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화
미지의 스킬
이슬이 내린 새벽.
거미 한 마리가 알주머니를 멘 채로 거미줄을 짜고 있다.
거미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그리고 그 다음의 점으로 옮겨가며 자아낸 거미줄은 촘촘한 방사형 그물이 되어 간다.
마침내 거미집이 완성되자, 거미는 등에 매달아둔 알주머니를 톡톡 두들겼다.
알주머니에서 작은 거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거미줄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 부우웅
커다란 메뚜기 한 마리가 펄떡 뛰다가 거미줄에 걸렸다.
작은 거미는 물론이고 큰 거미에 비해서도 몇 배는 더 큰 녀석이라, 메뚜기는 몸을 세차게 뒤트는 것만으로 거미줄을 찢을 기세였다.
하지만 거미는 거미줄을 살짝 움직여 작은 거미들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메뚜기는 톱날 같은 주둥이를 딱딱거리며 위협했지만, 작은 거미들은 거미줄 사방에서 오가며 메뚜기를 물어뜯었다.
- 붕! 부우웅! 붕!
메뚜기가 발악하며 날개를 펄럭인 것도 잠시.
하나의 군체로 움직인 작은 거미 떼는 메뚜기를 빼곡하게 뒤덮어서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뜯어먹었다.
메뚜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자, 작은 거미들을 조종하던 큰 거미가 머리를 살짝 들었다.
그 여덟 개의 눈이 나를 향했다.
***
《망라(網羅) Lv.1》
〈근처에 있는 부하들과 연결하여 소통할 수 있다.〉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건 그 홀로그램 창이었다.
그 다음은 동그란 장비비의 얼굴.
그 너머로 낯선 천장이 보였다.
병원이구나.
“형님!”
장비비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쿵하고 박았다.
숨이 막혀서 죽을 뻔 했다.
“죽는 줄 알았잖아! 형님!”
“콜록, 지금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형님! 엄살 부리지 마!”
장비비는 정확히 명치를 노리고 머리를 꾹꾹 눌러댔다.
정말로... 숨이... 안 쉬어지는데...
다시 앞이 혼미해진다.
이렇게 가는구나. 모두들 안녕.
“비비야. 잠깐만. 길드 마스터가 힘들어하시잖아.”
송서영의 목소리였다.
장비비는 투덜거리면서 머리를 떼었다.
희미해지던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
겨우 살았다.
나는 마른기침을 하고서 장비비가 따라주는 물을 조금 마셨다.
그러고 보니 입 안이 엄청나게 말라 있었다.
“저기, 제가 며칠 동안이나 정신을 잃었던 거죠?”
“열흘이나 잠들어 계셨어요.”
송서영은 너스콜을 누르면서 말했다.
“의사는 신체에 이상은 없다고 하는데, 열흘이나 혼수상태에 빠져 있으니까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무슨 상태이상이 아닐까 해서 호랑 길드에도 가서 정령사랑 주술사에게도 부탁해봤는데 다들 별 이상이 없다고만 하고.”
“죄송합니다...”
“기자들에게 숨기는 것도 정말 힘들었어요. 겨우 길드가 바로 서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 길드 마스터가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뉴스를 내보낼 수 없잖아요.”
“고생 정말 많으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쩐지 사과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사과했다.
송서영은 내가 사과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흥하고 콧소리를 냈다.
“그러게 왜 그런 수상한 걸 드시고 그러셨어요? 감정해도 정체를 알 수가 없는 거였다면서요, 그 정수?”
“그렇죠.”
“왜 드셨어요?”
“술자리의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할까요...”
송서영은 푹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길드 마스터는! 아무! 잘못! 없습니다!”
“저도 잘못했어요. 그 때는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봐요.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박정하와 이연채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짝 몸을 일으켜서 고개를 돌려보니, 저쪽 벽에 박정하와 이연채가 이마를 박고 두 팔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웰시도 작달막한 다리를 걸쳐놓고 있었다. 길드원이라고 같이 벌을 서는 걸까.
아니, 웰시가 있다는 건 밤중이란 소리인데.
“지금 몇 시죠?”
“아홉 시에요.”
“아침은 아니죠?”
“저녁이에요.”
“그런데 왜 다들 퇴근 안 하고...”
송서영은 또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비비는 길드 마스터 병간호 하겠다고 병실에 내내 붙어 있었어요. 비비만 남겨놓기엔 불안하니까 저도 일 마치고서는 저녁마다 잠깐씩 들리고 있고요.”
“정하 씨랑 연채 씨는?”
“자기네들이 잘못해서 길드 마스터가 식물인간이 됐다고, 길드 마스터가 눈을 뜰 때까지 매일 병문안을 와서 벌을 서겠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어요. 물론 근무 일과를 마치고 나서요.”
“아이고... 일단은 두 분 다 손 내려요. 결국 마신 건 난데 두 분이 그렇게 자책할 거 없어요. 술자리 분위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지, 뭘. 웰시도 손 내려.”
송서영은 무어라 대꾸하려고 했지만, 마침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와서 말을 잇지는 못했다.
“유서준님! 눈을 뜨셨군요!”
젊은 의사는 눈을 번쩍 뜨며 내 손을 잡았다.
어째 태도가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아닌 듯한데.
“정말 다행입니다! 이대로 눈을 안 뜨시면 어떡하나 했거든요!”
“다행히 제가 눈을 떴네요.”
“하하! 그러게요! 저는 유서준zl존 길드의 길드 마스터가 이렇게 허망하게 가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요!”
의사는 쾌활한 태도로 내 몸에 연결된 장치들을 살피고, 내 눈에 빛도 비추어보고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추후 정밀 검사도 해봐야겠지만, 일단 현재 제 소견으로는 아무런 이상 없습니다. 그래도 열흘이나 정신을 잃고 계셨으니까 며칠 정도는 병실에서 더 쉬다 가세요.”
“알겠습니다.”
“저기... 사인 한 장만...”
의사는 검진보다도 오히려 이게 더 본론이라는 듯 사인펜을 내밀었다.
이런 건 처음 있는 일이라 좀 당황스러웠다.
“사인요? 제가요?”
“네! 제가 유서준zl존 길드 팬이거든요! 팬카페도 가입했습니다!”
“그런 게 있었어요? 아, 일단은 사인부터... 종이가...”
“여기 가운에 해주세요.”
의사는 흰 가운을 벗어서 내게 펼쳐주었다.
이래도 되나 싶지만, 해달라니까 해주었다.
의사는 희희낙락해서 가운을 도로 입고는 수다를 떨었다.
“사실 소원의 탑에서 그렇게 됐다는 소식 듣고 정말 일도 손에 안 잡히고 한동안 엄청 우울했었는데, 아라크네 토벌 뉴스 보고 엄청 기뻤거든요. 유서준zl존 길드가 부활하는구나 싶어서, 그런데 갑자기 또...”
“선생님. 다음 진료 가셔야 합니다. 급한 콜이라서요.”
“아, 그래요? 여하튼 유서준님. 그럼 앞으로도 응원하겠습니다. 저처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 꼭 알아주세요.”
의사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간호사와 함께 나갔다.
시끌벅적하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니 어쩐지 정리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송서영은 핸드백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시간도 늦었고, 길드 마스터도 이제 막 일어났으니까 편하게 쉬시는 게 낫겠죠. 저희는 내일 다시 올게요.”
박정하와 이연채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짐을 챙겼다.
그렇게 눈치 볼 필요 없는데 말이야.
다들 내게 인사하는 와중에, 장비비만 내 침대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송서영이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비비야. 너도 이제 그만 돌아가자. 길드 마스터도 혼자만의 시간이 좀 필요할 거야.”
“싫어!”
송서영은 곤란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로서도 딱히 장비비를 설득할 능력 같은 건 없는데.
“비비가 있고 싶다고 하면 그냥 있게 하죠.”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비비도 길드 마스터가 정수 마시는 걸 부추겼다고 들었는데...”
장비비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웃었다.
“술자리에서 그럴 수도 있죠. 결국 마신 건 제 판단이었고. 생각지 못한 사고가 있긴 했지만, 며칠 푹 잤다고 생각하면 해 될 일은 없었던 거잖아요?”
송서영은 세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길드 마스터는 길드원들한테 너무 무르세요. 저였다면 셋 다 벌을 줬을 거예요.”
“벌은 제가 자고 있던 열흘 동안 다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길드 마스터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또 뵐게요.”
송서영이 먼저 인사를 하고 나갔고, 박정하와 이연채도 차례대로 인사를 하고 나갔다.
웰시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들을 배웅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장비비는 길드원들이 다 나가고 나자 풀죽은 표정으로 내게 사과했다.
“형님... 미안해... 내가 괜한 말을 해서 형님이...”
“괜찮다니까. 오히려 정수를 마셔서 잘 된 것 같아.”
눈을 뜨자마자 보인 홀로그램창. 분명 망라(網羅)라고 했었지.
스킬창에도 그 글자가 떠 있었다.
《망라 Lv.1》
〈주위의 종속과 연결하여 소통할 수 있다.〉
일단은 내가 아는 【헌터헌터 타이쿤】에 있던 스킬도 아니고.
이것만 봐서는 무슨 스킬인지 도통 모르겠다. 소통이라니, 아마 전음이나 메시지 같은 스킬인 걸까.
한 번 써보면 알겠지.
나는 곧장 망라 스킬을 써보았다.
그러자, 시야가 두 개로 나뉘었다.
“응? 형님,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장비비가 중얼거렸다.
나도 그랬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오감과는 전혀 다른 감각인데, 일단 육감이라고 표현한다면 그 육감이라는 가느다란 실로 장비비와 연결된 느낌이었다.
그 순간, 장비비가 무언가를 승낙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두 개의 시야 중 한쪽이 바뀌었다.
하나는 그대로 나의 시야였고.
바뀐 하나는, 장비비의 시야였다.
장비비가 보는 세계가 내게 비치고 있었다.
내 눈으로 나를 보는 건 조금 이상하고 낯설었다.
본래 서로 다른 시야가 동시에 비친다면 이 정도 위화감을 느끼는 걸로 끝나지는 않았겠지.
이렇게 다른 이의 시야를 무리 없이 공유할 수 있는 게 망라 스킬의 효과가 아닐까.
‘그런데, 비비야. 너한테도 세계가 둘로 나뉘어 보여?’
“아니?”
장비비에게는 시야가 그대로인 모양이다.
내가 장비비의 시야를 공유할 수는 있지만, 반대로 장비비가 내 시야를 공유할 수는 없는 건가.
‘잠깐. 내가 방금 말로 했던가?’
“응! 아, 아닌가?”
‘아닐걸.’
“뭐야! 귀신인가!”
장비비는 기겁하며 내 입술을 잡아당겼다.
유령견인 웰시는 혼란에 빠져서 알! 하고 짖었다.
‘비비야. 일단 아프니까 좀 놔줄래.’
“아. 응.”
나는 살짝 부어오른 입술을 매만지며 다시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자 장비비는 내 생각에 따라서 자기 왼쪽 팔을 들었다가, 오른쪽 팔을 들었다가 했다.
‘내 생각은 바로바로 비비에게 전해지지만, 반대로 비비의 생각은 내게 전해지지 않네. 이건 시야와 마찬가지로 일방향인 것 같아. 스킬 레벨이 올라가면 쌍방향 연결로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재밌다!”
‘재밌어?’
“응! 이런 스킬은 처음 보는걸!”
‘나도 그렇긴 해. 일단은 실험을 좀 해보고 싶은데. 도와줄래?’
“당연하지!”
나는 장비비의 도움을 받아 이런저런 실험을 해보았다.
일단 마력 소모는 연결 시간에 비례했다.
내 마력 최대량을 한계까지 소모하니 십오 분 동안 연결을 지속할 수 있었다.
‘전투 한 두 번, 많아도 세 번 정도면 끝날 정도네. 독려 스킬을 쓸 마력까지 생각하면 지속 시간은 더 짧아질 거고.’
“형님은 허접이니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히히. 난 허접인 형님이라도 좋아해!”
‘그것 참 고맙네.’
연결 가능한 범위는 내가 있는 병실 전체였다.
다만 장비비가 복도 밖으로 나가면 저절로 연결이 끊겼다.
‘시야에서...’
아차. 마력을 다 썼지.
“시야에서 벗어나면 연결이 끊기는 것 같아.”
“멀어져서 그런 게 아니고?”
“네가 문지방 앞에 있을 때는 연결이 유지되는데, 복도로 붙으면 연결이 끊기거든.”
“으흥. 신기하네.”
일단 실험은 여기까지 해두기로 했다.
내일 마력이 회복되면 또 해봐야겠다.
밀린 소설이라도 보려고 핸드폰을 켜니, 장비비가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참. 형님!”
“왜?”
“형님이 자는 사이에 백호랑이 형님을 찾아왔었어!”
“무슨 일로?”
“박정하 파견 관해서 할 말이 있었다는데. 서영이가 형님은 지금 바쁘다고 해서 돌려보냈었어.”
박정하가 호랑 길드에 파견 가서 무슨 일이 있었나?
오늘 병실에서 볼 때는 괜찮았는데. 사고는 아닌 것 같고. 별 말이 없었으니 사건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궁금하지만 백호랑 번호가 없으니 당장 연락할 수도 없고.
이번에 한 번 만나러 가면, 번호를 좀 물어봐야겠다.
"아니지. 서영 씨한테 물어볼까?"
"뭘?"
"백호랑 씨 번호."
"으음... 서영이가 별로 안 좋아할 거 같은데..."
장비비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긴. 송서영은 백호랑과 사이가 안 좋았지.
나는 검진만 끝내고 직접 백호랑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2시 전에 한 편 더를 목표로 열심히 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