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화
미로탈출 넘버원
짐꾼은 헌터의 장비와 소모품을 대신 짊어져주는 이들이다.
파티에 짐꾼 하나만 끼워 넣어도 챙겨갈 수 있는 물품의 종류와 무게가 확 늘어나지.
그리고 다양한 물품들을 챙겨갈수록 사용 가능한 전략의 폭이 넓어진다.
가령 갑자기 물리피해 면역 특성을 가진 골렘이 나타나거나, 지속출혈 상태이상을 일으키는 독사가 튀어나왔을 때, 제일 먼저 의지하게 되는 건 이것저것 준비해온 짐꾼의 배낭 안인 것이다.
이렇듯 짐꾼은 수수하지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소중한 길드원이다.
셀파는 그 짐꾼들 중에서도 초창기 멤버로 내가 아껴왔던 녀석이고.
왜 셀파의 배낭이 횃불아귀의 뱃속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급히 배낭을 끄집어냈다.
배낭은 횃불아귀의 소화액으로 뒤덮여서 끈적끈적했다.
“형님... 셀파는... 죽은 거지?”
장비비가 훌쩍거리면서 물었다.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한숨을 삼켰다.
[포만감 : 17]
그 사이에도 포만감은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일단 배낭 안을 뒤져보기로 했다.
뭔가 먹을 게 있을지도 모르고, 셀파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추측할만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배낭 안은 배낭 밖과는 별개의 분리된 세계처럼 보였다.
그 안은 우주처럼 새까맣고, 자질구레한 아이템들이 소형화된 모습으로 어지럽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원근감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괴상한 공간이었다.
그 중에서 엄지만한 야채인간이 눈에 띄었다.
눈 감은 채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둥둥 떠다니는 녀석은...
머리는 멜론, 몸통은 수박, 팔다리는 대파와 아스파라거스 다발, 눈은 방울토마토로 되어 있고, 코는 아기당근으로, 입은 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셀파는 밭에서 나는 밭요정이었다.
“셀파?”
“누구... 앗! 나으리! 나으리시죠?”
나를 발견한 셀파는 두 팔을 들어서 허우적거렸다.
“얼굴은 처음 보지만,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요! 나으리가 분명하세요! 나으리! 저 좀 꺼내주세요!”
“아니. 짐꾼이 어쩌다가 배낭 안에 들어간 거야?”
“살려면 별 수 있습니까요? 이 아귀 놈한테 먹히느니 배낭 안으로 숨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냅다 숨었습지요. 어쨌든 나으리가 구해주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셀파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서 배낭 밖으로 꺼냈다.
처음에는 엄지만 하던 셀파는 배낭 입구로 가까워질수록 점점 커졌다.
- 뽕!
하고 배낭 밖으로 끌려나온 뒤에도 몸이 점점 커져서, 마지막으로는 키가 일 미터 남짓할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들에 비하면 한참 작기는 했지만.
요정들은 원래 좀 작다.
“휴우. 겨우 살았군요.”
셀파는 땀을 훔치는 척을 했다.
몸이 야채로 된 밭요정이 땀이 날 리가 없지만, 어쨌거나 시늉은 그럴싸했다.
그를 처음 보는 박정하와 이연채는 무척 신기하다는 눈치였고, 웰시는 놀라서 알알 짖어댔다.
물론, 같은 길드원인 장비비는 셀파를 와락 껴안았다.
“어떻게 된 거야? 배낭만 보고 죽은 줄 알았잖아!”
“아가씨. 이 셀파가 고작 횃불아귀 따위한테 죽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는 일개 짐꾼이라고는 해도 위대한 유서준zl존 길드의 일원인데 말입니다요.”
“죽을 뻔한 거 아니었어?”
“죽을 뻔하기는 했지요.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배낭에 저를 보관해서 위기를 넘겼습니다요. 그렇지만 언제 나으리가 오셔서 꺼내주실지 기약 없이 기다리느라... 에잇, 이 나쁜 아귀 녀석.”
셀파는 아스파라거스 다발로 이루어진 다리로 횃불아귀의 몸통을 발로 찼다.
그는 잠시 그러고 있더니 갑자기 배낭을 들어, 횃불아귀의 밑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배낭보다 수십 배는 더 큰 횃불아귀의 몸통이 배낭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셀파는 배낭을 짊어지고 내게 와서 말했다.
“나으리. 이 미로에는 오래 있으면 안 됩니다. 오래 있으면 탐식욕에 미쳐서 아귀가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입지요.”
“맞아. 다들, 일단은 출구로 나갑시다.”
우리는 서둘러 출구로 빠져나갔다.
출구 밖은 여전히 돌 벽돌로 된 복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복도 가장가리에 촛불이 켜져 있어서, 어둠에 쌓인 미로와 명확히 구분되었다.
눈앞에 떠오른 홀로그램 창과 아이템도 우리가 무사히 미로를 탈출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었다.
【호롱불아귀의 미로 탈출!】
[설명 : 당신은 어두컴컴한 호롱불아귀의 미로를 탈출하고, 층지기인 횃불아귀를 퇴치하여 소원의 탑 1층을 정복하였습니다.]
[보상 :
1. 코인 + 1,500
2. 명성 + 30
3. 호롱불아귀의 미로 지도
4. 아귀아귀 치료제]
늙은 왕 마이트라스가 내린 시련이나, 횃불아귀의 토벌 전리품과는 별개로 소원의 탑 자체에서 내린 보상인 것 같다.
누가 주든 보상이란 건 기분 좋다.
“미로 지도라니...”
하지만 벽면에 열심히 분필을 긋고 다닌 이연채는 허탈하다는 듯 말했다.
원래는 그 분필 자국을 보고 돌아갈 길을 찾으려고 했었지.
헛수고를 시킨 건 미안하게 됐지만 이런 아이템이 뜬다는 보장도 없었으니까.
뭐든 준비하지 않고 후회하기보다는 준비하고 후회하는 게 나은 법이다.
"그건 그래요. 잘 된 일이죠, 뭐."
이연채는 분필을 휙 던지고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는 일단 복도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셀파는 배낭 안에 갇힌 동안 어지간히 심심했는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계속 풀어냈다.
“저는 다른 길드원 분들을 따라서 올라가다가, 투쟁의 층에서 내려왔습니다요. 거기서는 길드원들끼리 서로 싸워야했는데, 아시다시피 밭요정은 투쟁이랑은 거리가 많이 먼지라... 아, 도망친 건 아닙니다. 나으리. 부관이신 티아라 공주님께서 짐꾼들은 모두 내려가라고 하셨지요.”
티아라는 짐꾼을 호위할 전력도 얼마간 붙여줬지만, 소원의 탑을 내려다가다 전이계 함정을 만나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셀파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낭 안에 있는 아이템을 하나둘씩 써야 했다고.
하긴. 소원의 탑을 정복하기 위해 준비한 아이템을 썼다면, 별다른 전투 능력이 없는 셀파라도 강한 몬스터를 물리칠 수 있었겠지.
“그렇게 1층까지는 내려왔는데, 쓸 만한 아이템이 다 떨어져서 횃불아귀에게 잡아먹힐 뻔 했습니다요. 먹힐 바에는 차라리 배낭 안으로 숨자, 해서... 죄, 죄송합니다! 나으리! 함부로 위대한 유서준zl존 길드의 아이템을 사용하다니!”
셀파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넙죽 엎드려서 멜론으로 된 머리를 바닥에 쿵쿵 박았다.
그러다가 멜론이 터지면 어떻게 하려고.
나는 얼른 셀파의 머리를 잡았다.
“나, 나으리?”
“아이템이야 다시 사든지 얻든지 하면 그만이지.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셀파.”
“나으리이이이!”
셀파는 내게 엉겨 붙어서 눈물을 찔찔 짰다.
몸이 야채로 된 밭요정에게 눈물샘이 있을 리가 없으니, 시늉이었지만.
어쩐지 녹즙 냄새가 강하게 나는 것 같지만 아마도 착각일 거다.
여하튼 셀파가 간추린 이야기를 대략 들었을 무렵, 복도 끝에 돌층계가 보였다.
저 위쪽까지는 촛불이 켜져 있지 않아서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저 위에 2층이 있을 거라는 점은 당연히 추측할 수 있었다.
“비비야. 2층도 탐식욕의 층이라고 했지?”
“응. 많이 위험하진 않지만, 1층보다는 좀 더 어려울 거야.”
여기서 이어서 2층에 도전할지, 아니면 물러날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크게 다친 이는 없지만 다들 지치기도 했고, 뭣보다도 셀파를 안전한 곳에서 쉬게 해주어야 할 테니까.
“나으리! 저를 위해서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요!”
“셀파 때문만은 아니야. 무기도 재정비해야 하고 마력도 슬슬 떨어져가는 참이니까.”
특히, 횃불아귀의 꼬리에 직격 당한 박정하의 방패는 금이 많이 가서 계속 쓰기는 어려울 거다.
대장장이 금철두에게 맡겨서 수선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걸 하나 사든지 해야겠지.
다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표현은 안 했지만, 어둡고 칙칙한 곳에서 배를 주리며 싸우다보니 피곤했던 모양이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갑시다.”
“네!”
우리는 발을 돌려, 왔던 복도 길을 다시 돌아갔다.
미로의 출구는 미로의 입구이기도 했다.
나올 때는 빛을 향해 나왔지만, 들어갈 때는 어둠을 향해 들어가야 하는구나.
우리는 셀파의 배낭 안에서 먹을 것을 꺼내서 나누어 먹고, 미로의 출구 안에 발을 들였다.
[포만감 : 22]
꽤 배를 채웠다고 생각했는데...
고열량 식품도 불가사리가 채워주는 포만감에 비하면 효율이 너무 안 좋았다.
어쩔 수 없이 미로 안에서 또 불가사리를 찾아야하나 했지만, 호롱불아귀의 미로 지도에서 알려준 지름길은 정말 간편했다.
우리는 미로에 들어가서 오 분도 되지 않아서 미로를 빠져나왔다.
"미로를 오가는 길을 좀 걱정했었는데, 미로 지도가 있으니까 오히려 복도보다도 더 빨리 지나갈 수 있는 것 같네요."
"맞아요. 길마. 달려서 지나가면 더 빨리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중에 호롱불아귀의 촉수가 괜찮은 벌이가 되면, 미로 안을 돌아다니면서 호롱불아귀를 토벌하고 나와도 되겠다.
나는 몇 가지 계획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두었다.
미로를 빠져나와, 늙은 왕 마이트라스가 시련에 관해 말해준 공터를 지나, 정문 앞에 서니 저절로 도개교가 내려왔다.
- 빵빵. 빵.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클락션 소리가 이렇게 정겨울 줄이야.
높은 건물들이 즐비한 서울의 풍경을 보니, 어쩐지 어쩐지 안도감이 들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우...”
내 길드를 통째로 잡아먹은 소원의 탑, 그 1층이라도 도전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크게 다치는 사람 없이, 셀파까지 구해내 왔지.
호롱불아귀와 횃불 아귀에게서 얻은 전리품에 미로를 탈출한 보상은 덤이다.
이 정도면 이번의 탐사는 꽤나 만족스러웠다고 생각한다.
잠깐 감상에 빠져 있는 내게, 장비비가 언제나처럼 머리를 문질러왔다.
“으아아... 배고파! 형님, 고기 먹자! 고기! 고기! 고기!”
"그럴까? 그 전에 셀파는 길드 아지트에 데려다 주고 가야겠는데. 셀파는 좀 쉬어야 할 거 아니야."
"나으리. 길드 빌딩이라면 눈 감고도 찾아갑지요."
"아니. 실은 길드 빌딩이 팔렸거든. 지금 우리 아지트는 다른 곳이야."
셀파는 가지로 된 입을 쩍하고 벌렸다.
"영광스러운 유서준zl존 길드 빌딩이... 이것이 비정한 현실이라는 겁니까요?"
장비비가 장팔사모 창대로 셀파의 수박 몸을 쿡하고 찔렀다.
"야! 형님이 있는 곳이 곧 길드야! 길드 빌딩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그건...! 그렇군요! 나으리가 계신 곳이 곧 길드, 다시 말해 나으리가 곧 길드!"
셀파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서 내게 절을 올렸다.
따라하기를 좋아하는 웰시도 옆에 나란히 엎드려서 절을 하고.
박정하와 이연채는 킬킬 웃더니 손을 비비면서 다가와서 내 어깨를 양옆에서 주물렀다.
장비비는 그래야 내 형님이지, 하면서 콧김을 뿜어내고.
엉뚱하게 개판이구먼.
그래도 이렇게 떠들썩해지는 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