에 가서 스테이크를 썰었을 텐데.
이연채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죠. 뭐 하나 건수 없나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데... 괜히 나갔다가 어디서 사진 찍힐까 가슴 졸이면서 먹는 것보다는, 맘 편하게 이렇게 고기 구워 먹는 게 나아요.”
이연채는 기자들이 자기 핸드폰에 불이 날 정도로 전화를 해서, 어쩔 수 없이 번호를 바꿨다고 했다.
박정하는 잡지사에 있는 친구가 계속 소재거리를 던져달라고 부탁해서 고민이라고 하고.
한바탕 기자들을 성토하는 이야기가 돌고 나서, 송서영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만큼 기대 받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길드 말이에요.”
좋은 관심이란 거지.
나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한다.
관심이 있으니까 화제가 되는 거고, 화제가 되니까 기자들이 몰리는 것이다.
하지만 길드원들의 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가 되면 안 되지.
“신문사에 공문부터 돌려봅시다. 사생활까지 지나치게 보도하는 건 자제해달라고.”
“알겠습니다. 공문을 돌리면서 슬쩍 커뮤니티에 내용을 흘리면, 기자들의 보도 경쟁이 길드 운영을 어렵게 한다는 식으로 분위기 반전을 노려볼 수도 있겠네요.”
아니. 그것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듣고 보니 괜찮은 방안이라, 그건 송서영에게 맡기기로 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장비비가 고기를 노려보고 있다가 외쳤다.
“이제 뒤집어야 돼!”
“알!”
웰시도 이러다 고기 다 탄다며 보챘다.
회식한다고 해놓고 일 얘기만 했네.
“미안합니다. 이제 일 얘기는 그만하고 맛있게 먹죠.”
“그럼, 제가 LA 유학 가서 배워온! LA류! 고기 절단술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박정하는 집게와 가위를 들고 고기를 석둑석둑 잘랐다.
이연채는 눈치껏 물 컵을 채우고 티슈를 나눠주었다.
내가 뭘 할 새도 없었다.
이래서 사장이니 대표니 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게을러지나 보다.
“길드 마스터. 거기 양념장 좀 섞어주세요.”
하지만 만능 사무원이 시키면 해야지.
나는 마늘을 다져넣은 양념장을 휙휙 섞었다. 살짝 젓가락 끝으로 찍어먹어 봤는데, 내가 여태껏 먹어봤던 양념장 중에 제일 맛있었다.
이걸 송서영이 직접 만들었다는데. 우리 사무원님은 어째 못 하는 게 없다.
- 치이익
고기 익는 소리는 참 기분을 좋게 한다.
장비비는 몸을 좌우로 흔들흔들하면서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웰시도 따라서 알알 추임새를 넣고, 그러다가 킁킁 냄새를 맡기도 하고.
흠향(歆饗)하면 음식 맛이 밋밋해지긴 하지만, 웰시도 우리 길드의 일원이니까. 아예 웰시 몫을 따로 빼주었다.
"이제 다 구워진 거 같은데요?"
각자 고기를 접시에 덜고 술잔을 채웠다.
그러다가 다들 나한테 건배사를 하라고 해서, 어정쩡하게 일어섰다.
“이런 건 잘 못하는데...”
“형님! 패기 있게 하는 거야!”
장비비가 응원 아닌 응원을 보내줘서, 나는 한숨을 돌리고 말했다.
“짧게 하겠습니다. 환영회 한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또 이렇게 회식 자리를 갖게 됐네요. 저로서는 이런 자리를 갖는 게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길드원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느껴질지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형님! 짧게 한다며!”
“아, 그러니까, 뭐,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합시다. 건배!”
“건배!”
다들 짠하고 잔을 부딪쳤다.
잠깐. 그런데 장비비 설정 나이가 몇 살이더라?
“형님! 그런 걸 시시콜콜하게 신경 쓰면 사나이가 될 수 없는 거야!”
“그, 그런가.”
장비비는 호쾌하게 술잔을 들이켰다.
잘 마시는구나 하고 지켜보고 있자니 박정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길드 마스터!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네, 네. 일단 따라놓은 것부터 마시고요... 잠깐만, 넘치는데요?”
“제! 넘치는! 열정을! 표현한! 겁니다!”
박정하는 술잔에 술 한 방울 한 방울을 꾹꾹 눌러 담았다.
나는 그걸 마시느라 진땀을 뺐다.
너도 당해보라고, 반대로 박정하에게도 꽉 채운 잔을 넘겨주었지만, 그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렇게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해도 저물고 분위기도 느슨해져 있었다.
길드원들이 서로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옆에서 듣고 있으면 은근히 재밌기도 하다.
박정하는 우리 길드를 숭배하는 만큼 장비비도 존경했다.
장비비는 시큰둥했지만 그래도 같은 전사 포지션의 후배라고 몇 가지 팁을 알려주었다. 그걸 박정하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박정하도 나름대로 노력하겠지.
이연채는 송서영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지 자꾸 말을 붙였다.
송서영은 친해지기 쉬운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아직은 갈 길이 먼 것 같다. 그래도 일단 친해지면 엄청나게 퍼주는 성격이니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길드원들 너머로 저녁노을이 지는 서울을 바라보았다.
내가 살아왔던 세계와는 조금 비슷하면서 많이 다른 세계.
어디선가는 비룡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저 멀리 구름에 가려진 소원의 탑이 보인다.
역시, 아직은 가끔씩 위화감이 느껴진다.
“길드 마스터! 한 잔 더 받으시죠!”
“길마~ 서영 언니가 자꾸 저한테 매몰차게 대해요~”
“이연채 헌터님. 그렇게 고자질하는 건...”
“형님! 고기 더 구워줘! 다 먹었어!”
길드원들이 나를 끌어당겼다.
어쩐지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래요, 일단은 먹고 마십시다. 싸우지들 마시고."
나는 다시 술자리로 돌아왔다.
***
슬슬 어둑어둑해질 무렵.
사무실에 놔두었던 조명등을 옥상으로 옮기고 나서도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웰시야. 언니한테 오렴. 우쭈쭈, 이리 와. 우쭈쭈... 으응? 안 오겠다 이거야?”
이연채는 술 냄새를 풍기면서 유령견인 웰시를 안겠다고 허우적거렸다.
웰시는 헥헥거리면서 자기 몸을 스치는 손길을 받아들이다가, 이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벌러덩 드러누웠다.
“... 읍!”
송서영도 상당히 취했는지 빨개진 얼굴로 딸꾹거리다가 입을 가렸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모른 척 해주기로 했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분위기는 한창 열창 중인 박정하 덕분에 한층 더 시끄러웠다.
분명 처음에는 누가 불러달라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 아무도 안 들어주는 거지.
그래도 박정하는 꿋꿋이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어수선한 술자리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으... 또 기자인가...? 내 번호 바꿨는데...”
“아니, 제 전홥니다.”
금철두 번호였다.
얼른 받아보니, 금철두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한 마디만 딱 했다.
“앞이다.”
“앞이요?”
“건물 앞이라고.”
“아니, 이 시간에 왜...”
나는 난간 쪽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금철두는 저번에 한 번 얼굴을 본 제자와 함께 커다란 나무 상자를 짊어지고 건물 앞에 와있었다. 아마 제작 의뢰 맡긴 걸 벌써 끝마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이 밤에 불쑥 찾아올 건 없잖아.
장인들이 특이하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어쨌거나 이렇게 왔는데 달랑 물건만 받고 가라고 하기도 뭐해서, 금철두와 제자를 옥상으로 모셨다.
“술이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니. 됐어. 그보다도 물건 확인이나 해 봐.”
“네, 좋은데요. 역시 금철두 씨에게 맡기길 잘했군요.”
금철두는 그럴 줄 알았다며 씩 웃고는 그냥 가버렸다.
그나마 제자가 인수증을 써달라고 해줘서 얼른 써줬는데, 종잡기 힘든 스승 밑에서 고생한다 싶다.
어쨌거나 그가 지나간 술자리에는 커다란 나무 상자가 덩그러니 놓였다.
다들 거기에 몰려든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이번에 그...”
“네. 아라크네를 토벌하고 얻은 전리품으로 제작한 아이템이에요.”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검청색 갑옷이 세 벌이나 들어 있었다.
『아라크네 아머』
「설명 : 명장(名匠) 금철두가 아라크네의 몸체와 아라크네의 거미줄을 조합 소재로 하여 제작한 갑옷입니다. 모든 거미종과 벌레들은 이 갑옷을 입은 자 앞에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효과 :
1. 착용자의 내구력과 방어력이 상당히 증가합니다.
2. 곤충계 몬스터에게 위압감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박정하, 이연채, 그리고 내 몫까지 총 세 벌.
괜히 입술을 툴툴거리는 장비비는 이것보다 훨씬 더 좋은 자기 갑옷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정하 씨랑 연채 씨가 쓰면 돼요. 물론 아주 주는 건 아니고, 길드에 있는 동안 임대하는 형식이 되겠지만...”
박정하와 이연채는 그런 거야 어찌 됐든 일단 갑옷을 보고 입이 귀에 걸렸다.
“감사합니다! 길드 마스터! 아라크네 소재로 만든 갑옷이라니!”
“솔직히 제가 쓰기엔 과분한 것 같은데... 더 열심히 할게요.”
헌터가 장비를 탐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둘 다 바로 입어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입고 싶으면 입으라고 했더니 정말로 그 자리에서 껴입었다.
그렇게 말하는 나도 바로 아라크네 아머를 입어보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가볍고 편했다.
우리는 셋이 서로 갑옷을 때려보기도 하고 부딪쳐보기도 하면서 놀았다.
든든한 갑옷이 주는 안정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뭐가 와도 튕겨낼 수 있다는 전능감이랄까. 당장이라도 소원의 탑을 등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장비비가 내 이마에 꿀밤을 먹이면서 그 전능감은 산산조각 났지만.
어쨌든 길드원들이 질 좋은 갑옷을 장만했으니까 차차 공격적인 레이드에 참여해도 괜찮을 것 같다.
“길마, 그런데 이건 뭐에요?”
이연채는 상자 한 쪽에 따로 포장되어 있던 작은 함을 들어보였다.
그 안에는 정수를 담은 유리병이 있었다.
혹시 몰라서 몇 번 더 감정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결국 금철두는 끝내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다.
금철두 본인도 알아내지 못한 게 부끄러워서 그냥 아무 말 없이 돌려준 거 아닐까.
대략 간추려서 설명하자, 이연채는 눈동자를 빛냈다.
“그거, 엄청 좋은 비약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반대로 엄청 나쁜 독일 수도 있어요.”
“정수가 독이 되는 경우는 없었던 거 같은데...”
“그렇긴 하죠. 그런데 감정 레벨을 9까지 올린 대장장이도 이 정수가 뭔지 정체를 모른다잖아요.”
이연채는 나와는 생각이 다른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분명 좋은 영약일 거라고 말했다.
박정하도 이연채에게 동의했다.
“길드 마스터! 제가 소설을 좀 읽어봤는데! 주인공이 뭘 먹고 죽는 소설은! 단언컨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건 소설이니까 그렇죠.”
“길드 마스터도 인생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이십니다!”
“아니, 그런 교훈적인 이야기로 퉁치려고 하지 마시고.”
나는 장비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호걸 장비비가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할지는 뻔할 뻔자였다.
“못 먹어도 고!”
보통 이럴 때 말리는 포지션인 송서영은 저기 탁자에 고개를 처박고 잠들어 있다.
그러니 박정하와 이연채, 장비비는 셋이서 입을 모아 그건 엄청나게 효과 좋은 영약일 거라고 떠들어댔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고 했던가.
듣다보니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취기 탓에 명확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게 힘들어진다.
“마셔라! 마셔라!”
“길드 마스터! 안 드신다면 제가 한 번! 마셔보겠습니다!”
“형님! 사나이는 패기야!”
길드원들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그걸 들어주는 게 길드 마스터의 도리 아닐까?
게다가 박정하가 매의 눈으로 이 정수를 노리고 있는 걸 보자니 이걸 안 마시면 당장에 빼앗길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그럼...!”
결국, 나는 유리병 밀봉을 따고 정수를 단번에 들이켰다.
정수는 달달하고 청량감이 있었다.
가장 비슷한 걸 꼽자면 소화제 드링크 맛이라고 할까.
신기한 건 정수가 입에서 목을 거쳐 뱃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생생하게 느껴졌다는 거다.
나는 그 기묘한 감각에 집중하다가, 문뜩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앞이 안 보여!"
"꺄아아악! 어떡해!"
"길드 마스터!"
"형님! 저, 정말이야? 장난치지 말고!"
다들 사색이 되어서 내 쪽으로 달려왔다.
"아니... 앞이 안 보인다기 보다도..."
말하는 사이에 시야가 계속 바뀌고 있었다.
처음에는 새하얘져서 아무 것도 비치지 않던 시야가 점차 흐려지더니 다시 또렷한 세상을 담았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또렷해진 시야는 갑자기 둘로 나뉘었다.
듀얼 모니터로 세상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두 개는 네 개, 네 개는 곧 여덟 개로 늘어났다.
여덟 개의 동일한 세계가 내 눈앞에 비치는 것이다.
순식간에 여덟 배로 늘어난 정보량을 뇌에서 감당하지 못한 걸까.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