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화
화원과 화단의 인형튤립
일명, 인형튤립 양산 계획.
마력 포션의 재료로 쓰이는 인형튤립을 잔뜩 양산해서 길드 살림살이에 보탠다는 계획이다.
간단하지만 쉽진 않겠지.
그래도 내 계획을 들은 셀파는 적극 찬성했다.
“아주 명안이십니다요! 이 셀파에게 맡겨만 주신다면 책임지고 길드 산업의 혁명적인 역군이 되겠습니다요.”
“자신 있는 거야?”
“물론입죠. 제가 밭요정 아닙니까요.”
사실 초기 비용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셀파가 저렇게 자신 있어 하니까 한 번 맡겨보자.
나는 장비비와 셀파를 데리고 빈 방 앞에 가서 섰다.
길드 아지트로 빌린 5층의 다섯 개 방 중 네 개는 사무실, 샤워실, 수면실, 훈련실로 사용 중이지.
마지막 남은 한 개의 빈방에는 대장간이나 연구소를 세울까 했는데, 인형튤립 양산 계획을 위해 화원으로 써야겠다.
『화원(花園)』
「비용 : 500 코인」
「설명 : 화훼류를 기를 수 있는 꽃동산입니다.」
「효과 :
1. 화원에 심은 화훼류의 성장 속도와 효능이 적당히 증가합니다.
2. 길드원의 만족도가 약간 증가합니다.」
화원은 사무실이나 훈련실 같은 필수 시설은 아닌데다가, 한 번 설치해두면 꾸준히 수익을 발생시키는 전형적인 수익형 시설이라서 초기 비용은 좀 나가는 편이다.
하지만 인형튤립 양산 계획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투자비용은 금세 회수할 수 있을 거다.
나는 곧장 화원을 건설했다.
밝은 빛이 번쩍이더니, 빈 방이 곧 화원으로 바뀌었다.
화원은 온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길쭉한 화분이 벽면을 따라 늘어서 있고, 중앙에는 작은 분수가 있었다.
아직 뭘 심은 게 없고 화분마다 텅텅 비어 있어 별 볼품이 없어 보이기는 했다.
“바로 심어보자!”
장비비는 내 팔을 잡고 흔들었다.
얜 뭐든 바로바로 해야 성미가 풀린다니까.
뭐, 오래 끌 이유가 없기도 하지.
“셀파.”
“예. 나으리.”
셀파는 인형튤립 구근을 조심스레 빈 화분에 묻었다.
《종족 특성 : 밭요정》
〈작물을 노련하게 기르고 효율적으로 관리합니다.〉
[화원의 효과가 밭요정의 종족 특성으로 인해 강화됩니다.]
[화원에 심은 화훼류의 성장 속도와 효능이 굉장히 증가합니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셀파가 이상한 노래를 부르자, 투명한 비눗방울 같은 것들이 셀파와 화분 주위를 맴돌았다.
그 비눗방울들은 허공을 떠돌다가 하나둘씩 톡톡 터지며 화분 위로 반짝이는 별빛가루를 내뿜었다.
“오오...”
신기한 광경이었지만, 놀라운 건 그 다음의 일이었다.
관엽식물처럼 두꺼운 잎의 새싹이 흙 위로 빼꼼 머리를 내민 것이다.
“벌써 자랐어!”
장비비는 그 새싹을 와락 움켜쥐었다.
셀파는 조마조마해서 장비비를 말렸다.
“아이코. 아가씨. 그렇게 손으로 세게 쥐시면 인형튤립이 죽습니다요.”
“빨리 크라고 당겨주는 거야.”
셀파는 자기로서는 장비비를 못 말리겠다 싶었는지, 내 쪽을 향해 방울토마토 눈망울을 글썽였다.
결국 내가 한 마디 하자, 장비비는 투덜거리면서도 새싹을 놓아주었다.
셀파는 안심해서 한숨을 내쉬곤 계속해서 이상한 노래를 불렀다.
그에 따라 투명한 비눗방울이 계속 생겨났다가 터지면서 별빛가루를 내뿜기를 반복했고, 잔뜩 별빛가루를 받은 인형튤립은 쑥쑥 자라났다.
“얄라리 얄라... 헤엑... 헤엑...”
똑같은 노래를 열 번 정도 부른 셀파는 기진맥진해서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인형튤립은 만개한 튤립꽃잎을 자랑하고 있었다.
장비비는 시시덕거리며 튤립꽃잎 안을 파헤쳐, 그 안에 들어있는 꽃인형을 꺼냈다.
“형님, 봐! 정말 인형처럼 생겼어!”
“그러게. 귀여운 인형이네. 셀파, 수고 많았어.”
“아닙니다요... 이 정도쯤이야... 헥...”
셀파는 별 거 아니라고 했지만, 활력 수치가 뚝 떨어져 있는 걸 보니 인형튤립을 단번에 성장시키는 건 밭요정인 그로서도 상당히 힘든 일임이 분명했다.
활력 수치 관리는 일정을 진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착취한답시고 활력이 뚝뚝 떨어져도 무시하고 계속 일을 시키면, 길드원의 만족도와 관계도가 수직 낙하하는 건 물론이고 몸져눕거나 심지어는 길드에서 탈퇴하는 수가 있다.
활력을 소모하면서 착취하는 건 소탐대실의 전형이지.
그런 걸 다 떠나서 내 길드원으로 게임에서부터 아껴온 셀파를 그렇게 학대하듯 착취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셈한다면, 이걸 하루에 몇 번씩이나 하는 건 불가능하겠고.
셀파의 하루치 활력을 모으면 하루 한 번 정도할 수 있는 비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하지만 하루 한 번이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니다.
인형튤립이 만개하면 나오는 꽃인형 하나에서 인형튤립 구근 두 개를 수확할 수 있으니까...
꽃인형을 1 코인에 판다고 치고 계산하면, 열흘 만에 화원을 지은 원금이 회수되는 거다.
아니. 그렇게나 인형튤립을 심기엔 화원 안에 자리가 모자라겠구나. 화원 시스템상 한 번에 심을 수 있는 꽃의 개수가 정해져 있을 테니까.
셀파도 매일 화원에만 붙어 있을 수는 없을 거고.
그래도 상당한 코인 벌이가 될 건 분명해 보인다.
이런 게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다고 하는 거겠지!
그런데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은 호박대로 챙기고.
밖에도 호박을 심을 수 있으면 더 좋은 게 아닐까.
***
자정이 넘은 시간.
장비비와 셀파는 이미 잠에 들었다.
나는 가벼운 옷만 걸치고 제삿술 한 병과 뼈다귀 모양의 개껌을 들었다.
5층에서부터 건물을 쭉 내려가서, 빈 화단 앞에 간이의자를 가져다놓고 앉았다.
웰시는 개껌에서 통 하고 뛰어나와서 이리저리 뛰놀며 몸을 풀었다.
밤이라고 완전히 제 세상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옆에서 서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지상에서 살짝 발을 띄운 채 붕붕 떠다니는 노인.
네크로맨서의 도를 추구한다고 스스로 사령(死靈)이 된 이상한 노인네, 강시철이었다.
나는 그에게 눈인사를 하고 물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왜 요새는 안 나오셨어요?”
“네크로맨서의 도를 연구하느라 바빴지. 그리고, 기자들이 너무 많아져서 말이야. 자네도 알지 모르겠지만 원래 귀신과 기자는 상극이라네.”
“아... 그건 죄송하게 됐습니다.”
“죄송할 거야 있나. 자네 잘못도 아닌데. 그래. 자네 길드원이었다던 수문장은 어떻게 됐나?”
거기에서부터 이야기가 끊겼었구나.
나는 이러쿵저러쿵 얘기해주었다.
그에게는 소원의 탑 안에서 영체와 실체를 잇는 물체를 가져와달라는 의뢰를 받은 만큼, 그에게 알려야할 사건들도 많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어주고는 빙그레 웃었다.
“잠깐 안 만난 사이에 훌쩍 거물이 되었구먼.”
“제가 거물이 되었다기보다는 길드가 조금 큰 거죠. 그걸 제가 다 한 것도 아니고요.”
“세상만사 다 그렇듯 구심점이 중요한 걸세. 자네 길드의 구심점은 자네니, 길드가 잘 되어가고 있다면 자네가 잘 하고 있는 거지.”
그런 말을 들으면 멋쩍으면서도 기분은 좋다.
나는 가져왔던 제삿술을 들어보였다.
“오늘은 달 대신 술, 어떠십니까.”
“젯술이라니 신경을 써줬구먼. 고마우이.”
강시철은 고마워하며 술을 받았다.
물론 영체인 그가 직접 술을 마실 수는 없어서, 빈 화단에 조금씩 제삿술을 뿌려주었다.
“크. 간만에 마시니 몸에 스며드네 그려. 이 좋은 술을 그냥 받을 순 없지. 뭔가 바라는 게 있을 터, 속 시원하게 말해보게.”
“바란다기보다도...”
“세상에 어느 젊은이가 늙은이에게 사심 없이 술을 올린단 말인가? 부탁이 있으니까 그랬겠지.”
내가 얼굴을 붉히자 강시철은 껄껄 웃었다.
짖궂은 노인네 같으니.
나는 꽃인형에서 채취한 인형튤립 구근 하나를 꺼냈다.
하나는 화원에 심어두었고, 나머지 하나를 이렇게 가져온 것이다.
“인형튤립 구근이군. 그것도 꽤 상품(上品)인데. 이걸 왜 가져온 건가?”
“여기 화단에 심으려고 합니다.”
물론 강시철과 웰시의 유해가 묻혀있는 화단에 그대로 심겠다는 건 아니다.
이 빈 화단 앞에 따로 화분을 놓겠다는 거지.
“기자들이 오가면서 화단을 밟기도 하던데, 화분으로 빙 둘러놓으면 여기 화단 안으로는 안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나야 그렇게 해주면 고맙네만... 그게 부탁이라고? 왜 화원에 심지 않고?”
“화원에 심은 것과 화원 밖에 심은 것을 비교해보려고요.”
화원에 심고 셀파의 노래를 들려준 것.
화원에 심고 셀파의 노래를 들려주지 않은 것.
화원 밖에 심고 셀파의 노래를 들려준 것.
화원 밖에 심고 셀파의 노래를 들려주지 않은 것.
이렇게 비교군을 만들어서 성장속도와 효능을 비교해볼 생각이다.
그러면 좀 더 효율적으로 인형튤립을 경작할 방안이 나올 수도 있겠지.
그렇지 않더라도, 화원 밖에서 안정적인 인형튤립의 경작이 가능한지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다.
“그런데 그걸 굳이 이 화단 앞에 한다는 건... 인형튤립을 내가 지켜줬으면 하는 거겠군?”
“그러시면 감사하겠지만 꼭 감시를 해달라는 건 아닙니다.”
인형튤립은 1 코인 정도로 안정적으로 거래되는 소재 아이템이기는 하다.
그런 게 아무 데나 널려 있으면 당연히 누가 가져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여기는 건물 CCTV도 있고, 또 표지판을 세워두면 어느 누가 감히 우리 길드에서 키우는 튤립을 훔치려 하겠어.
이 화단 앞이 비어있고, 건물 바로 앞이라서 확인하기도 편해서 부탁한 거였다.
강시철도 방금 한 말은 그냥 나를 놀리려고 한 말이었는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형튤립은 마력 포션의 소재로 많이 쓰이지만, 사실은 네크로맨서의 연구에도 종종 쓰이곤 하는 소재지. 하지만 나도 인형튤립이 구근에서부터 자라는 걸 지켜본 적은 없었는데,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되겠구먼.”
***
그렇게 해서, 나는 길드 아지트 화원 안과, 건물 밖의 화단 앞에 인형튤립을 기르게 되었다.
화원 안에서 기른 인형튤립은 매일 두 배로 불어나며 쏠쏠히 코인을 벌어다 주었다.
화원의 크기 때문에 동시에 키울 수 있는 인형튤립의 수가 서른 개로 제한되기는 했지만, 이건 코인을 모아서 화원을 업그레이드하면 해결되는 문제고.
다른 문제는 화단 앞의 인형튤립에서 발생했다.
셀파의 노래를 들려주어서 인형튤립 몇 개가 빠르게 싹을 틔웠는데, 누군가가 거기에 눈독을 들인 것이었다.
“사, 살려주세요...”
야음을 틈타 인형튤립 새싹을 캐가려던 여자였다.
강시철이 무시무시한 환각을 보여줬는지, 지금은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이지만.
처음 봤을 때와는 완전히 인상이 바뀌었네.
“음? 자네가 아는 사람인가?”
강시철이 의아해하며 내게 물었다.
“네... 아는 사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지만요. 그렇죠, 신수련 씨?”
그녀는 우리 길드에 면접을 보러왔던 마법사, 신수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