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화
영광의 대분묘 (4)
“밀어붙여!”
나는 박정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토용들은 일제히 창을 겨누었지만, 장비비가 사선으로 돌진해나가며 창대를 모조리 부숴버렸다.
반쯤 남은 창대는 아라크네 아머에 튕겨나가고, 우리는 토용 대열과 격돌했다.
- 퍽!
그대로 몸을 부딪치자 한순간 목이 덜컥했다.
생각보다 토용이 단단해서 이 쪽에 가해지는 충격도 만만치가 않았다.
하지만 이 넓은 공간에 토용들을 전부 들일 수는 없다. 전선이 넓어지면 수가 적은 우리는 무조건 불리하니.
그러니 어떻게든 문 쪽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문 앞까지만 밀어내면 그 때부터는 장비비가 혼자서 다 막아낼 수 있을 테니까.
“밀어요!”
나와 박정하는 앞에 선 토용들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뒤에서 이연채와 신수련, 셀파가 우리의 등을 열심히 밀어주었다.
자꾸 옆으로 튀어나오려는 녀석들은 장비비가 좌우를 바삐 오가면서 박살내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깔끔하게 두 줄로 선 토용들을 그대로 문 바깥쪽으로 밀어내기만 하면 됐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 그그극...
“밀린다! 계속 밀어요!”
“이야아아!”
이연채와 신수련은 각자 나와 박정하를 힘껏 밀었다.
토용들은 접전에서 조금씩 밀려 문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녀석들은 부러진 창대를 휘두르려고 했지만, 우리가 거리를 내주지 않아서 팔만 든 채로 속절없이 밀려나갔다.
“조금만 더!”
“히야아아압!”
이를 악물고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토용들은 점차점차 뒷걸음질 치다가, 문 쪽으로 거의 다 밀려나갔다.
“됐다! 비비야!”
“응!”
좌우로 빠져나간 토용들을 전부 정리한 장비비가 다시 사선 방향으로 돌진해서 토용들을 마구 부숴버렸다.
“뒤로, 뒤로!”
무대가 좁혀지면 이제부터는 장비비의 독무대다.
나와 박정하는 장비비가 마음껏 장팔사모를 휘두를 수 있도록 비켜났다.
“덤벼, 덤벼!”
장비비는 좁은 곳에 몰려든 토용들 사이를 호쾌하게 휘저었다.
이리저리 치달리며 장팔사모를 휘둘러서 토용을 부술 때마다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나는데, 마치 메기가 흙탕물을 오가며 미꾸라지를 잡아먹는 듯했다.
- 붕!
장비비는 크게 장팔사모를 휘둘러 몰려드는 토용들의 허리를 베었다.
하반신만 남은 토용들을 걷어차서 넘어뜨리고 나니, 방 안에 남은 토용은 이제 하나도 없었다.
“청소 완료!”
장비비는 크게 외치고는 문설주에 몸을 기대고 섰다.
저렇게 문을 막고 서면 한 번에 하나, 많아야 두셋 정도만 상대하면 된다.
장비비에게 그 정도 토용을 상대하는 건 손쉬운 일이지.
우리는 그 사이 문 뒤쪽으로 모여서 태세를 재정비했다.
“다친 사람 없어요?”
“전! 괜찮습니다!”
박정하는 아라크네 아머를 입고 횃불아귀 방패를 든 만큼 상처 하나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들 괜찮은 것 같고.
“길마가 다치신 거 같은데요. 뺨에 피나고 있어요.”
“아, 어쩐지.”
볼이 따끔따끔하더라니.
토용의 창대가 부러질 때 나무 파편이 튀었던 모양이다.
이연채가 물티슈를 꺼내줘서 상처를 닦는 사이 셀파가 배낭을 뒤적였다.
“나으리. 생명력 포션 여기 있습니다요.”
“그건 아끼자. 별로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소형 생명력 포션도 하나에 2코인씩이나 한다. 긁힌 상처에 쓰기는 아깝지.
그 대신 소독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두었다.
“비비야. 넌 괜찮아?”
장비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장팔사모를 휘두르면서 대답했다.
“하품이 날 정도야. 생명력 포션 말고 잠 깨는 포션 있으면 그거나 갖다 줘.”
역시 토용은 장비비의 상대가 안 된다.
더구나 저렇게 문 앞에서 하나 둘씩 줄서서 와서 얻어터지는 상황에서야 말할 것도 없지.
“시지프 위셔.”
나는 해골이 숨어들어간 석관에 대고 말했다.
“시험은 이만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은 시간 낭비일 것 같은데요.”
시지프 위셔는 석관 안에서 음산하게 웃었다.
“너무 자만하는 거 아닌가? 아직 묘지기도 나오지 않았는데.”
“묘지기가 온대도 저 문 앞에서 비비한테 막힐 겁니다.”
“이미 와 있다면?”
이 안에 이미 묘지기가 와 있다고?
나는 흠칫해서 석관들을 둘러보았다.
그 중 하나가 작게 들썩이고 있었다.
“저거...!”
- 쾅!
들썩이던 석관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관을 열고 나타난 것은,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대낫을 든 해골 묘지기.
그는 석관을 박차고 나오자마자 근처에 있던 신수련을 향해 달려들었다.
“흡!”
무슨 명령을 내리고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나와 이연채, 박정하는 동시에 신수련에게로 뛰어갔다.
“타올라라!”
신수련은 급히 완드로 묘지기를 겨누고 불꽃탄을 쏘았다.
이글거리는 화염구가 묘지기에게 날아가 펑하고 터지며 불꽃을 튀겼다.
하지만 묘지기는 불길이 타오르는 판초우의를 펄럭이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연채가 화살을 쏴도 마찬가지였다.
“히윽... 아아악!”
몸을 돌려 도망치려던 신수련은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냈다.
그녀가 비틀거리면서 엎어지고, 묘지기가 대낫을 휘두른 건 그 다음의 일이었다.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그 다음 낫질이 신수련을 헤집기 전에 간신히 우리가 도착했다.
박정하는 방패를 치켜 올리고, 이연채는 화살을 계속 쏘아서 견제에 나섰다.
나는 얼른 신수련의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하지만 입으로 계속 끙끙거리는 것과 달리 신수련의 로브는 찢어진 곳이 없었다.
“어디에요? 어디 베인 거예요?”
“그게 아니라, 발 접질렸어요...”
신수련은 눈물을 머금고 퉁퉁 부은 발목을 보여주었다.
나는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셀파.”
“예, 나으리.”
생명력 포션을 셀파에게 받아서 신수련에게 건네주었다.
싸움이 한창인데 마법사를 부축해서 끌고 다닐 순 없으니까.
- 끼이이익!
칠판을 손톱으로 긁어대는 소리에 하마터면 생명력 포션을 떨어뜨릴 뻔 했다.
묘지기는 대낫을 비스듬하게 세워 횃불아귀 방패를 갉고 있었다.
“오래는! 못 버팁니다!”
박정하는 새파래진 안색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신수련을 일으키고서 이연채와 나까지 가세했지만, 이 층의 층지기인 묘지기를 상대하긴 버거웠다.
“비비야, 이 쪽으로! 비비 오면 정하 씨가 문 쪽으로!”
내 말을 들은 장비비는 곧장 이 쪽으로 달려왔다.
장비비가 자리를 비운 사이 토용들이 문 안으로 들어오자, 신수련은 완드를 겨누어 불꽃탄을 연이어 쏘아댔다.
- 펑! 퍼엉!
불꽃탄이 작렬하자 토용들은 파편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사이 장비비가 묘지기를, 박정하가 토용을 상대하는 쪽으로 위치를 바꾸었다.
박정하는 좁은 문을 끼고 토용들을 무난히 잘 막아냈다.
하지만 예상 외로 묘지기가 만만치 않았다.
장비비가 치고 빠지면서 기세를 꺾어놓으면 이연채와 신수련이 원거리에서 공격을 퍼붓고, 다시 장비비가 달려들어서 한참 싸우는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전투를 이어나갔음에도 묘지기는 거의 십 분 넘게 버텨냈다.
“으엑... 헥... 지독한 놈이야...”
그래도 결국 장비비가 묘지기의 손목을 가르면서 싸움의 향방이 결정됐다.
대낫을 놓친 묘지기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가 한 순간 뼛가루로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나도 그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했어. 비비야. 연채 씨랑 수련 씨, 셀파랑 웰시도요. 정하 씨는 잠깐만 더 고생해줘요.”
“형님... 너무 피곤해...”
“그래. 많이 피곤하겠다. 이제 바로 돌아가서 쉬자.”
장비비는 물론이고 다른 길드원들도 도저히 등반을 이어나갈 상태가 아니었다.
원래 3층 정찰까지만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4층까지 정복하게 됐네.
이제 시지프 위셔에게 보상만 받으면 바로 소원의 탑을 나서야지.
“알?”
“웰시. 왜 그래?”
“알알!”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맷돌을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돌을 움직이는 소리 같은데.
“기, 길마! 저기요!”
“대표님! 저쪽이에요!”
“형님! 석관들이 전부 움직이고 있어!”
- 드르르륵...
석관들이 들썩였다.
벽면을 따라 세워진 열두 개의 석관 중, 시지프 위셔가 숨어든 석관과 이미 묘지기가 나온 석관을 제외한 나머지 열 개의 석관들이.
- 쾅!
- 쾅!
- 쾅!
- 쾅!
그 열 개의 석관들이 차례대로 열리고,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대낫을 든 열 명의 묘지기들이 뛰쳐나왔다.
묘지기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열이라니.
이건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장비비가 애써서 두셋을 잡아둔다고 해도 나머지 묘지기들이 순식간에 후위들을 썰어버릴 거다.
승산이라고는 전혀 없는 싸움인 것이다.
“이건 꿈이야.”
신수련이 넋 놓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시지프 위셔는 이게 네 번째 꿈이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냐고 했지.
정말로 이것이 네 번째 꿈이라면?
그래. 이게 꿈이 아닐 리가 없다.
층지기가 열한 명이라니.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이런 개연성 없는 전개 따위, 손가락을 뒤로 꺾어서 현실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이는 거다.
꿈이라면 손가락을 꺾어도 아프지 않을 거고.
그럼 저 묘지기들과 싸울 필요도 없겠지.
지칠 대로 지친 장비비와 전의를 잃은 신수련, 불안에 떠는 이연채, 이를 악문 박정하, 나만 바라보는 셀파와 웰시를 승산 없는 싸움에 밀어 넣을 일도 없는 거다.
나는 왼 손으로 오른쪽 손가락을 잡았다.
이대로 손가락을 부러뜨리면, 어쩐지 정말로 이 모든 게 꿈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지프 위셔가 우리의 안락한 수면을 보장해줄 거다. 그런 기분이 든다.
…….