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화
거인 주방장의 부엌 (2)
셀파는 배낭에 가져온 음식들을 모조리 꺼냈다.
배낭을 꽉꽉 채울 정도로 가져왔기에 음식의 종류와 양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이제 이걸 섞어서 괴식을 만들면 되겠지.
“근데 길마. 저걸 섞어서 미식을 만들 순 없을까요?”
거대한 애호박 위에 올라가서 톱질을 하던 이연채가 내게 소리쳐 물었다.
그거... 그럴 듯한 발상이잖아?
굳이 괴식으로 시간을 벌 필요 없이, 이 음식들을 섞어서 미식을 만든다면.
주방장의 시험을 단번에 통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중에서 가장 요리에 조예가 깊은 셀파는 고개를 저었다.
“나으리. 이미 맛있게 완성된 요리를 섞어서 더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는 힘듭니다요.”
“왜? 아... 과유불급이란 거야?”
“예이. 모든 색을 더하면 검은색이 되는 것처럼, 맛있다고 이것저것 섞으면 잡탕이 되고 말지요.”
하기는.
맛있는 거 + 맛있는 거 = 엄청 맛있는 거.
이런 공식이 없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맛있는 것들을 살짝 얹거나 같이 내놓는 것만으로는 '요리'로 인정받기 어려울 테니까.
그것들을 섞어서 요리로 만들려면 아예 재창조하는 수준을 거쳐야 하는데, 그럴 바에는 그냥 처음부터 만드는 게 쉽겠지.
결국 미식은 미식팀이 만드는 라따뚜이가 완성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건데.
“셀파. 라따뚜이는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요리 자체도 시간이 좀 걸리는데다가 쇤네들의 몸이 워낙 작아져서... 그래도 두 시간 안에 끝마칠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요.”
“알았어. 잘 부탁할게.”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요.”
셀파는 미식팀으로 돌아가서 재료 준비를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박정하가 거대 파프리카를 잡아둔 사이에, 이연채가 위에서부터 화살촉을 긁으며 아래로 쭉 내려와서 그것을 조각냈다.
미식팀이 열심히 미식 요리를 하는 사이, 우리 괴식팀은 괴식 요리로 시간 벌어줘야 한다.
그러니까 준비해온 음식을 섞어서 괴식을 내놓아야 할 텐데.
“좋은 아이디어 없을까?”
웰시가 데굴데굴 구르다가 족발 앞에 멈추어서 킁킁 냄새를 맡았다.
아이디어를 내놓으라니까 아이디어는 안 내놓고.
네가 흠향하면 맛이 맹맹해진단 말이야.
나는 웰시의 엉덩이를 펭펭 때리는 시늉을 했다.
웰시는 낑낑거리면서 도망갔다.
“웰시는 됐고. 다음. 수련 씨.”
“김치랑 라면을 섞어서 끓이는 건 어떨까요? 김치가 흐물흐물해져서 맛이 없을 거 같은데.”
“원래 김치라면 있잖아요. 비슷하게 부대찌개도 있고, 김치찌개도 있고.”
신수련은 끙끙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맛없는 걸 만들라니까 좀 어려운데요...”
“비비야. 너는?”
“나도. 갑자기 괴식을 만들라고 해도 곤란하다구.”
어쩌면 내가 질문을 잘못한 걸지도.
맛알못들에게 맛없는 걸 만들라고 주문한 게 잘못이었다.
맛알못들이 맛있게 생각하는 거, 그게 바로 괴식이잖아.
“수련 씨. 비비야. 웰시도. 다들 이리 모여 봐.”
괴식팀 세 명은 쪼르르 내게 다가와서 머리를 모았다.
“각자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걸 만들어 보자. 남몰래 이거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왔지만 남들 앞에서 말하기는 뭔가 꺼려져서 숨겨왔던 거.”
“괴식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거기에 대고 너희가 맛있어 하는 게 괴식이란다, 하고 말할 수는 없어서.
나는 입술에 침을 묻히고 술술 거짓말을 해주었다.
“원래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잖아. 미식의 정점은 괴식의 정점과도 통하는 거야.”
“그런 거야?”
“그런 거야! 자! 다들! 각자가 생각하는 가장 맛있을 것 같은 음식을 만들어오도록! 제한 시간은...”
[주방장의 기상까지 : 18분]
“10분!”
나는 손뼉을 쳐서 두 사람과 유령견을 쫓아 내보냈다.
다들 열심히 각자가 생각하는 미식, 즉 괴식을 만들기 위해 진땀을 뺐다.
그리고 10분 후.
“알!”
제일 먼저 괴식을 완성한 건 웰시였다.
웰시는 잔뜩 흠향한 족발을 무는 시늉을 했다.
영체 이빨은 족발을 스쳐갔지만, 대충 의미하는 바는 알 수 있었다.
웰시는 족발을 문 직후에 빙수를 살짝 핥았으니까.
족발빙수라.
그건 참 훌륭한 괴식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좀 어질어질할 정도로.
나는 웰시를 대신해서 족발빙수를 만들고, 그것을 주방장의 접시에 올렸다.
10인분의 족발과 10분의 빙수를 합해서 만들었기에 내게는 꽤나 거대했지만, 거인 주방장의 접시에 올리니 왜소하게만 보였다.
그래도 다행히 심사를 받는 데에 지장은 없었다.
[괴식 점수 : 밍밍한 족발 + 녹아내린 초코빙수 + 데코레이션 = 18점]
[괴식 평가 : 흠향해서 맛이 다 빠진 족발을 달달한 초코빙수 위에 올렸습니다. 뻣뻣하게 굳힌 해파리 아이스크림이 있다면 이런 맛이지 않을까요?]
주방장은 접시를 기울여 족발빙수를 먹고는, 혀를 빼문 채로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주방장의 기상까지 : 26분]
좋아. 이번 괴식은 꽤 성공적이었다.
이렇게 차차 시간을 벌면 되겠지.
“계속 갑시다. 다음, 수련 씨.”
“네, 대표님.”
신수련은 우리가 몽땅 들어갈 만큼 커다란 잔을 끙끙거리며 굴려왔다.
그 안에 넣을 재료는 장비비가 대신 자루에 넣어서 가져다주었다.
“비비가 가져온 자루 안에 든 게 뭐에요? 비린내가 엄청 나는데.”
“스시요. 생선이랑 초밥이랑 잘게 다져서 섞었어요.”
“스시...”
신수련은 장비비와 함께 잔을 일으켜 세우곤, 자루에 든 것을 몽땅 그 안에 던져 넣었다.
회덮밥이라도 만드나 했지만,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잔 위로 올라가서 요거트와 우유를 콸콸 채워 넣었으니까.
“이게 대체 뭐에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 스시랑 스무디거든요. 그래서 생각을 해봤는데, 스시 스무디를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구.”
“먹어봤어요?”
“아니요? 그치만 쌀 젤라토도 있고 장어 젤리 같은 것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스시랑 디저트는 그렇게 먼 사이가 아닐지도 몰라요.”
뭐... 어차피 내가 먹을 건 아니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묵직한 잔을 신수련이 들 수는 없어서, 장비비가 대신 기합을 넣고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괴식 점수 : 스시 + 다지고 비빔 + 우유 + 요거트 = 33점]
[괴식 평가 : 손으로 마구 조물거린 스시에 미지근한 우유와 요거트를 섞은 스무디입니다. 스무디에 대한 파격적인 모욕입니다.]
거인 주방장은 비몽사몽한 표정으로 일어나서는, 잔을 들고 스무디를 쭉 들이켰다.
- 쿵
그는 그대로 머리를 테이블에 박고 정신을 잃었다.
빈 잔이 테이블 밑으로 떨어져 굉음을 냈다.
생선 비린내와 우유 비린내가 섞여서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냄새가 진동해댔다.
냄새만 맡은 나도 좀 버티기가 힘들 정도다. 빨리 이 층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비비야. 다음 괴식 얼른 준비하자.”
“응! 근데 형님이 조금만 도와줘.”
“그래. 뭘 어떻게 해줄까?”
“튀김을 만들려고 하는데 기름 좀 받아와줘. 나는 튀김옷 만들고 있을게.”
나는 서둘러 테이블 저쪽에 있는 미식팀으로 갔다.
그동안 미식 요리는 꽤 진척이 되어서, 거대한 팬에 조각 썬 토마토와 양파, 마늘이 올려져 있었다.
셀파는 이제 막 팬을 화로에 올릴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나으리. 그렇지 않아도 비비 아가씨께 도움을 청하려고 했는데요.”
“그랬어? 난 비비가 기름 좀 받아와달라고 해서. 비비야!”
소리치며 방방 뛰자, 장비비는 척 알아듣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형님, 왜 불렀어?”
“셀파가 팬 좀 오븐으로 옮겨 달래. 기름은 여기. 돼지기름 굳힌 거. 라드라고 한대.”
“불 쓰려고? 잘 됐다. 나도 같이 쓸래.”
장비비는 라따뚜이 재료를 얹은 팬을 번쩍 들어서 화로에 옮겨주었다.
그리곤 자기 몫의 냄비도 그 옆에 나란히 두고, 라드를 통째로 던져 넣었다.
- 치이익
딱딱한 버터 같은 라드가 녹아내리면서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그런데 뭐 만들게?”
“탕수육!”
음.
팔짱을 끼고 보고 있자니, 장비비는 튀김옷을 입힌 고기조각을 라드 기름 속에 풍덩풍덩 던져 넣었다.
“돼지고기는 아닌 거 같은데. 뭐야?”
“코다리야. 쫄깃쫄깃해서 맛있어.”
- 지글지글
튀김옷이 기름에 튀겨지는 소리는 꽤 식욕을 돋웠다.
코다리 튀김이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다 익었나? 음! 다 익었음!"
장비비는 거대한 냄비 안으로 장팔사모를 찔러 넣어서, 튀김을 하나씩 건져 올렸다.
노릇노릇하게 튀겨진 튀김은 정말 맛있어보였다.
“이제, 소스 준비.”
장비비는 히히 웃으며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통을 꺼냈다.
진작 꺼내 둔 탓에 대용량 통 안의 아이스크림은 전부 녹아있었다.
장비비는 통을 옆구리에 끼고서 찐득찐득한 녹은 액체를 탕수육 위에 부어대는데.
아니. 그걸 왜 부어.
잘 나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확 틀어버린 느낌이다.
조화 속의 부조화... 이런 게 괴식이라는 걸까.
“코다리 탕수육 완성! 그런데 이제 민트초코 소스를 곁들인!”
“어, 얼른 주자. 오래 보고 있기 힘들다.”
“안 돼. 소스가 안에 스며들 때까지는 기다려야지.”
“…….”
30분 정도 기다린 후에야, 장비비는 접시를 거인 주방장 쪽으로 슥 밀었다.
코다리 탕수육은 물에 오래 있다가 나왔을 때의 손가락처럼 퉁퉁 불어 있었다.
[괴식 점수 : 코다리 + 돼지기름 + 튀김 +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시럽 + 눅눅함 = 68점]
[괴식 평가 : 탕수육인 척 하는 코다리 튀김으로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물렁한 식감이 입 안을 불쾌하게 만드는 괴식입니다. 튀김옷을 잔뜩 들러붙은 민트초코 소스는 색깔과 향기, 식감을 모두 악화시킵니다.]
거인 주방장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접시 안에 든 것을 집어먹고는 숨을 멈추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잠시 후에 호흡을 재개하긴 했지만, 주방장의 안색은 이미 민트초코처럼 새파래져 있었다.
좀 미안하긴 하지만, 어쨌든 셀파가 말한 두 시간은 벌어주었다.
이제부터는 우리 괴식팀도 미식팀에 달라붙어 라따뚜이를 만드는 데 손을 거들었다.
거대한 부엌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소금과 후추통을 굴리고, 던지고, 받고.
셀파의 몸으로 우려낸 육수 베이스로 라따뚜이 비법 소스를 만들고.
마지막으로는 가지와 토마토, 주키니 호박, 파프리카를 가지런하게 썰어서 팬 위에 뱅 둘러 배열하고 화로 위에 얹었다.
"이제 익히는 동안 삼십 분 정도 기다리면 됩니다요."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데, 맛있는 냄새가 부엌 안을 맴돌았다.
괴식 만들 때 실컷 맡았던 역겨운 냄새와 비교돼서 그런 건지 맛있는 냄새가 더 그윽하게 느껴졌다.
“배고프다.”
테이블 끝에 앉아서 다리를 떨던 이연채가 혼잣말을 했다.
그 옆에 주르륵 따라 앉아 있던 다른 길드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주방장 요리를 만든다고, 정작 우리는 제대로 뭘 먹지도 못했구나.
“지금 또 뭘 만들긴 어렵겠고, 싸온 거 남은 거라도 먹을까요?”
“좋아요!”
하지만 한참 전에 몽땅 미리 꺼내놓은지라 라면과 우동은 면발이 불어터지고, 보쌈과 피자는 다 식어 있었다.
그래도 시장이 반찬인지, 다들 맛있게 먹었다.
“신막내. 다대기는 이렇게 넣어 먹어야 맛있어.”
“대표님! 비비 선배가 직장 내 갑질해요!”
“일르지 말라고. 일름보야.”
툭탁거리는 장비비와 신수련의 싸움을 말리면서 식사를 마칠 때쯤에는 라따뚜이도 완성되었다.
이거 한 입 집어먹고 싶을 정도로 맛있어 보이는데.
그래도 얼른 내고 주방장의 시험을 마쳐야지.
모두 힘을 조금씩 보태서 팬을 들어 접시 위에 올렸다.
[미식 점수 : 채소 + 밭요정의 육수 + 적절한 익힘 + 협력 = 92점]
[미식 평가 : 신선한 재료를 적절하게 조리하여 만들어낸 요리입니다. 밭요정의 육수가 간을 잡아주고 재료들을 조화시켜 상당히 수준 높은 라따뚜이가 완성되었습니다.]
[주방장의 기상까지 : 5분]
아직 시간이 남아있지만, 미식을 제출하자 주방장은 번쩍 눈을 떴다.
그는 우리를 보고는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들어 후려치려고 하다가, 접시 위에 놓인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우리는 바퀴벌레가 아닙니다! 미식으로 증명하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외치자, 주방장은 고민하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음...
그는 들어 올린 손바닥으로 포크를 잡아서 라따뚜이를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수염 속에 숨겨진 입술이 우물우물거렸다.
라따뚜이를 올린 접시가 텅 비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방장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맛있게 드셨습니까?"
- 음.
주방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외쳐 물었다.
"그럼 우리가 바퀴벌레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게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깨끗이 비운 접시를 보고는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였다
- 음.
거인 주방장은 커다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서 내게 주었다.
거대한 열쇠는 내 손에 닿자마자 내 주머니 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아졌다.
【거인 주방장의 부엌 정복!】
[설명 : 당신은 모든 것이 커다란 주방장의 부엌에서 괴식과 미식으로 스스로가 바퀴벌레가 아님을 증명하고 거인 주방장의 인정을 받아 소원의 탑 2층을 정복하였습니다.]
[보상 :
1. 코인 + 2,000
2. 명성 + 40
3. 거인 주방장 부엌의 열쇠]
【스킬 획득!】
《요리 Lv.1》
〈재료를 조리하여 버프 또는 너프를 주는 음식을 만듭니다.〉
【스킬 획득!】
《요리 Lv.1》
〈재료를 조리하여 버프 또는 너프를 주는 음식을 만듭니다.〉
버그인가?
스킬 획득창이 두 번 떠서,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리고 셀파와 내 몸이 동시에 빛나는 걸 보고 약간 더 당황하기로 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귀여운 SD 표지가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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