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화
그녀가 스카우트 하는 이유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다음날 정밀검진에서도 별 이상 없다는 소견이 나왔다.
의사는 그래도 며칠 간 더 쉬다가라고 했지만 나는 이만 퇴원하기로 했다.
밀린 일도 많고, 당장 백호랑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기도 했으니.
“그런데 백호랑은 어떻게 만나지?”
내 질문에, 장비비는 장팔사모를 어깨에 걸친 채로 으쓱했다.
“길드 빌딩에 가면 있지 않을까?”
“일리 있는 말이야.”
그래서 도착한 길드 빌딩.
포효하는 호랑이 머리가 입구에 걸려 있었다. 진짜는 아니겠지?
“형님! 봐봐! 내 빌딩인데! 멋대로 저런 걸 걸어놨어!”
장비비는 길드 빌딩이 바뀐 모습에 분개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네 빌딩이 아니라 내 빌딩이란다.
어쨌든, 우리가 길드 빌딩 안으로 들어가자 로비 안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전부 이쪽으로 쏠렸다.
유명인이라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우리가 소란을 피울까 봐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안내데스크에 있던 여직원은 직접 나와서 친절하게 용건을 물어봐주었다.
“유서준님. 그리고 장비비님. 호랑 길드 빌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혹시 무슨 일로 방문해주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백호랑 길드 마스터를 좀 만나고 싶은데요. 약속을 따로 잡은 건 아닙니다만...”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길드 마스터께 일정을 여쭌 후에 다시 안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행히 백호랑은 길드 빌딩에 있었고, 우리를 만나주었다.
97층의 『집무실』
운동장보다 몇 배나 넓은 한 층 전체가 길드 마스터의 집무실이었다.
77층에 사무실과 함께 있는 대표실과는 별개로, 설치하는 것만으로 소속 사무원들의 업무능률을 200% 향상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왜 길드 마스터의 집무실이 사무원의 업무능률을 향상시키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어쨌건, 이 집무실도 새로운 주인인 백호랑이 자기 취향대로 꾸며놓았다.
빨간색 호랑이, 주황색 호랑이, 노란색 호랑이, 초록색 호랑이... 하여튼 무지개색 호랑이 조형물이 집무실 여기저기에 놓여있었는데, 다들 당장이라도 뛰어들 듯한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 꽤나 박력감이 있었다.
“호랑이는 참 멋있는 동물이에요!”
창문을 보고 서 있던 백호랑이 말했다.
분위기를 잡는 것 같아서 '그렇군요' 하고 무난하게 대답하려는데, 갑자기 장비비가 끼어들었다.
“사자가 더 멋있어!”
그 말에 백호랑은 등을 돌려 우리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미간에는 힘줄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사자보다 호랑이가 체격도 크고 힘도 더 세답니다!”
“사자는 갈기도 있어!”
“호랑이는 이마에 왕(王)자도 있어요!”
“그래 봤자 사자한테 한 대 맞으면 죽어!”
“호랑이는 사자를 찢어요!”
둘이 애도 아닌데 뭘 그런 걸로 싸우는지.
“사자도, 호랑이도 멋집니다. 일단은 그렇게 정리하죠.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내 말에 백호랑과 장비비 모두 콧김을 뿜으면서 물러났다.
백호랑은 분을 삭이면서도 일단은 나와 장비비를 앉혔다.
노집사가 슬그머니 나타나서 차와 다과를 내왔다.
장비비는 눈을 빛내더니 두 손으로 과자를 집어서 와구와구 먹어댔다.
백호랑은 우리가 차를 마시는 걸 바라보면서 다리를 꼬고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이렇게 찾아온 거죠?”
“백호랑 씨가 절 찾아왔다고 해서요.”
“아. 그랬었죠.”
본격적인 용건을 꺼내기 전에, 나는 핸드폰을 먼저 꺼냈다.
“그런데 백호랑 씨 번호를 모르니까 좀 번거롭더라구요. 무슨 일 있을 때마다 이렇게 직접 찾아오기도 뭐한데, 번호 좀 알려주실래요?”
“오호홋! 용기 있군요! 하지만 무모해요! 당신이 내 번호를 따기에는 아직 호감도가 한참 부족하거든요!”
아니. 번호 아는데 호감도까지 필요해?
이 세계는 참 불합리하다.
“하지만 같은 길드 마스터끼리 정보를 교환할 일도 왕왕 있겠죠! 그러니 특별히 내 번호를 알려주도록 하겠어요!”
백호랑은 번호를 알려주었다.
나는 번호를 저장해두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왜 저를 찾으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제 길드원인 박정하 헌터와 관련된 일이라고는 들었는데.”
“간단해요. 내가 박정하 헌터를 스카우트하고 싶어서 말이에요!”
길드 마스터에게 길드원을 스카우트 하겠다는 발언을 이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마 백호랑 밖에 없지 않을까.
그건 굉장히 뻔뻔한 발언이지만, 사실 【헌터헌터 타이쿤】에서도 백호랑은 툭하면 내 길드원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날리곤 했다. 그래서 그다지 화가 나거나 하진 않았다.
그 대신, 좀 궁금했다.
“박정하 헌터가 E급 전사인 건 아시죠?”
“물론이에요!”
“그런데 스카우트 하고 싶다고요?”
“맞아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내 길드원이라서 스카우트 하려는 건 아니죠?”
“맞는데요!”
나는 노집사를 바라보았다.
노집사는 주인 대신 사과한다는 듯 살짝 눈인사를 했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내 길드원이라서 스카우트 한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저는 당신의 안목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요! 그런 당신이 길드원으로 영입한 헌터라면, 지금은 등급이 낮더라도 언젠가는 대단한 헌터가 되겠죠!”
“…….”
말문이 막힌 내게, 백호랑은 상당한 금액이 적힌 제안서를 내밀었다.
“이적료로 이 정도는 지불할 생각이 있답니다!”
“이 정도면 B급 헌터도 영입할 수 있을 텐데요.”
“그만큼 당신의 안목을 신뢰한다는 거죠!”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다른 이유야 어쨌든 이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박정하 본인이 이적을 원하지 않을 거란 거죠.”
그는 중견 길드에서 영입 제안을 받았음에도 우리 길드의 부활과 미래를 믿고 길드원이 되었다.
그런 그가 호랑 길드로 갈아타리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내 말을 들은 백호랑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렇다면 스카우트는 힘들겠군요!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 길드원한테 스카우트 제안을 보냈다가 실패한 게 한두 번이 아니시니까 말이죠.”
“그래요!”
반쯤 빈정거린 건데, 백호랑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쳤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왜 이리 내 길드에 관심이 많은 겁니까?”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백호랑은 본인이 열 배는 더 어이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이 세상에 S급 이상 되는 헌터가 몇 명 정도 있죠?”
“천 명 정도 되던가요.”
“그럼 유서준zl존 길드의 길드원들은요?”
“999명이었죠.”
백호랑은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 길드원들은 거의 다 S급, 또는 그 이상이었죠! 그럼 남는 S급 헌터는 몇 명이죠?”
“남는다는 게 무슨...”
“당신 길드가 아닌, S급 헌터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느낌이 확 다르긴 하네.
이 세계에서 뛰어난 헌터들은 죄다 내가 뽑아 가버린 건가.
그야 백호랑이 내 길드로 스카우트 제안을 계속 날릴 만도 하다.
백호랑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 유서준zl존 길드의 몰락은 내게는 기회이면서도 위기이기도 해요. 내게는 당신이 가졌던 것처럼 강력한 헌터들이 없거든요. 그만큼 더 많은 헌터들을 영입해서 대응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한계가 있죠.”
그래서였나. 백호랑이 수문장으로 조종당하던 장비비 앞에서 쩔쩔매던 게.
동물원 게이트가 하마터면 대형 인명사고로 번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지도.
세계에서 강한 순서대로 1위에서 999위까지가 한 번에 전부 사라져버린 거다.
헌터 전력과 위기 대응능력이 급감한 게 당연하다.
내 길드의 공백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파급력이 컸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소원의 탑에 있는 길드원들을 구한다고 해도, 그게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닌데.
상념과 고민이 깊어져만 갔다.
백호랑은 내 무릎을 찰싹하고 때렸다.
“유서준, 당신!”
“네? 네!”
“그러니까! 어서 당신의 길드를 다시 세우도록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호랑 길드가 유서준zl존 길드를 완전히 대체해버릴 지도 모르니까!”
호기로운 말투였지만 그녀 나름대로 나를 격려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라이벌에게 건투를 빌어주는 거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그 때까지 잠시만 호랑 길드에 세계평화의 책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말아요! 그리고 괜찮은 인재가 있으면 좀 넘겨주시고요!”
“그건 안 되겠는데요.”
“칫! 혹시나 해서 말해봤어요!”
백호랑은 노집사에게 손짓해서 장비비가 좋아하는 다과를 싸달라고 한 후에, 축객령을 내렸다.
그녀는 우리가 나가기 전에 박정하의 파견처를 알려주었다.
“한 번쯤은 길드원이 어떻게 일하는지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라고 말하면서.
***
경기도 광명시 가학산 밑자락의 동굴.
황금광산으로 개발되었다가 관광자원으로 바뀐 동굴은, 지금은 지네와 박쥐 형태의 몬스터가 출몰하는 던전으로 바뀌어 있었다.
백호랑이 미리 연락을 해두었는지, 박정하는 동굴 앞의 베이스캠프에 나와 있었다.
“길드 마스터! 여기서 뵈니! 더! 반갑습니다!”
“나도 반갑네요. 아, 그 쪽 분들이...”
박정하 옆으로 세 명의 헌터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차례대로 인사했는데, 모두 호랑 길드 소속 헌터들이었다.
"갑작스레 참관을 부탁드리게 됐는데,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 유서준 길드 마스터님과 장비비 헌터님께 잘 부탁드려야죠. 나중에 사인 한 번씩만..."
"예, 예. 그러시죠."
다들 소탈한 성격이라서 소개를 마친 후에는 곧장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네 명의 헌터에 더해 장비비까지 있으니 명백한 과잉 전력이다.
이런 좋은 실전 연습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나는 이 기회에 박정하와 다른 헌터들에게도 망라 스킬을 쓸 수 있는지 시험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