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화
영광의 대분묘 (2)
“와하하핫!”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파티홀 한쪽에서 박정하가 원년 길드멤버들과 허물없이 어울리고 있었다.
“그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길드 마스터의! 믿음직한 오른팔! 죽음을 무릅쓰고! 이 한 몸을 방패로 바쳐! 바실리스크를 막아냈다! 이겁니다!”
길드원들 사이에서 또 한 번 폭소가 터진다.
박정하는 뿌듯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바라던 영광스러운 개국공신 지위를 손에 넣은 모양이다.
한편, 셀파는 바로 그 근처에서 다른 짐꾼들과 자기 배낭 자랑에 여념이 없다.
소박한 꿈이지만 요정들은 원래 별로 욕심이 없지.
어쩌면 가장 큰 욕심을 가진 사람은 따로 있었다.
파티홀의 가장 빛나는 샹들리에 밑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는데, 그 앞의 소파에 세 명의 의자매가 앉아있었다.
금발을 비녀로 정리해 올린 서글서글한 인상의 미인.
적발 포니테일을 만지작거리면서도 당당한 위엄을 풍기는 아가씨.
검청색 양갈래머리를 하고 나머지 두 사람에게 귀여움을 받는 소녀.
유비비와 관유유, 그리고 장비비였다.
내가 그녀들을 바라보자 그녀들도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 반갑게 인사했다.
“아! 형님!”
장비비는 아예 소파에서 뛰어내려 내 쪽으로 달려왔다.
“연채도 왔네! 웰시도!”
“아... 네. 비비 선배님.”
“저기 호두 파이 맛있으니까 꼭 먹어봐. 그리고 형님은 이리 와. 왜 이렇게 늦었어?”
장비비는 나를 끌고 가서 소파에 떡하니 앉혔다.
관유유와 유비비가 차례대로 내게 인사했다.
“의형. 기다렸소.”
“상공. 연락 주셨으면 마중 나갔을 텐데요.”
나도 어영부영 인사했다.
꿈속의 존재라고는 해도 일단은 내가 아끼던 길드원이었으니까.
이렇게 실제로 만나는 건 이게 처음이기도 하고.
그런데 꿈속에서 만나는 것도 실제로 만나는 건가? 나도 슬슬 헷갈린다.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지.
“미안한데 내가 지금 좀 할 일이 있어서...”
“상공. 선약은 저희들과 잡지 않으셨습니까? 바쁘신 건 알지만, 가끔은 시간을 내어주셔요.”
“그게 좀 급한 일이라...”
“그리 급한 일이라면 티아라 공주가 알리러 왔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혹여 티아라 공주와의 일이신가요?”
“그건 아닌데...”
적당히 대화를 끊으려고 했지만 유비비는 능숙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괜히 추궁 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절절매게 된다.
장비비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유비비의 손을 조물딱거렸다.
“큰 누님! 형님 좀 혼내줘. 저번에 나한테 새벽햇살 녹인 걸 먹인 거 있지.”
“상공, 왜 그러셨어요? 작은 비비가 아이스크림에는 민감한 거 아시면서.”
“그게 다 이유가 있어. 그러니까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말이야.”
나는 어느새 세 자매와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 자매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어차피 꿈이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고 이어나가다가 시간이 지나는 걸 깜빡할 정도였다.
“길마. 저랑 얘기 좀 해요.”
이연채가 다가와서 말을 걸기까지는 이게 꿈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비비야. 잠깐 연채 씨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응. 대신 빨리 와야 돼. 이따 누님들이랑 부루마블 할 거니까.”
이연채는 나를 일으켜서 파티홀 한 구석으로 데려갔다.
“길마. 이거, 꿈인 거 잊은 건 아니시죠?”
“아니죠. 그냥 잠깐 정신이 팔려서...”
“여기 오래 있으면 위험해요. 저도 깜빡하고 파티를 즐길 뻔 했다구요.”
어쩌면 끔찍한 꿈보다 행복한 꿈이 더 위험할 수도 있겠다.
끔찍한 꿈에서는 깨어나고 싶어 발버둥을 칠 테지만, 행복한 꿈에서는 깨어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꿈은 결국 꿈에 불과하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어나야만 하는 거겠지.
그런데 꿈에서 깨어나려면 나나 이연채가 그랬던 것처럼 이것이 꿈이라는 것부터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꿈으로 속이려는 삿된 것들을 물리쳐야 하지.
나는 이연채와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고는 꿈에 빠진 이들을 둘씩 갈라서 깨우기로 했다.
이연채가 박정하, 신수련.
내가 셀파와 장비비.
물론 웰시는 깍두기다.
어쨌든, 아무래도 장비비보다는 셀파를 깨우는 게 더 쉬울 거 같아서, 나는 셀파에게 먼저 찾아갔다.
“셀파. 이거 꿈이야.”
“꿈...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요.”
셀파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바로 수긍하면 오히려 내 쪽이 당황스럽다.
“갑자기 꿈이라고 하면 부정하거나 뭐 그럴 줄 알았는데.”
“나으리가 하시는 말씀이니 쇤네는 따를 뿐입니다요.”
“그래?”
“그리고, 꿈인지 아닌지는 체크하는 방법이 있지요.”
혹시 그 유명한 토템 체크인가.
두근두근해서 기다리고 있자니, 셀파는 자신의 멜론 얼굴을 톡톡 두들겼다.
“뺨을 때려도 아프지 않습니다요. 역시 나으리 말씀대로 꿈인 거지요!”
셀파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짐꾼들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이 곳을 비추던 파티홀의 샹들리에 불빛이 탁하고 꺼졌다.
셀파는 꿈에 속은 게 허탈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기억납니다요. 저희는 버려진 묘지에서 영광의 대분묘로 떨어진 참이 아니었습니까요?”
“맞아. 기억하는구나.”
“그렇담 서두르셔야 합니다요. 꿈속에 오래 머물다가는 이 대분묘에 순장당하고 마니까 말입니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보니 이연채가 박정하와 신수련을 깨우치는 모습이 보인다.
신수련이 좀 징징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곧 이것이 꿈임을 인정했다.
박정하와 떠들던 길드 원년 멤버들, 그리고 신수련이 몸에 걸친 비싼 보석 장신구들이 슥 사라진다.
샹들리에 불빛이 꺼지면서 파티홀 곳곳이 어둠 속에 잠겼다.
남은 불빛은 이제 한 쪽 뿐이다.
나는 다시 그랜드피아노 앞으로 돌아갔다.
유비비와 관유유가 건반을 나누어 누르고 있던 참이었다.
옆에서 언니들의 합주를 듣던 장비비는 나를 보고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
“형님! 부루마블 하자!”
“나중에. 일어나서 하자.”
“일어나서라니?”
“비비야. 잘 들어. 이건 꿈이야.”
“꿈? 그게 무슨 소리야?”
장비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 그대로야. 꿈이라고. 이 파티홀도, 저기 힘내 너구리도, 전부 다. 우린 소원의 탑을 오르다가 어느 순간 꿈에 빠져든 거야.”
“이게 다 꿈이면... 누님들도 꿈 속 환상이라는 거야?”
“응. 맞아.”
장비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누님들! 누님들도 뭐라고 해줘!”
관유유와 유비비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내게로 다가왔다.
“의형. 너무하시오. 서운한 게 있었다면 말을 해주시지, 꿈이니 환상이니 하면서 무안을 줄 건 뭐요?”
“유유야. 상공께서도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시겠지. 허나 상공. 무언가 계책을 암시하신 거라면 저희에게도 알려주셔요. 저희와 상공은 의남매가 사이가 아닙니까.”
나는 옆으로 달라붙는 유비비를 밀쳤다.
“너희들은 의남매가 아니라 환상이야. 이 허깨비들아.”
“형님! 너무해! 누님들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누님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누님들이 소중하지 않은 거야?”
“소중하니까 그 모습을 흉내 낸 허깨비에게 속지 않으려는 거야.”
“형님! 자꾸 그런 말 하면 나도 화낼 거야!”
장비비는 벌컥 화를 냈다.
생각보다 훨씬 완고했다.
그녀가 정말로 이것이 꿈임을 모르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일깨워주는 사람만 있다면 이것이 꿈임을 인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그래서 셀파나 박정하, 신수련 모두 쉽사리 환상을 몰아낸 게 아닌가.
다만, 장비비가 이 꿈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거라면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자는 척하는 사람은 깨울 수 없다고 하니까.
장비비에게 있어 의자매들이 바로 곁에 있고 길드원들이 즐거이 축배를 올리는 이 꿈은, 깨고 싶지 않은, 너무나도 달디단 꿈인 걸까.
여기서 일어나라고 윽박지르는 건 내키지 않는다.
장비비의 꿈은 결국은 내 꿈이기도 하니까.
차이가 있다면 나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이 꿈에서 일어나고자 한다는 것뿐이겠지.
그러니까 그녀 스스로 이 꿈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자.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녀를 인형술사에게서 구해온 날 밤에 한 약속을 떠올리며.
“... 형님.”
장비비는 처음으로 머뭇거렸다.
나는 다만 솔직하게 요청했다.
“비비야. 이제 그만 일어나자.”
“그치만, 누님들이 여기 있는데...”
“약속했잖아. 네 언니들이랑, 우리 길드원들이랑 다 구해서, 우리 길드 건물로 돌아가기로. 기억 나?”
"... 응..."
"꿈 속에서만 바라지 않아도 돼. 우리는 언젠가 정말로 그 약속을 이뤄낼 거니까. 그치?"
"... 응!"
장비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새끼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형님하고 분명히 그렇게 약속했어. 이제 기억나. 바보처럼 까먹고 있었나 봐.”
"이제라도 기억해줬으면 됐어."
"그럼 이제는..."
"일어날 시간인 거지."
"그래, 맞아!"
장비비는 몸을 돌려 의자매들을 바라보다가 장팔사모를 집어올렸다.
관유유와 유비비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의매(義妹). 설마 이 언니들에게 대적하겠다는 것이냐?”
“작은 비비야. 아무리 장난이래도 언니들에게 창날을 겨누는 건,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이야.”
장비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꿈이라는 걸 알아도, 언니들의 얼굴을 한 환상에 창을 휘두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내가 대신 환상을 흩어줄 수는 없다.
결국 잠에서 일어나는 건 잠에 빠진 자신 스스로만이 가능한 일이니까.
그렇지만, 나는 장비비가 충분히 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고 장담한다.
내 생각대로 장비비는 우물쭈물하지 않고 의자매의 헛깨비들에게 맞섰다.
“누님들. 미안. 비비는 이제 일어나야 돼.”
“의매!”
“작은 비비야!”
의자매들의 호령소리에도 장비비는 의연히 말을 이어나갔다.
“일어나서 형님이랑 셀파랑 웰시랑 놀아줘야 되거든. 가끔 서영이 일도 도와주고, 정하랑 연채 훈련하는 것도 봐주고, 수련이가 사고 안 치나 감시도 해줘야 돼. 그리고... 그리고 있지, 언젠가는 누님들을 구하러 갈 테니까.”
장비비는 잠깐 말을 멈추고는 팔뚝으로 눈가를 훔치더니, 꿋꿋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비비는 일어나야 돼.”
장팔사모는 의자매들을 겨누었다.
유비비와 관유유의 모습을 한 허깨비들은 결국 본모습을 드러내고 흉하게 울부짖었다.
- 키에엑!
"누님들의 얼굴을 그렇게 쓰지 마!"
《뱀가르기 Lv.10》
〈꿈틀거리는 장팔사모 창날로 적을 가릅니다.〉
장팔사모의 궤적은 8자를 그리며 허깨비를 베어버렸다.
유비비와 관유유 허깨비들은 분한 비명을 내지르며 흩어졌다.
탁하고 샹들리에가 꺼졌다.
짙은 어둠만이 남았다.
어둠.
고요.
암흑.
적막.
거기에 작은 일그러짐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 콰직.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약간의 빛이 새어 들어왔다.
- 콰직.
부서지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리고, 갈라진 틈새 사이로 빛이 조금 더 새어 들어왔다.
- 콰지직...
빛 때문에 눈이 부실 정도가 되었다.
- 쾅!
갑자기 환해진 광경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군가가 내 몸을 잡아당겼다.
"으윽..."
"형님! 일어날 시간이야!"
실눈을 뜨고 보니, 장비비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그 뒤로 이연채와 박정하, 신수련, 셀파와 웰시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부서진 관들의 모습도.
우리는 어느새 관에 묻혀 있던 것이었다.
나는 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허벅지 위까지 쌓였던 먼지와 흙이 부스스 떨어졌다.
장비비는 먼지를 털어주면서 내게 물었다.
"잘 잤어?"
"그래. 덕분에."
"나도 그래!"
우리는 마주 보고 씩 웃었다.
이제 우리가 일어났으니, 대분묘의 주인을 깨우러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