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화
버려진 묘지 (2)
이연채는 언니 이은채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고 꿈이라는 게 그렇듯, 온갖 과장과 왜곡이 난무하는 중이었다.
이은채의 얼굴은 잔뜩 화장을 해서 반짝반짝 빛났고, 옷에는 수십 가지는 될 법한 훈장이 빼곡히 매달려 있었다.
이게 이연채가 생각하는 언니의 모습일까.
영광에 빛나는 뛰어난 언니. 그리고, 자신을 떠나 버린 언니.
이연채는 운동장 트랙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이은채는 휘적휘적 달려서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몇 바퀴고 이은채는 동생은 신경도 쓰지 않고 운동장 트랙 위를 달렸다.
이연채는 이따금 이은채의 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은채는 쏜살같이 달려서 아득히 멀리 사라졌다가 다시 운동장 저편에서 나타나서 이연채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은채가 운동장을 돌 때마다 이연채는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이 운동장 전체가 망령의 판이었다.
가만히 두면 이연채가 이 악몽 속에 완전히 삼켜지고 말겠지.
나는 망라 스킬을 통해 이연채에게 말을 걸었다.
‘원망스러우세요?’
이연채는 흠칫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길마?”
‘네. 저에요.’
“아. 이거 꿈이었지. 아니, 꿈이라서는 아닌가?”
이연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냥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원망스럽다니, 누가요?”
‘제가요. 따지고 보면 저 때문에 은채 씨가...’
“에이. 그건 아니라니까요. 어차피 결국 소원의 탑에 가겠다고 결정 내린 건 언니고.”
이연채는 팔베게를 하고 운동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 사이 또 한 번 이은채가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 달려갔다.
이연채는 무정하게 달려가는 언니의 뒷모습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저요, 언니를 따라잡고 싶었어요. 언니한테 말 한 적은 없었지만 사실은 언니를 동경하는 만큼 질투하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재능이 없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아카데미를 졸업해서 헌터가 되기로 한 거였는데...”
이연채가 넋두리 하는 사이 이은채는 저 멀리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저 뒤편에서 나타나 이연채를 지나 달리겠지.
“허무했어요. 언니가 사라진 후에는. 언니는 다 이겨놓고 도망간 거라니까요. 내가 쫓아갈 수도 없게 도망갔어. 그래도 길드에 들어와서는 뭔가 내 손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이연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비 선배님은 말할 것도 없고 수련 후배님도 사실 대단한 분이잖아요. 정하 오빠는 믿음직스러운 전위고, 웰시나 셀파도 다 자기 역할이 있고. 근데 저는 딜 못 넣는 암살자... 우습죠?”
그녀 나름대로도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우리 길드의 멤버 구성이 상당히 변칙적이고 불균형적인 건 사실이니까.
나이도 가장 어리고 신입인 데다가 능력도 고만고만한 이연채로서는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지도.
“길마가 신경 써주신 거 알아요. 그래서 더 죄송하고 면목 없고 그래요.”
이연채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어라 말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그녀가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말해주는 건 그녀를 기만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막연히 잘 될 거라고 말해주는 건 태만한 거겠지.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건 오만한 걸 테고.
이연채는 내가 고민하는 걸 눈치 챘는지 작게 웃었다.
“미안해요. 길마. 짐만 된다고 생각하고 있던 게 오히려 짐을 더 늘리고 있었네. 저 정말 쓸모없죠? 아, 또 부정적인 말 해버렸다. 헤헤.”
자책하는 이연채에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을 해주었다.
솔직한 말을.
‘필요해요.’
“네?”
“저는, 우리 길드는 연채 씨가 필요해요.”
이연채는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고백하시는 건 아니죠? 죄송한데 저는 사내 연애는 좀.”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진지하게 고백하시는 거라면 고민 좀 해봐야하나.”
‘연채 씨.’
“푸흐흣. 죄송합니다.”
이연채는 한참을 꺽꺽거리면서 웃다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길마. 제가 필요하시다구요?”
‘네. 연채 씨는 꼭 필요한 인재에요.’
“왜요? 솔직히 저만한 사람은 어디에나 널렸는데. 이번에 헌터들이 또 지원서 냈다고 들었는데요.”
‘하지만 우리 길드가 가장 별 볼일 없을 때 찾아와 준 건 연채 씨였죠.’
당장 길드가 망할지도 모르는데 찾아와준 건 이연채와 박정하 뿐이었다.
신수련은... 음, 좀 애매하긴 하지만 신수련도 포함하기로 하자.
그들은 길드가 망할 때까지 내 곁에 함께 해주겠지.
그래서 나는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연채는 언니 때문에 해소되지 않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녀가 그렇게 열등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연채는 매일 성실하게 훈련에 임하고, 전투에서도 맡은 바 소임을 다 해낸다.
화려한 한 방이 없더라도 꾸준하게 자기 역할을 다 해내는, 믿고 맡길 수 있는 길드원이지.
개성적인 멤버들이 많은 가운데 서글서글하게 분위기를 풀어주는 쾌활한 성격도 그녀의 강점이다.
“그렇게 생각하셨구나... 조금 부끄럽다.”
이연채는 붉어진 목을 손바닥으로 덮어 가리곤 웃었다.
그 때, 이은채가 다시 이연채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연채는 언니의 모습을 한 망령에게 소리쳤다.
“야!”
어마어마한 성량은 사자후를 방불케 했다.
망령도 찔끔해서 잠깐 멈추었을 정도다.
이연채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는 다시 한 번 외쳤다.
“언니인 척 하지 마! 잡귀신 따위가!”
- 키익!
망령은 사납게 울부짖고는 이연채에게 달려들었다.
이연채는 활을 쥐려다가, 손이 비어있다는 걸 확인하고 당황했다.
"내 코라니 활!"
‘연채 씨! 여기 꿈이에요! 꿈속에선 뭐든 할 수 있다구요!’
“맞다. 그럼... 빗나가지 않는 활 - 페일노트여!”
이연채의 손 안에 화려한 활이 착 생겨났다.
페일노트란 아서왕을 모시는 원탁의 기사, 트리스탄이 썼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활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은채가 애용하던 원거리 무기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연채는 그 활시위를 당겨 코앞까지 달려온 망령에게 쏘아붙였다.
- 파앙!
화살은 망령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 카아아악!
화살로 망령을 쏘아 죽일 수는 없었지만, 강한 의지로 악몽을 무너뜨릴 수는 있었다.
운동장이 모래성처럼 부서져 내렸다.
이연채는 활을 든 손을 내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마워요. 길마."
《암살자 Lv.4》
《치명타 Lv.2》
클래스 레벨업 문구와 스킬 레벨업 문구가 차례대로 떠오르고, 이연채의 몸이 번쩍 빛났다.
***
나는 번쩍 눈을 떴다.
그 때까지 유지되던 망라 스킬 덕에 옆에서 이연채도 눈을 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형님! 왜 이제야 눈을 뜬 거야!”
“비비? 내가 얼마나 잤어?”
“3년이야! 무려 3년이나 자고 있었다구! 아얏!”
“장난치지 마.”
장비비는 볼을 꼬집히고 잉잉거렸다.
“이잉. 십 분이야. 십 분.”
망라 스킬의 유지 시간이 십분에서 오 분 사이니까, 그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길드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대표님, 연채 선배님. 괜찮아요?”
악몽에 시달려서 식은땀을 좀 뺀 것 말고는 별 이상이 없었다.
만약 망령에게 속아 넘어갔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셀파가 간단하게 수프를 끓여오겠노라고 하는데, 갑자기 웰시가 크게 짖어댔다.
“알! 알!”
망령 두 마리가 나와 이연채의 그림자 속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걸 급히 쥐어보려고 했지만 영체는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스쳐 지나갔다.
“쫓아가요!”
우리는 허겁지겁 망령들을 쫓아갔다.
망령들은 버려진 묘지 곳곳을 빙빙 돌다가 외딴 비석 아래로 들어갔다.
“파봅시다.”
“도굴꾼이 된 기분인데요.”
“여기서 나갈 단서는 이것 밖에 없어요. 필요하면 도굴꾼이라도 되어야죠.”
묘지를 파내려가길 얼마간.
우리는 관 하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기껏 열어본 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잘못 짚은 건가?”
“... 알!”
웰시가 말릴 새도 없이 관 안으로 뛰어 내려갔다.
유령견은 관 모서리 안쪽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다가, 희미한 연기 같은 무언가를 꿀떡하고 삼켰다.
- 키이익!
짧은 비명소리가 울렸다.
악몽에서 들었던 악령의 비명소리와 같았다.
비명소리가 멈추자, 익숙한 홀로그램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버려진 묘지 정복!】
[설명 : 당신은 마음의 빈 틈을 파고 든 망령의 악몽을 극복하고 버려진 묘지의 묘혈을 찾아내 소원의 탑 3층을 정복하였습니다.]
[보상 :
1. 코인 + 2,500
2. 명성 + 45
3. 영성(靈性) + 1]
[영성(靈性) 수치는 유령견 웰시에게 적용됩니다.]
“알!”
웰시가 칭찬해달라는 듯이 울었다.
“요 귀여운 녀석, 요요요 귀여운 녀석!”
나는 밑으로 손을 뻗어서 웰시를 쓰다듬는 시늉을 해주었다.
웰시는 뱅글뱅글 돌다가 또 알! 하고 울었다.
그런데 웰시 이 녀석이 이전보다 좀 더 또렷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영성(靈性)을 웰시가 흡수했다는 건가?
한 번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지면이 울리기 시작했다.
[버려진 묘지는 영광의 대분묘로 이어집니다.]
뭐?
아니. 우린 이대로 돌아갈 거라고.
이번 원정 목표는 3층 정찰까지였다고.
- 쿠르릉
우리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겠다는 듯, 땅이 불쑥 주저앉았다.
"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