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화
백운산 코라니 토벌전 (1)
백운산 밑에는 울타리가 길게 쳐져 있었다.
울타리 뒤편에는 지금은 비워둔 경계초소가 있고, 그 대신 작은 포탑이 이따금 포를 움직이며 백운산 위를 살폈다.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생긴 포탑은 아마도 공학자가 만든 거겠지.
지원가의 상위직인 공학자는 저런 도구들을 만들어내는 데에 특출 난 재주를 갖고 있다.
내 길드에도 레일이라고 재주꾼이 있었는데.
“저... 유 선생님.”
내 뒤에서 심마니 아저씨가 슬쩍 말을 걸었다.
“저는 인제 돌아가려고 하는데유.”
“네. 안내는 산자락까지로 하셨죠. 그래도 혹시 괜찮으시다면 조금만 더...”
“아이구. 싫어유. 저 안까지 들어갔다가 코라니한테 물린 심마니가 벌써 열이 넘어유.”
심마니 아저씨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싫어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
현지를 잘 아는 심마니에게 길 안내를 받는 게 편하긴 하겠지만, 그 대신 상세한 지도를 받아두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유 선생님이랑 헌터님들도 조심하세유. 요새 코라니들이 짝짓기 철이라 아주 흉포할 거예유.”
심마니 아저씨는 코라니의 코뿐만 아니라 송곳니도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고는 먼저 내려갔다.
나는 길드원들을 살폈다.
전위에 S급 전사 장비비, E급 전사 박정하.
중위로 F급 암살자 이연채, F급 지원가인 나, 유서준
후위에 C급 마법사 신수련.
마지막으로 짐꾼 셀파.
대낮이라 웰시는 뼈다귀 개껌 안에 들어가서 자고 있다.
태양빛에 가득한 양기(陽氣)는 유령견 웰시에게는 수면제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웰시가 빠지면 색적과 탐색에서 다소 불리하긴 하겠지만, 사실 태양빛이 쨍쨍한 한낮에서는 그렇게 대단한 색적 및 탐색 능력이 필요하지 않기도 하다.
야간 산행이 되면 웰시의 힘을 빌려야할지도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해 뜬 동안에 끝내는 게 좋겠지.
“그럼, 올라갑시다.”
“대표님과 함께하는 등산이라니...”
신수련은 툴툴대다가 장비비의 눈총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줄줄이 산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날은 좋고, 등산로는 완만하다.
초입 쪽에는 이따금씩 헌터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어느 정도 관리가 된 것 같다.
아직 몬스터들이 나오기에는 이르기도 해서, 다들 편하게 대화를 나누며 다리를 움직였다.
아니. 다는 아니었을까.
“헤엑... 헤에엑...”
신수련은 굉장히 이상하게 숨을 헐떡여서 나와 박정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장비비가 홱 등을 돌려 신수련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신도둑! 똑바로 서! 똑바로 서서 걸으라고!”
“힘들단 말이야...! 난 마법산데... 이렇게 힘쓰는 건 내 할 일이 아니란 말이야...!”
그녀 말대로 신수련은 전형적인 마법사 캐릭터.
마력 능력치는 높은 대신 체력과 활력 능력치가 처참하다.
“대표님... 헤엑... 차라리... 헤엑... 부호왕 의뢰를 받으시지...”
신수련은 장비비에게 눈총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딴소리를 했다.
하긴. 저 성격이 하루 이틀에 고쳐지겠어.
나는 가볍게 그녀의 말을 넘기며 대답해주었다.
“무함마드 왕은 독재자로 악명 높잖아요. 괜히 그런 데에 얽혔다가는 우리 길드 명성이 단번에 추락할 걸요.”
“그럼 녹십자 교단 의뢰라도...”
“서울 밤거리를 뒤져서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박쥐를 잡아오라는 건 너무 애매해요. 괜히 힘만 빼고 아무 것도 못 얻을 수도 있죠.”
그에 비하면 백운산에 들어가 몬스터를 퇴치하고 천마산삼 자생지를 확보해달라는 의뢰는 적당히 구체적이면서, 보상도 좋다.
천마산삼은 종합능력치를 영구적으로 올려주는 최상급 영약이기도 하지.
“어차피 그걸 저한테 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 헤에엑... 저 힘들어요...!”
“그러지말고 조금만 힘내서 걸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붙임성 좋은 이연채가 신수련 뒤로 돌아가서 등을 떠밀어주었다.
장비비는 그 기지배 엉덩이를 걷어 차줘야 한다고 방방 뛰었지만, 나는 이런 것도 나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서로 협력하고 도우면서 고난을 헤쳐 나가는 거.
신수련도 동료들의 진심 어린 도움을 받다보면 어느 정도는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까?
어쨌건, 신수련 외에는 다들 열심히 산을 올랐다.
사실 신수련과 내 체력 수치는 그렇게 차이나지도 않으니까, 그녀도 정말로 힘들다기보다는 그냥 엄살을 부리고 있는 거겠지.
우리는 금세 계곡 앞까지 다다랐다.
여기가 지도에 표시된 코라니의 집중출몰지 중 하나였다.
“지금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네요. 일단 저기 바위 밑으로 돌아가서 기다립시다.”
커다란 바위가 서로 기대고 있는 곳이었다.
절묘하게 우리 일행들의 모습을 숨길만한 곳이기도 했다.
돌아다니면서 코라니를 찾느니, 코라니가 올만한 곳에서 매복하며 대기하는 게 낫겠지.
바위 밑에 들어가자, 신수련은 신발을 벗고 자기 발을 주물럭거렸다.
“으흐. 힘들다.”
“신도둑! 누가 신발 벗으래! 이러다가 코라니 나타나면 어쩔 건데?”
“신발 벗어도 마법은 쓸 수 있거든? 나 마법사야!”
“그래? 난 S급 선봉장이야!”
신수련은 말문이 턱 막힌 눈치였다.
하긴. 그녀도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지만, S급에는 한참 못 미치는 C급이니까.
신수련이 기죽을 틈을 타서 장비비가 막 구박을 늘어놓는데, 이연채가 내 팔뚝을 콕콕 찔렀다.
“길마. 저기 좀 보세요.”
그녀는 계곡 쪽을 손짓했다.
코라니 한 마리가 물가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들 조용. 바로 공격할 수 있게 대기해요.”
코라니는 화난 사슴처럼 생겼는데, 코뿔소처럼 코에 뿔이 나 있고 주둥이에는 송곳니까지 있었다.
눈매도 사나워서 무척이나 흉폭해 보이는 녀석이다.
코라니는 물을 마시려다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바위 쪽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여기 숨어있다는 걸 눈치 챈 것 같다.
"형님. 내가 할까?"
장비비는 장팔사모를 꽉 쥐었다.
그녀의 공격력 정도면 혼자서도 어렵지 않게 코라니를 토벌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녀를 코라니의 퇴로 쪽으로 보냈다.
이번에는 길드원끼리 합을 맞추고 신수련의 실력을 보는 게 목적이니까.
장비비가 아쉬워하면서도 코라니의 뒤로 멀찍이 돌아가는 사이, 박정하가 바위 뒤에서 모습을 내밀었다.
그는 『아라크네 아머』를 갖춰 입고, 횃불아귀 피질로 만든 『아귀꼬리 방패』를 들고 있었다.
- 쾌액!
소리를 지른 코라니는 코를 치켜들고 달려들었지만, 박정하는 뒤로 조금 밀려났을 뿐 방패를 들고 굳건하게 버텨냈다.
아이템으로 치장을 해준 덕도 있지만 역시 박정하는 배짱도 있고 믿음직스러운 든든한 전위다.
"이얍! 받아랏!"
그 사이 이연채가 화살을 쏘아 코라니에게 출혈을 강요했다.
코라니는 성을 내며 이연채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박정하가 코라니에게 바싹 붙어서 돌진할 거리를 내주지 않았다.
코라니는 뒤로 도망가지도 못하고 앞으로 나서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따금 방패에 턱을 치이거나, 화살을 옆구리에 맞거나 하면서 점점 더 기력을 잃는 모습이 보인다.
이제 슬슬 결정타를 넣을 때다.
내가 신호를 보내자, 신수련이 짤막한 완드를 고라니에게 겨누었다.
정확히는 고라니와 신수련 사이에 있는 박정하가 겨누어졌는데.
“자, 잠깐만요. 그거 아군피해 없는 마법이에요?”
“쏘면 알아서 피하겠죠. 다들 그러던데요.”
“…….”
“타올...”
“잠깐!”
나는 신수련을 멈추고, 망라 스킬을 박정하에게 사용해서 의념을 보냈다.
《망라(網羅) Lv.1》
〈근처에 있는 부하들과 연결하여 소통할 수 있다.〉
박정하는 방패로 코라니를 때리면서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는 겨우 한숨을 돌리고 신수련에게 말했다.
“좋아요. 셋, 둘, 하나하면 쏘는 겁니다. 자, 셋, 둘, 하나!”
“타올라라!”
《불꽃탄 Lv.3》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탄을 발사합니다.〉
농구공만한 화염구가 완드 끝에서 뿜어져 나왔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박정하는 곧장 옆으로 굴러서 피했다.
코라니는 갑자기 훤히 뚫린 전방으로 불꽃탄이 날아오는 걸 보고는 기겁했다.
급히 다리를 꺾어보지만,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 쾅!
- 꾸웨엑!
불꽃탄은 코라니의 몸에 직격하고는 더 크게 타올랐다.
코라니는 급히 물가로 뛰어 들어가려 했지만, 무방비하게 뒤를 드러낸 건 패착이었다.
박정하가 뒤에서 방패로 낭심을 올려 찍은 것이다.
- 꾸... 꾸... 꿱.
코라니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나는 물론이고 직접 코라니의 낭심을 공격한 박정하도 괜히 배 아래가 욱신거려서 다리를 비척거렸다.
하지만 다른 길드원들은 깔끔한 연계공격이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셀파는 쪼르르 달려와서 코라니의 코와 송곳니를 챙겼다.
역시 짐꾼이 있으니 편하다.
내친 김에 배낭에서 초콜릿바와 음료수를 나눠먹으며 잠시 쉬기로 했다.
서로 방금 있었던 전투에 관해서 감상도 나누고 칭찬도 하는데, 역시 제일 화제를 모은 건 신수련이었다.
산에 올라올 때는 허덕이면서 영 시원찮은 모습을 보였지만, 코라니에게 강력한 마법을 꽂아 넣으면서 능력은 괜찮다는 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그녀와 툭탁거리면서 싸우던 장비비도 나름 쓸만한 마법사라는 평을 남길 정도였으니.
나도 다른 길드원들과 마찬가지로 신수련을 한껏 칭찬하고, 그 뒤에 작은 당부를 하나 덧붙였다.
“그런데 불꽃탄은 나무가 밀집한 곳에서는 사용을 피하는 걸로 하죠.”
“왜요?”
“보니까 화염구가 한 번에 터지는 게 아니라 계속 불이 붙어 있더라고요. 그런데 요새 비가 안 와서 산이 바싹 말라있어서, 혹시라도 불이 나무에 붙으면 산불이 날 수도 있잖아요.”
"불꽃탄은 제 스킬 중에 제일 위력이 센 건데요. 그걸 안 쓰면 어떡해요?"
"다른 동료들도 있잖아요. 서로 조금씩 합을 맞추면서 하는 거죠."
신수련은 내키지 않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불안한데.
그래도 길드 마스터이자 파티장이 하는 말인데, 막 무시하진 않겠지.
***
“불이야!”
우리는 타오르는 백운산을 뒤로하고 허겁지겁 계곡으로 뛰어 내려갔다.
둥지에 불이 나서 성난 코라니들이 우리의 등 뒤를 바싹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