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화
거인 주방장의 부엌 (1)
다시 도전한 소원의 탑.
이번의 목표는 탐식욕의 층을 정복하고, 가능하면 그 이후의 수면욕의 층까지 정찰하는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제일 중요한 건 안전이죠. 다들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도록, 전방에 안전 구호 실시!”
“안전! 좋아! 완전! 좋아!”
“좋아요. 그럼, 진입합시다.”
“진입!”
저번과 마찬가지로 도개교를 넘어 소원의 탑에 다시 들어섰지만, 이번에는 물욕을 자극하는 샹들리에도 늙은 왕 마이트라스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 번 도전에 나선 파티에게 또 같은 말을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겠지.
우리는 줄줄이 고성(古城)의 복도를 걸어 들어가, 호롱불아귀의 미로로 향했다.
“저번에 그려둔 분필 자국이 사라졌어요.”
이연채가 유심히 벽면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리셋된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혹시나 해서 확인해보니 『호롱불아귀의 미로 지도』는 새로이 바뀐 미로를 비춰주고 있었다.
미로가 리셋됨에 따라서 이 미로 지도도 리셋되는 것 같다.
우리에게는 다행이지만 비싼 코인 내고 미로 지도를 필사해간 백호랑은 눈물 좀 흘리겠는걸.
좀 미안하게 됐다. 나중에 술이라도 사 줘야지.
“일단은 어서 갑시다.”
[포만감 : 66]
벌써부터 포만감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행동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배를 채우고 들어왔지만, 이 미로에서는 한 순간 발이 묶인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호롱불아귀의 미로 지도』가 비춰주는 지름길을 따라서 최대한 빨리 나가는 게 좋겠지.
서둘러 지름길을 따라 가는데, 호롱불아귀가 한 마리 나타났다.
- 뚧. 뙑.
“아핫! 엄청 못생겼어. 대표님. 제가 할까요?”
신수련이 완드를 겨누었다.
나는 그녀의 완드를 살짝 잡아서 내리고, 웰시를 가리켰다.
“이번엔 웰시한테 맡기죠.”
“알알알!”
유령견 웰시가 짖어대자, 호롱불아귀는 그 쪽으로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 꿇.
“입!”
호롱불아귀가 웰시에게로 주의가 쏠린 틈을 타서, 장비비는 사각지대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장팔사모 창질 한 방에 호롱불아귀를 슥삭.
호롱불아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역시 아가씬 대단하십니다요.”
짐꾼 셀파는 얼른 달려가 호롱불아귀의 촉수과 부산물을 챙겼다.
이것도 꽤 좋은 벌이가 되지만, 소원의 탑을 공략하려는 지금은 다른 잿밥에 눈 돌릴 수는 없지.
우리는 최대한 신속하게 호롱불아귀의 미로를 빠져나갔다.
『호롱불아귀의 미로 지도』는 출구로 가는 샛길도 알려주었다.
출구의 샛길이라니. 분명히 이전에는 없던 길인데. 이것도 아마 『호롱불아귀의 미로 지도』의 특전인 것 같다.
- 뚧. 뚧.
층지기인 횃불아귀가 정면만 보고 눈을 껌뻑이는 사이, 우리는 후다닥 샛길로 들어갔다.
그대로 출구로 나가면, 촛불이 줄줄이 늘어선 복도가 나왔다.
복도를 지나 그 끝에 있는 층계를 오르면, 문이 하나 나왔다.
나는 문을 열기 전에 길드원들을 돌아보았다.
장비비, 박정하, 이연채, 신수련, 웰시, 셀파.
다들 각자의 무기와 다짐을 쥐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뿌듯해지는 광경이었다.
나도 다짐을 바로 세우고 문고리를 돌렸다.
- 삐그덕
***
문 너머에 펼쳐진 건 주방의 풍경이었다.
벽에는 칼과 냄비가 걸려있고 화로에는 장작이 타오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과일바구니와 고기를 잘라둔 도마가 놓여 있다.
잘은 모르지만 중세 서양식 주방 같은 인상이다.
단 하나 이상한 점이 있다면, 그 모든 게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거였다.
아니. 우리가 작아져서 크게 느껴지는 걸지도.
방금 전에 넘어온 문조차도 까마득한 절벽처럼 느껴질 정도니까.
크기는 상대적인 거니까 이 곳이 큰 건지 우리가 작아진 건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이 공간 또한 호롱불아귀의 미로처럼 소원의 탑 밖과는 전혀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이계라는 거지.
【소원의 탑 - 욕망의 층(2층) 거인 주방장의 부엌 진입】
[설명 : 거인 주방장은 허락 없이 자신의 부엌에 침입한 자들을 바퀴벌레로 여깁니다. 거인 주방장의 손바닥에 얻어터지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가 바퀴벌레가 아님을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미식과 괴식으로!]
거인 주방장이라는 작자는 식탁에 엎드려 자는 뚱뚱한 콧수염 남자일 거고.
이 층을 빠져나가려면 저 주방장에게 우리가 바퀴벌레가 아님을 증명하고 열쇠를 받아야 한다는 건데.
“저기 주머니에 열쇠 삐져나온 거 아니야?”
콧방울을 불면서 자고 있는 주방장의 바지 주머니에 반짝이는 열쇠가 보였다.
저것만 샥 훔쳐 가면 이 층은 바로 넘어갈 수 있을 거 같은데.
하지만 이전 길드원들과 이 층을 공략해본 장비비는 고개를 저었다.
“열쇠를 훔치려고 하면 바로 일어나더라.”
“그래? 그래서 어떻게 했어?”
“둘러싸고 마구 때렸지.”
우리 길드의 정예 멤버 999명이 한꺼번에 둘러싸고 마구 때렸다면, 저 거대한 주방장이라도 당해낼 수는 없었겠지.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 별로 도움 되는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열쇠를 훔칠 수는 없다는 거고.
그렇다면 이 층에서 요구하는 대로 미식과 괴식을 준비하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추가 설명 : 주방장이 잠에서 깨기 전까지 그를 만족하게 할 정도의 미식을 만드세요. 미식을 만들 시간이 부족하다면, 괴식을 만들어 주방장에게 먹이세요. 주방장은 괴식을 먹으면 기절해서 더 오래 자게 될 겁니다.]
좋아. 룰은 대충 이해했다.
이 층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주방장의 마음에 드는 미식을 만들어 열쇠를 받아내야 하는 거다.
미식을 만들 수 있는 제한 시간은 주방장이 잠에서 깰 때까지.
하지만 주방장에게 괴식을 먹이는 걸로 추가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거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시험을 시작한다는 듯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주방장의 기상까지 : 60분]
허나, 거절한다.
나는 규칙을 무시하는 룰브레이커가 되겠다!
“셀파.”
“옛. 나으리.”
짐꾼 셀파는 곧장 배낭을 열어서 준비해온 식재료와 먹거리들을 확인시켜 주었다.
일반적으로 미식이라고 할만한 프랑스 코스 요리에서부터 스테이크, 스시, 동파육, 타코, 라면, 우동, 족발, 보쌈, 탕수육, 김치, 아이스크림까지.
전부 미리 잔뜩 준비해온 것들이다.
이걸 이대로 주방장에게 먹이면 미션은 바로 클리어 되겠지.
“바로 움직입시다!”
꼼수를 마련해왔다고는 해도, 지금 우리는 바퀴벌레만큼 작아진 상태다.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부엌을 뛰어다니는 것만으로 60분은 훌쩍 지나가버리고 말 거다.
우리들은 우르르 테이블 다리 밑까지 달려갔다.
이연채는 코라니 코뿔 화살촉으로 테이블 위쪽을 겨냥하고 화살을 쏘았다.
- 핑!
화살에 묶인 로프가 휘리릭 풀어지다가 어느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다.
화살촉은 테이블의 얇은 옆면에 정확히 박혀 있었다.
“잘 했어요!”
“헷헷.”
“그럼, 차례대로 올라갑시다.”
시간이 촉박하니 화살을 한 번 더 쏴서 로프 두 개에 길드원들을 나눠서 올려 보냈다.
테이블 위에 다 올라갔을 때에는 이미 십 분이 경과한 후였다.
- 드르렁... 푸우우...
주방장은 한쪽 뺨을 테이블에 대고 자고 있었는데, 그가 코골이를 할 때마다 테이블은 지진 난 것처럼 떨려왔다.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 차이가 실감된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니까, 어서 이 층을 클리어하고 나가는 게 상책이겠다.
“형님. 저기 접시에 먹을 걸 놔두면 주방장이 자면서 먹어.”
장비비가 접시를 장팔사모 창끝으로 가리켰다.
우리는 셀파를 앞세우고 접시까지 달려갔다.
“나으리. 그럼 여기다 풀어놓겠습니다요.”
셀파는 배낭에서 준비해온 음식들을 꺼내 접시에 올려놓았다.
우리 길드원 전체가 수영하며 놀아도 될 정도로 커다란 접시에 조그마한 미니어처 같은 음식들이 하나씩 차례대로 올려졌다.
이대로 클리어 문구가 나오나 싶었는데, 그 대신 나온 것은 경고 문구였다.
[경고 : 준비해온 음식을 풀어놓는 것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뭐야!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렇게 외쳤지만 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반대로 주방장이 볼을 긁적이면서 일어날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든 요리를 해서 미식이든 괴식이든 내보이라는 게 이 층의 시험이라는 건가.
음식을 준비해오는 꼼수는 안 통한다 이거지...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될 경우의 상황도 상정하기는 했다. 좀 귀찮아지겠지만 정도(正道)로 돌파하는 수밖에.
“미식팀하고 괴식팀, 갈라집시다!”
“네!”
미식팀 : 박정하, 이연채, 셀파
괴식팀 : 장비비, 신수련, 웰시
맛잘알과 맛알못들은 삼 대 삼으로 갈라졌다.
박정하와 이연채, 셀파는 신선한 재료를 얻기 위해 테이블 위의 과일 바구니와 고기 도마로 달려갔다.
반면 장비비, 신수련, 웰시는 바닥부터 훑기로 했다.
잘 찾아보면 바닥에 떨어진 고깃조각이나 풀떼기가 있을 테니까. 괴식 재료로는 아무래도 그런 게 낫겠지.
“형님! 얼른 이쪽으로 와!”
“왜? 나는 미식팀으로 가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장비비가 억지로 나를 당겨서 로프 아래로 끌어내렸다.
어쩔 수 없이 나도 일단 괴식팀에 합류해서 조금 손을 거들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바닥에 먼지가 이렇게 많았나.”
“우리가 작아서 그래. 그러니까 조그만 먼지도 엄청 커 보이고 많아 보이는 거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뭐 주울 게 없나 하며 보는데, 무언가가 엄청나게 빠르게 시야 안팎을 오갔다.
- 사사삿
“바, 바, 바...”
“알!”
신수련의 말을 웰시가 받았다.
바알이란 건 아니고, 바퀴벌레였다.
우리가 딱 바퀴벌레만한 크기가 되었기에 바퀴벌레는 딱 우리만 했다.
엄청나게 크고 징그러워 보인다는 말이었다.
반질반질한 껍질과 가시 돌기가 달린 진갈색 다리가 자세하게 보이니까 더 고역이었다.
- 사사삿
게다가 바퀴벌레는 우리를 먹잇감으로 봤는지 좌우로 오가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저게 감히!”
장비비는 분개해서 장팔사모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창으로 후려쳤다가 바퀴벌레 진액이 사방으로 튀는 건 좀 그런걸.
나는 신수련에게 마법을 부탁했고, 신수련은 기다렸다는 듯 완드를 휘둘렀다.
“타올라라!”
《불꽃탄 Lv.3》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탄을 발사합니다.〉
- 쾅!
불꽃탄이 바퀴벌레에게 직격하며 불길을 터뜨렸다.
바퀴벌레는 다리를 비틀며 안쪽으로 오그라들었다.
내가 한 가지 간과했던 건, 바퀴벌레 타는 냄새가 보통이 아니었다는 거다.
바퀴벌레보다 한참 작고 가벼운 모기도 타는 냄새가 꽤 역한데.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바퀴벌레가 타는 냄새는...
“우우웩!”
신수련은 입을 가리고 헛구역질을 했다.
다만 웰시는 그 냄새가 맘에 들었는지 킁킁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 맛알못이 좋아한다는 건...”
“괴식 재료로 안성맞춤!”
장비비는 히히 웃으면서 타다 만 바퀴벌레 사체를 끌어당겼다.
나는 주방장이 좀 불쌍해졌다.
하지만 이 층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겠지.
바퀴벌레랑 새우랑 맛이 비슷하다는 말도 있고. 중국에서는 바퀴벌레 튀김을 먹는다고도 하잖아.
“일단은 다시 테이블 위로 올라가야겠네.”
나와 장비비는 바퀴벌레의 더듬이를 한 쪽씩 잡고 테이블 밑까지 사체를 끌어왔다.
그 다음에는 장비비가 먼저 올라갔고, 나는 밑에서 바퀴벌레 사체를 묶어서 올려주었다.
간신히 일을 마치고 괴식팀이 전부 테이블 위에 올라왔을 때는 시간이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주방장의 기상까지 : 20분]
당연히 미식팀은 재료 손질도 끝마치지 못하고 있었다.
박정하가 거대한 과도를 안간힘으로 들어 올려서 거대한 토마토를 자르던 차였다.
들어보니 라따뚜이를 만든다고 하던데.
밭요정이자 야채인간인 셀파가 만드는 라따뚜이라면 분명 미식(美食)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라따뚜이란 건 우리가 원래 크기에서 만들려고 해도 넉넉잡아 한 시간은 걸리지 않던가.
바퀴벌레 크기로 줄어든 지금에서는 라따뚜이를 만드는데 얼마나 시간이 더 들지 모르겠고.
“일단은 괴식으로 시간을 벌어야 해.”
“바퀴벌레라도 접시에 올리자!”
장비비는 얼른 바퀴벌레를 안아들고 테이블 위의 접시로 뒤뚱뒤뚱 달려갔다.
주방장은 한쪽 뺨을 테이블에 댄 채로 잠들었는데, 접시는 그의 안면 바로 앞에 있었다.
장비비가 그 접시 위에 바퀴벌레를 올린 순간이었다.
[괴식 점수 : 바퀴벌레 + 직화 + 탄내 = 6점]
[괴식 평가 : 역겨운 재료를 대충 태운다고 해서 괴식이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길. 괴식은 조화 속의 부조화에서 진정하게 빚어지는 것입니다.]
주방장은 코를 골면서도 접시 쪽으로 손을 뻗어, 바퀴벌레 구이를 덥썩 쥐어 먹었다.
바삭, 바삭하는 소리가 울리기를 잠시.
주방장은 오만상을 찌푸리더니 정말 끔찍한 냄새의 트림을 내뱉었다.
“웨에엑...”
신수련은 아예 멀찍이 도망가서 시원하게 토악질을 했다.
그래도 시간은 벌었다.
괴식 점수로 평가된 6점만큼 제한 시간에 6분이 더해진 것이다.
[주방장의 기상까지 : 26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저 바퀴벌레 직화 구이만큼 역겨운 음식도 없었을 텐데.
그걸 제출해서 얻은 괴식 점수와 추가된 시간은 생각보다 너무 적었다.
미식팀이 라따뚜이를 다 만들 때까지 필요한 시간을 벌려면 본격적인 괴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괴식이란 건 뭘까.
조화 속의 부조화란 건 또 뭐고.
나는 고민하다가 셀파를 불렀다.
“셀파. 배낭 안에 든 것들, 다시 꺼내보자.”
“나으리. 아까 준비해온 음식들을 풀어놓는 건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요?”
“그래. 준비해온 음식을 그대로 풀어놓는 건 인정되지 않지.”
그렇지만 그 음식들을 '섞어서' 내놓는다면?
그건 우리가 만든 요리로 인정될 여지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